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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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3 새크흐 쇠르 교회
이병창 2015.08.22 73
유럽 여행 3; 4월 21일 저녁

드디어 첫 여행 목표지, 몽마르트 언덕을 오른다. 왜 이 언덕이 목표지였는지를 말하려면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나폴레옹 3세가 보불 전쟁에서 패하여 프러시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1870.9.1)은 파리의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굴욕감과 배반감으로 범벅이 되어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3공화국을 세워 항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속수무책이었다. 내분이 일어났다. 보수파는 항복을 선언하자, 급진 공화파와 민중파는 항전을 선언했다.


몽마르트 언덕은 올라가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파리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이다. 그 위에는 독일군에 항전하기 위해 프랑스 군이 포대를 설치하여 두었다. 1871년 3월 28일 항복한 프랑스 군이 포대를 해체하려 하자, 파리 국민방위군(의용대)가 봉기하여 몽마르트 언덕의 포대를 장악했다. 군사적 요충지인 이 포대를 장악함으로써 파리는 쉽게 민중이 주도하는 방위군의 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드디어 파리코뮌이 선언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이다.

파리코뮌은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 고립무원으로 싸웠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마침내 5월 말 독일군의 엄호를 받는 보수파 정부가 파리 시내로 밀고 들어왔다. 일주일간 피의 전쟁이 벌어졌다. 파리 민중파의 최후 거점이 이 몽마르트 언덕이다. 결국 압도적인 힘 앞에 몽마르트 언덕 위의 포대가 파괴되었고 파리코뮌은 패배했다.

파리코뮌을 계기로 이 언덕에는 엄청난 피가 흘렀다. 파리코뮌은 이 언덕에서 당시 파리 대주교를 처형했다. 동시에 보수파 정부의 두 명의 장군도 함께 처형했다. 거꾸로 보수파가 이 언덕을 장악하자 최후까지 저항하던 국민방위군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이렇게 피가 흐르던 언덕이 몽마르트 언덕이다.

지금 그 피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언덕 위에 있는 성당 ‘성스러운 심장’이라는 이름의 성당이 역설적으로 그 때의 역사적 사건을 증언하다. 왜 성당에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었는가? 여기에 유래가 있다.

프랑스 군이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자,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는 비판이 일게 되었다. 이런 도덕적 타락은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에서 잘 그려져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파리 대주교는 패배는 이런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신의 처벌이었다고 선언했다.

1872년 10 처형한 파리 대주교의 계승자인 Guibert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이 언덕이 순교가 있었던 곳이며, 여기를 예수의 성스러운 심장이 얹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계시에 따라서 이 몽마르트 언덕에 참회를 위한 성당을 지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파리코뮌을 진압한 이후 1973년 국민의회는 이 언덕에 참회의 성당을 짓는 일을 국가적 사업으로 하는 법을 공표하고 마침내 1876년부터 건설에 들어가서 1919년 일차 세계 대전 이후에 완성했다.

성당의 건설은 프랑스 카톨릭의 사업이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이 성당 건설에 대해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성당은 프랑스 혁명과 그 정신을 계승한 파리코뮌을 도덕적 타락과 학살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당이기 때문이다. 제3공화국에서 처음에 보수파들이 지배했으나 점차 급진 공화파와 민중파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자, 성당은 군주제와 카톨릭을 옹호하는 상징물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 결과 1882년 내각은 성당 건설을 위한 법을 폐기했으나 카톨릭에 의해 성당이 지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당 건설을 반대하는 마지막 시도는 1971년 2월 이루어졌다. 68 혁명 이후 파리 학생들이 이 성당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성당이 코뮌의 시체 위해 세워졌으며, 파리 위에 너무 오랫 동안 펄럭인 피묻은 깃발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면서 나는 언덕을 걸어 올랐다. 꼭대기에 이르자 거대한 약간은 기괴하기 보이는 성당이 나타났다. 둥근 돔으로 지은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다. 보기에도 한마디로 권위적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성당의 현관 위에는 두 조각상이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잔타크 상과 프랑스 왕의 상이다. 이 성당이 어떤 이유로 지어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나는 이 성당의 발 아래 깔려 있는 코뮌 전사들의 시체를 생각하면서 언덕 아래 파리 시내를 굽어보았다. 파리를 굽어 볼 수 있는 전망대가 3개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에펠탑이고 다른 하나는 퐁피두 센터이다. 파리를 굽어보는 가장 좋은 전망대는 물론 몽마르트 언덕이다.

이 언덕에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 언덕에서 서로 약속한 사랑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파리의 많은 연인들이 이 언덕에 올라, 계단에 앉아 파리를 굽어보면서 사랑을 맹세한다 한다. 왜 이런 전설이 생겨났을까? 성당이 도덕적 타락에 대한 참회를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유래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언덕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나와 홍 교수도 한참이나 파리를 내려다 보다, 다시 내려왔다. 몽마르트 언덕에 오르는 긴 계단 길을 거쳐 내려오니, 라일락 향기가 코를 찌른다. 둘러보니 라일락 나무 아래 조그만 카페가 있다. 우리는 맥주를 한 잔씩 시켜놓고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면서 말없이 침묵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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