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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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3 민주주의여 만세1
이병창 2012.08.20 448
민주주의여 만세(1)



1)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면 난다고 합니다. 이제 통합진보당 문제는 분당 국면에 들어가면서 어느덧 황혼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단순한 응급적인 조치가 아니라 철저한 성찰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목적도 이런 비판적 성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는 의도입니다.



통합 진보당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은 당내 민주주의의 문제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례대표 경선에서 일어난 부정이라는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적인 형식적 절차를 왜곡하였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형식에 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저는 대학 학번이 72학번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자 말자 광주(경기도) 폭동과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맞아 한껏 부풀었던 청년의 낭만은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저의 청년기는 어둡고 칙칙한 절망의 구름으로 덮였었지요.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되기를 원했던 청년은 시대의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술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저는 이런 시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때 김지하 선생이 지었던 시는 절망을 이기게 하는 힘을 주었죠. 그 시는 노래가 되어 지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노래의 후렴이 바로 “민주주의여 만세” 였지요.



박정희 독재 정권,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 저의 유일한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저한테 성스러운 것이고 절대적인 명령이었지요. 그런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더욱 완성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2)

제가 이해하는 한 민주주의란 일단 하나의 형식입니다. 민주주의는 잘 운용하면 민중의 요구와 시대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탁월한 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파시즘과 같은 선동 정치에 넘어가게 됩니다. 파시즘은 다른 어떤 정치적 형식보다도 민주주의 형식에 가장 잘 기생하며 또한 그것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약이 되지요.



그러기에 일찍이 그리스 민주주의 시대 소크라테스가 비판에 나섰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너무 깊게 들어가면 너무 우회하는 것이니 이 정도에서 빠져 나오려 합니다.



최근에도 민주주의적 형식에 대한 비판은 그치지 않습니다. 샌델 교수를 아시지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최근 100만부 이상의 책이 팔려 저자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샌델의 주장이 정말 무엇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샌델은 공동체주의자의 선구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주의를 주창합니다. 그 입장은 어떤 사회에는 그 공동체가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가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공동체주의나 공화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결정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란 이런 기본적 가치를 토대로 하고 그 위에서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형식이라고 하죠.



샌델의 입장은 한 사회의 기본적 가치 즉 정의의 원리조차도 합리적인 선택 즉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 롤스와 같은 민주주의자를 비판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소크라테스든, 샌델이든 그 비판의 핵심은 민주주의가 선동정치에 취약하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점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형식 자체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고 같은 것이 아니냐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폐지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민주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되 그것을 보완하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야 하겠죠.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일찍부터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을 손꼽아 보라 하면 물론 언론이죠.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숙고를 가능하게 하는 공정한 언론이 있다면 선동정치의 폐해를 차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언론은 나름대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상업적인 자본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언론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는 일단 제쳐 놓으려 합니다. 이번 통합 진보당 사건을 보면 심지어 진보 언론이라는 것조차 때로는 공정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만, 다른 기회에 말하기로 하죠.



벌써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책임정치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다음에 이야기해야 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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