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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세상읽기] 명분 없는 침략 전쟁, 아프간 재파병
이순웅 2009.11.13 1277
명분 없는 침략 전쟁, 아프간 재파병  
[철학으로 세상읽기]

2009년 11월 13일 (금) 11:12:33 이순웅 숭실대 강사  webmaster@mediaus.co.kr  

정부는 아프간 재건을 위해 130명 규모의 ‘지방재건팀(PRT)’을 파견하고 이들을 경호하기 위해 300명 규모의 병력을 파병할 예정이라고 한다. 2002년, 2003년에 파병했다가 2007년에 철수한 의료지원단과 건설공병지원단의 숫자가 2백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병력 규모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성격도 사뭇 달라졌다. 전투를 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 군대가 비전투 임무만 수행할 것이고 자체 방어 이외의 군 전투는 피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

지난 2007년, 아프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몰랐던, 아니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부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바람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선교 활동에 나섰던 이들이 납치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일이 있었다. 비전투 부대를 보냈을 때도 탈레반의 보복이 있었는데 무장한 병력을 보냈을 때는 어떻겠는가. 과거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번 파병의 명분은 아프간 재건을 돕기 위한 것이란다. 그런데 아프간을 왜 재건해야 하는가. 파괴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파괴했는가. 미국이 파괴했다. 자기들이 파괴해놓고 자기들이 재건한단다. 거기에 우리 ‘지방재건팀’이 합류하는 것이고 그들을 경호하기 위해 무장한 군인을 파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탈레반은 우리의 행위를 침략으로 간주할 것이다. 민간인이나 민간 기업을 보내고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장 세력을 보내는 것은 과거에 제국주의 세력이 보여주었던 고전적인 침략 방식 중 하나다. 동인도회사가 그렇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렇지 않은가. 이라크에서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그곳에 가서 무엇이라 말했는가. “우리 군은 평화를 위해서 온 겁니다.” “뭐라고?” 그 발언은 인질을 구하기는커녕 희생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탈레반은 코흘리개 어린애가 아니다. 그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무력으로 공격하여 권력과 체제를 뒤집어놓을 만큼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침략자일 뿐이다. 우리 정부가 미국의 파병 요구를 수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그곳에 가면 ‘뭘 좀 먹을 게’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파병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고 국익이 된다면 내 주머니에도 뭔가 들어올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는 온데간데없고 자기 배에 뭔가를 채울 욕심뿐이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은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준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인가. 도대체 누가 더 큰 테러리스트인가.


조폭 두목 미국, 조직원 한국

미국 영화 <에어 포스 원 Air Force One, 1997>에는 의미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에어 포스 원은 미국의 대통령 전용기를 의미하는데, 테러리스트들이 그 비행기를 접수한다. 미국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이번에도 역시 영웅이 등장한다. 대통령은 거의 혼자서 테러리스트들을 물리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대통령의 딸과 테러리스트 우두머리 간의 대화이다. 인질을 처형한 일을 두고 대통령의 딸은 왜 사람을 죽이냐면서 항의한다. 그러자 그는 “네 아버지도 사람을 죽인다. 턱시도를 입고 전화로 미사일을 쏠 뿐”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면 그래도 미국 영화치고는 제법 ‘솔직한’ 편이다.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는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의 테러리스트라고 비판하면서 테러를 근절하려면 미국의 대외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자국민을 철저히 보호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한 인권 침해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기꺼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간다. 하지만 이라크, 아프간 침공 시 자신들이 폭격한 건물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는 관심이 없다. ‘해방자’ 미국의 이중성이다. 이라크 전쟁 승리를 선언했지만 사상자는 ‘승리’ 후에 더 많이 나오고 있고, 아프간에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자 우리에게 파병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 즉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벌써 잊은 모양이다. 이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했던 우리 병사들의 혼란은 자신들이 한 일이 정의롭지 않았다는 데서 온다.

아마도 먼 옛날에는 마음을 얻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씨족 단위 정도의 사회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몰살시키고 모두 차지하던 시대, 얻어야 할 마음조차 흔적 없이 사라진 시대, 완전한 배제를 통해 승리한 시대, 그런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인종 청소’를 하지 않는 한, 현재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어리석은 침략 행위일 뿐이다. 엄청난 화력을 앞세운 장개석 군대가 늘 밀리는 듯이 보이는 모택동 군대에게 패한 이유는 인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폭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그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조직원이 두목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그가 힘을 가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보호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그릇된 일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두목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 그가 나를 먹여 살리고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 나에게도 일정 지분이 생긴다. 나의 지분을 넓히려면 두목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커져야 한다. 두목의 번영은 나의 번영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우리 병사들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용병이란 돈 받고 싸우는 자를 말한다. 돈만 준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 돈을 준 자의 바람대로 행동한다. 조폭의 생리와 다를 바 없다. 어쨌든 우리 병사들은 미국이 주는 수당의 80% 이상을 고국에 송금했으며 한진그룹과 같은 기업들은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지금은 모양이 살짝 바뀌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큰 건물’을 빼앗은 미국이 ‘가게 하나 분양해줄 테니 와서 나를 도우라’고 한 셈이다. 그러나 장사가 잘되기는커녕 제대로 개점이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건물을 빼앗긴 자는 그것을 되찾으려 하지 거기에 진열된 상품을 사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복종을 낳을 수 있지만 동의를 얻을 수는 없다.


자원 전쟁, 정의(正義)의 실종

사실 이라크, 아프간 전쟁의 본질은 자원 전쟁이다. ‘테러에 대한 응징’은 명분이고 종교는 외피일 뿐이다. 국제 여론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무리수(無理手)를 두어가며 침략을 일삼는 것은 새롭게 부상한 강대국 중국에게 상당 부분의 석유 시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를 하나 더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남미의 석유를 중국으로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서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던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인심을 잃은 지 오래다.

미국이 서방 세계의 첨병 이스라엘과 새롭게 세워진 이라크, 아프간의 친미 괴뢰 정권에게 바라는 것은 석유와 가스의 안전한 수송이다. 미국이 ‘임명’한 아프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미국의 다국적 석유 회사 ‘유노칼’의 고문을 지낸 바 있다. 그의 별명이 ‘카불 시장(Kabul 市長)’인 이유는 그만큼 행정력의 범위가 넓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중국이 티베트 독립 운동을 억압하는 주요 이유는 그곳에 있는 풍부한 자원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미얀마의 독재정권과 손을 잡는 이유도 그곳에 있는 석유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세계는 생존, 발전, 번영을 위해 이념이나 정의를 포기하고 있으며 역대 우리 정부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아마도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가장 모범적인 국가일 것이다. 반소(反蘇), 반공(反共)을 위해서라면 제국주의 일본은 물론이고 친일세력의 뒤를 따르도록 하라. ‘정의’니 ‘권력의 정통성’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너를 돌볼 터이니 나의 이익이 곧 너의 이익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라. 그리하면 잘 먹고 잘살게 될지어다.

한국에서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평가한 미국은 이제 그 눈을 이라크, 아프간으로 돌렸다. 한국형 모델의 수출이다. 정의는 실종되었지만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니 별 문제없더라.


무엇을 할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의 이익을 정의라고 불렀다. 니체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중 하나를 ‘힘에의 의지’에서 찾았다. 이들의 말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강자, 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 힘을 가진 그는 곧 정의의 기준이 된다. 맞다. 과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들의 말은 깊은 허무주의를 담고 있다. 산다는 것이 겨우 이건가. 옳다느니 정의롭다느니 하는 것은 결국 강자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일 뿐인가. 그렇다면 희망이 없다. 강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설사 강자가 된다 하더라도 정의 편에 선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가 강자에게 있지 않음을 안다.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정의라고 할 뿐임을 안다. 그런데 왜 침묵하며 조용히 있는가. 우선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용기가 사라진 이유는 욕망 때문이다. 생존을 넘어 번영을 탐내기 때문이고 좀 더 값싼 비용으로 내 욕망을 채우길 바라기 때문이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이익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나 힌두교의 구도자처럼 욕심을 버리라고, 마음을 비우라고 설파해야 할까. 아마 효과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해도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은 앞이 잘 안 보인다. 지금의 정부는 이전 정부가 체질 개선시킨 신자유주의의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와 민족 번영이라는 논리는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아프간 파병은 더 큰 파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가 오늘에 와서는 복수노조를 허용하고, 불법이다 싶으면 벌금을 부과하는 등 철저하게 경쟁, 경제 논리로 일관하는 발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마도 이 땅의 꼴통 보수 세력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잡았다면 이렇게 ‘세련된’ 신자유주의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차라리 투쟁이 단순 명쾌했다. 독재자들이 단순 무식했기 때문이다.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 지금, 그람시(A. Gramsci, 1891~1937)에게 기대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무솔리니가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스탈린이 ‘죽이지’ 못한 그람시는 철저히 고립되고 외로운 가운데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비관적이지만 낙관적인 의지를 품자.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게 요즘이다. 우리가 품은 꿈이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게 우리가 사는 방식이어야 하며 우리의 욕망이어야 한다. 트라시마코스와 니체의 사상에서 새로운 창조적 힘을 발견해내자. 허무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독단과 독선에 빠져 있는 것이기도 하지 않는가. 철저히 절망하고 허무해지자. 그만큼 우리의 희망도 커지리라. 절망의 크기에 비례하는 희망을 가질 때에만 진정한 정의는 가치와 결합된 힘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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