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불온은 사라지고 화석만 남은 시대
이병창 2014.02.11 228
[이병창 칼럼] 불온이 사라지고 화석만 남은 시대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입력 2014-02-10 17:03:15l수정 2014-02-10 18:32:30기자 SNShttp://www.facebook.com/newsvop1. 중도라는 환상적 정당



얼마 전 그러니까 설날 연휴 즈음이다. 나를 찾아온 젊은 대학생들이 있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전직이 교수라서 그런지 학교를 그만 둔 이후에도 대학생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기쁘다. 이야기하던 도중에 우연히(?) 정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때 대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는 정치적으로 중도라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중도라니? 이처럼 모호한 말이 없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사이에 중도라면 안철수 신당이다. 신당을 지지한다는 말일까? 그런데 새누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통합진보당, 정당들을 이런 순서로 배열하면 중도는 민주당이니,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말일까? 한참을 생각해도 대학생들이 중도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차 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나는 중도라고 했을 때 그 중도라는 말은 사실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중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든 중도에 서면 이쪽저쪽의 단점을 피하고 그 장점만 모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는 뜻이다. 세상에 그런 중도가 있다면 누군들 그걸 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역사적 현실에서 그와 같이 장점만 모아놓은 중도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막연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대학생들인들 모를 리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중도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이든 선택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두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만일 어떤 입장에 선다면 너무나도 무서운 어떤 것이 자기 인생에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게 그들의 입으로 중도라고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들의 선배 형들의 인생이 IMF 로 그리고 금융위기로 예상하지 못했던 타격을 받아 휘청거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 나갈지? 그들은 마치 안개 속에 있거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지대를 배회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은 중도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은 중도라고 했던 것이다. 그건 내가 군에 갈 때 우리 어머니가 당부했던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줄을 설 때는 항상 가운데 서라고 했다.







2. 무리 속의 안전



젊은 지식인들은 지금 이렇게 세상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은 그들 대학생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두려움은 그 선배 세대들에게도 존재했고 지금 대학생들은 그들 선배들로부터 두려움의 유전자를 전달받았다.



그 선배 세대들은 1997년 IMF와 2008년 금융위기로 폭발한 화산재를 직접 뒤집어썼던 세대이다. 그들은 눈물에 섞인 시꺼멓고 뜨거운 화산재를 손으로 훔치면서 갑자기 이 세상을 깨달은 듯했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나의 생존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이전 운동권 세대와 그들 자신을 구분시켰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포스트모던 세대이다.



포스트모던 세대의 특징은 반이념이다. 그들은 이념이라면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이념은 진리와 가치를 토대로 세워진다. 그러나 진리도 없고 가치라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념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오직 생존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그러니 아메리카노를 선택하겠다. 나는 힙합을 좋아한다. 그러니 힙합을 선택하겠다. 현재 대학생들의 정당이 중도라는 환상적 정당이라면,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정당은 유시민의 자유주의 곧 참여민주주의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주장은 이렇다. 모든 것을 합의에 의해 처리하자! 다수가 합의하면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자유주의를 좋아한다. 나 역시 좋아했다. 적어도 유시민의 자유주의가 전도되기 전까지 말이다. 그 전까지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함정이 이런 자유주의에 숨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 함정은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논리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보면 그 함정이 금방 드러난다. 그걸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다수가 원하는 것을 나도 선택해야 한다. 다수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자는 배신자이다.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논리를 이렇게 종북 논리로 전도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들의 배후에 있는 생존의 두려움이 아닐까? 그들은 무리, 다수 속에 끼어들어가야만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무리 속에서 서로 몸을 비비대면서 안전하다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결국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다수, 무리 속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가 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반이념적인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변질되는 이 기막힌 사건을 우리는 지난해 종북몰이에서 여실하게 보았다. 이 종북몰이에서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해하게 된다.



종북몰이란 실상 자기 스스로의 두려움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자기의 두려움이 외부의 적, 섬뜩한 타자이라는 환상을 낳는다. 종북몰이란 두려움이라는 피를 먹고 사는 뱀파이어이다.



3. 사유의 화석화



두려움이라는 불길한 그림자는 이제 이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질식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중지한다. 자유로운 사유만큼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온 나라에 사유가 히스테리처럼 경직되기 시작한다. 히스테리란 무의식적 욕망과 연계된 신체의 부위들을 마비시킴으로서 욕망을 차단하는 기제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혹시나 자유로운 사유가 두려운 생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두뇌 자체를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화석화된 두뇌는 그 돌멩이의 무게에 따라서 시중에 팔려나간다.



그래서 전국의 대학에 서열이 매겨져 있다. 서열을 매기는 방식은 화석화된 사유의 무게에 따른 것이다. 우선 학생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얼마나 잘 외웠는가에 의해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학원에서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시험문제를 외우게 만든다. 교수들은 외국의 이론을 얼마나 잘 베껴왔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본국에 가서 직접 베껴오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세상에 살아가는 기술적인 지식만을 배운다. 살아가기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이란 배울 필요도 가르칠 필요도 없는 지식이다. 심지어 같은 지식이라도 본국의 말(영어)로 된 지식은 한국말로 된 지식보다 무게가 더 나간다.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삼성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대학마다 서열을 매겼는데, 그 순서는 두뇌가 화석화된 순서이다. 그런 식으로 서열을 매겼다고 사람들은 아우성이다. 그들은 왜 아우성치는 것인가? 그 순서가 돌멩이의 무게에 따른 순서라는 비밀이 폭로되는 것 때문이 아닌가? 정말 아우성쳐야 했던 것은 이미 모든 대학이 화석화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유가 화석화된 원흉이 무엇인가? 왜 이 모든 사유의 화석화가 IMF 이후 지난 20년간 소리 소문도 없이 진행되었겠는가? 거기에는 대학교수도, 학생들도 책임이 없다. 오직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에 있다. 내가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청년들의 두려움, 그것이 사유를 화석화시켰다.



4. 사유의 바다



그러므로 이제 두려움을 끊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남종 열사가 두려움은 모두 가져가겠다고 했다.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자.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남들이 불온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보자. 이제 재판도 막바지에 이르러 사건의 실체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 종북몰이에 혈안이 된 조중동조차 포기한 사건, 기소를 유지해야할 검찰도 신이 안 나는 사건이니 그 결과야 어련할까?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동 속에 정작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빠져있다.



이석기 의원이 제기한 문제를 보자. 그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진보주의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이다. 그 결론이야 어떻든 간에 이런 문제제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실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누구도 그런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석기 의원이 그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로소 이 문제가 문제로 되었다. 앞으로 진보주의를 사유하는 누구도 그런 문제제기를 피해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이 새로운 사유의 바다로 나가자. 아래는 내가 좋아하는 니체의 말이다.



“비록 온통 밝지는 않다 하더라도 드디어 수평선은 다시 자유롭게 나타났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우리의 배는 다시 모험을 떠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인식을 사랑하는 자의 모든 무모성이 다시 허용되어 진다. 바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리고 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자유의 바다가 아직까지 없었으리라.”(니체,『즐거운 지식』,권영숙 역, 청하, 그 중 제5부『우리들 두려움 모르는 존재들』,290 쪽)



세상은 끝없이 변화한다. 이런 변화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미리 사유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사유는 유전자 풀(Pool)과 같다. 생물은 새로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미리 보유하고 있던 유전자 풀을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사유도 그렇다.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 그런 사유의 풀이 있기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그런데 사유는 돌연변이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생물의 종의 진화가 돌연변이를 이용해서 일어는 것과 같다. 사유의 진화도 돌연변이를 통해 일어난다. 돌연변이는 겉보기에 흉측하고 심지어 파렴치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돌연변이가 없다면 사유의 진화도 없다. 그러면 사유의 풀이란 것도 없다.



이런 사유의 풀이 없다면 우리는 마치 조선시대 말 선비들이 처했던 처지에 빠질 것이다. 그때 세계는 변화했지만 조선의 선비들을 지배해 왔던 세계관은 이미 파탄에 이르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세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사유의 풀이 없었다. 그 결과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가 조선시대 말과 유사하다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러기에 지금 사유의 모험이 더욱 간절하게 요구되는 시대이다. 이석기의원의 불온한 사유를 백배 넘는 불온한 사유가 필요한 시대이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