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소개했습니다. 결론에서 말했듯이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을 어떻게 마련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겠죠.
선동정치에 반대되는 것이 책임정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책임정치를 위한 결정적인 장치가 바로 정당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중 조직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제이니까 이 점과 연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제가 살고 있는 남양주시 시의회에 제가 출마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저를 모릅니다. 물론 제가 주장하는 것조차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들을 수도 있겠죠. 더구나 제가 아무리 좋은 주장을 펼친들 사람들은 저의 말을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정치가들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믿어달라고 외쳤습니까? 그러니 선뜻 저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보인 셈이죠.
정당정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한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라면 좀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당이라면 다음 번 선거에도 또 나올 것이니 책임을 지고 공약을 추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 모두에서 선동정치를 막고 책임정치를 위해 정당을 헌법적 기구로 규정하여 보호합니다.
하지만 정당인들 제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비가 오면 새순이 돋아나는 것을 우후죽순이라 하죠. 대밭에 가면 그런 말을 실감하실 겁니다. 정말로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수많은 정당들을 보면 정당이라도 믿기 어려운 것은 오십 보 백 보가 아닌가 생각하실 겁니다.
이런 고민 끝에 출현한 것이 대중조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입니다. 흔히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형식이 기본적으로 이렇게 대중조직을 지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이지요.
한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대중단체들이 존재합니다. 이 대중단체들은 대중들 속에서 활동하죠.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대중들은 그들의 대표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속속들이 이해하고 오랜 삶을 통해서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지 아닌지 판단합니다. 거꾸로 이런 대표자들은 대중들 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대중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염원이 무엇인지를 알며 어떻게 하면 이런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가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중과 간부가 하나가 되는 통일체가 형성되죠.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도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이렇게 친밀한 관계 속에서 대표자가 선출되다 보니 이제 민주주의적인 형식적 절차가 껍데기화 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인데, 꼭 내가 투표해야 하겠어? 바쁘기도 하니 자네가 대신하게나. 내 마음 자네가 잘 알지? 현장에 가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신뢰를 악용하여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껍데기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초급단계를 넘어서면 대중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결여되기 시작하니까 상급단체에 이르게 되면 될수록 관료화라는 문제가 노골화됩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 대중조직을 기초로 한 사회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결국 이런 사회민주주의 역시 간부들이 관료화 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저기 중국을 보십시오. 상층에는 온갖 부패와 권모가 판치고 있다하더라도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대중과 일체화된 간부들이 존재합니다. 당의 하부 토대가 이런 간부들로 채워져 있에 중국 사회주의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 국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판단하거나 심지어 당 독재, 일인독재라고 판단하는 것은 사회주의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라 하겠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민주주의적인 형식을 우선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정당 정치조차도 붕괴되는 경우가 많아요. 오늘날 이미지의 정치, 스타의 정치라는 것이 바로 그런 현상을 보여줍니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는 대중조직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실시했습니다. 여기서는 정당조차도 대중조직에 기초하고 그러다 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상층부의 관료화가 쉽게 일어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즉 형식적 민주주의와 대중 조직적 민주주의는 서로 대립하지만 서로 보완되면서 함께 가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 두 가지 서로 대립된 형식들을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 실정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4)
이제 어려운 이론적 논의를 여기서 대충 생략하고 통합진보당의 당내 비례대표 경선의 문제로 바로 들어가 보도록 하죠.
문제는 중복 IP를 통해 몰표가 나왔다는 겁니다. 이는 타인에 의한 대리투표라고 의심되며 그렇다면 이것은 당원의 의사를 왜곡시키는 부정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결국 비례 대표의 선거 전체가 무효라는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IP 중복과 몰표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대리투표를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부 즉 제주의 경우, 대리투표로 의심할만하다고 봅니다. 나머지의 경우는 현장의 투표 여건상 불가피했던 중복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논쟁은 대리투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런 논쟁은 결국 부정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으로 나가게 되며, 서로 진실이 아닌 경우에는 심각한 도덕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혁신파는 구당권파를 부정을 저질러 놓고 사과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구당권파는 부정이 사실이 아닌데 부정을 저질렀다고 비난받으니 억울하다는 것이죠. 이런 도덕적 비난의 끝에 마침내 분당이라는 최악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죠.
진실은 가려져야 하겠죠. 이미 상당히 많은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문제는 대리투표가 아니라 몰표라는 것입니다. 이 몰표라는 현상은 대리투표가 있었든 아니든 간에 어떤 조직적인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직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는 한 민주주의적인 형식은 이미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5)
조직적인 결정이 이루어진 것은 구당권파 역시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신당권파는 이런 조직적인 결정을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조직적인 결정을 했으니까요.
사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조직적인 결정은 통합진보당이 대중조직(그 속에는 정파조직까지 포함해서) 위에 기초하고 있는 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조직적인 결정이 대중과 간부 사이의 일체화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원리로부터 나왔다고 할 때 이 점은 오히려 통합진보당이 가지는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다른 정당들은 이렇게 대중조직에 기초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정당이 책임정치의 기능을 잃고 인물에 따라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되고 선거철마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런 조직적인 결정이 심화되면 많은 문제점도 나타납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당은 대중조직들 위에 서 있었습니다. 당의 역사를 볼 때 이런 조직적인 결정이 항상 우선하였고 민주적인 절차란 이런 조직적인 결정을 추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직적 결정이 당내 패권 블록의 성장을 도왔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강화되었던 것이 당내 민주적인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몰표가 나왔다는 것을 본다면 아직까지도 민주주의적인 형식이 독립적인 힘을 가지면서 당내 대중조직에 의한 조직적 결정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표가 문제라고 저는 말했던 것입니다.
몰표라는 현상이 나타나면 주변에서는 오해를 갖기 마련입니다. 당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현상을 쉽게 이해하지만 당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에 민주적 선거를 했는데 몰표가 나왔다면 거기에 대리투표와 같은 부정이 개입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 하겠습니다.
6)
결국 통합진보당의 경우 아직까지도 당내 민주주의와 조직적 결정 사이에 적절한 황금분할의 비율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조직적 결정에 따른 몰표가 나왔고, 그런 점에서 일단 비례대표에 부정이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 단추를 잘못 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즉 문제를 몰표라는 현상이 아니라 중복 IP, 대리투표, 도덕적 부정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도덕적인 논쟁으로 몰고가면 서로 상대방을 매도하고 결국은 서로 치명적인 공격을 노리게 됩니다.
만일 문제를 몰표라는 현상으로 파악하고 이를 당내 조직적인 결정이 지니는 문제점으로 이해한다면 해결책도 달라졌을 겁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민주적 형식과 조직적 결정은 대립적이지만 서로 보완적이고 이 적절한 배합은 구체적 상황을 통해서 찾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몰표와 조직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문제삼는다면, 이번 투표의 결과가 당내 당원들의 마음을 정말로 적합하게 대변하는 결과를 얻었는지 아닌지 검토해보고 그런 더 적절한 배합비율, 소위 황금분할의 비율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문제를 대리투표, 부정으로 몰고 가고 몰표와 조직적 결정의 문제를 간과하면서, 어떻게 본다면 당이 발전하기 위한 긍정적인 갈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당을 파괴하는 갈등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고 하겠습니다.
7)
그렇게 도덕적 대립으로 나갔던 결과 최종적인 해결은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기 위하여 즉 거꾸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인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비례대표 후보의 전원 사퇴라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이런 강수의 결과 초점은 당내 비례대표 2,3번이 사퇴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비례대표의 전원 사퇴라는 강수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죠.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이라는 제도 자체가 사실은 당이 대중조직의 기초 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당내 민주주의 절차를 활성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경선의 제도는 당원인 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경선이 아니고 누구는 경선이며 경선에는 순번이 있고 이런 순번은 때로 뒤바뀌기도 하고 등등.
비례대표 전원 사퇴라는 강수는 이런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당내 조직적인 결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결국 당이 대중조직의 기초 위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은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의해서만 지배되어야 하고 모든 당내 대중조직의 토대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혁신이라는 의미입니다. 혁신이란 당의 대중적 기초를 거부하고 당의 민주적 절차를 강화하라는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가 바로 비례대표 전원사퇴라는 강수의 진정한 의미이고, 지금도 여전히 주장되는 2,3번 사퇴라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긴 요구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비례 대표가 전원 사퇴하고, 그 결과 당내 대중조직의 활동이 해소되고, 그 결과 당이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의존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당은 이제 민주적 절차에 의존하겠지만 이제부터는 당은 한국의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인물에 의해 지배되고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당이 될 것입니다.
사실 당내 혁신파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당은 당내 명망가 소위 유,심,조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배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조직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당은 결코 완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당은 민주주의 절차와 조직적 결정 사이에서 여전히 표류하고 있고 그 적절한 황금분할의 비율을 발견하는 노력은 부단하게 노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역사적 구성이나 의미에서 본다면 그 어느 편도 즉 민주주의도 당내 조직적인 결정도 100% 당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당을 깨고 분당하려는 세력은 서로 모순적인 말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당내 민주주의 절차를 주장합니다. 그러면 당의 대중적인 조직이라는 토대를 해소해야 하겠죠. 당이 대중조직을 해소하지 못한다고 이제 분당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한편 노동중심성을 말합니다. 노동중심성이란 한마디로 당이 민주노총이나 농민회 등 대중적인 조직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당연히 여기에 정파조직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러면 통합진보당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위험한 것은 이렇게 말 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문제를 인정하고 적절한 배합비율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면 굳이 분당이라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당내에서 싸우세요. 도덕적인 투쟁이 아니라 제도적인 투쟁을 하도록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