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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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을 읽다가 영화 로나의 침묵에 취해서
이병창 2013.01.30 428
로나의 침묵과 실존적 구원



1.자기의식적인 카메라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국내에 이미 여러 편이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필자가 극장을 찾아가 본 것만 해도 두 편이 된다. ‘아들’이라는 영화와 ‘아이들’이라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다루지만 그 속에서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묻고 있다. 여기서 구원은 물론 종교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구원은 부조리한 삶 속에서 실존적인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실존적 구원의 문제이다.



‘로나의 침묵’은 2008년 개봉되었으나 그동안 필자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얼마 전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다가 이 영화를 발견했다. 다행히 이 영화의 파일을 구해서 볼 수 있었다. 이 영화 역시 ‘아들’이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실존적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나의 침묵에서도 그렇지만 다르덴 형제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찍는다. 그 때문에 화면은 조금씩 흔들리는데 때로는 그 흔들림이 너무 심해서 비위가 상한 관객은 심지어 구토를 느끼기도 한다.



더구나 카메라는 항상 주인공의 어깨나 등 주위를 맴돈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 뒷덜미를 바짝 쫓아가기도 한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거친 숨소리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주인공이 귀찮은 듯 손을 저어 쫓아내면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는 다시 바짝 주인공을 따라간다. 꼭 그 모습이 파리나 벌이 얼굴 주위를 맴도는 것과 같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를 그저 단순히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주려는 것으로만 해석할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카메라는 인간에게서 의식을 집요하게 주시하는 자기의식의 움직임과 유사하므로 이는 자기의식적 카메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다르덴 형제는 이런 자기의식적인 카메라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의 영화가 실존적 구원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 한다면, 그런 구원은 자기를 주시하는 자기의식의 힘에 토대를 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영화 ‘로나의 침묵’을 통해서 이런 의문의 답을 찾아보자.



2. 부조리한 현실과 실존적 결단

로나는 알바니아에서 벨기에로 온 불법 이주민이다. 지금은 세탁소에서 다리미질을 한다. 그녀의 애인 소콜은 독일이나 이태리에서 일하는 떠돌이 노동자이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가끔씩 서로 연락해 만난다. 파비오는 두 사람과 고향이 같지만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마약을 판매하거나 불법이주민에게 시민권을 얻게 해주는 일을 하는 동네깡패 수준의 조직을 꾸리고 있다. 세 사람은 작은 음모를 꾸몄다. 로나가 벨기에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우선 시민권을 지닌 벨기에 남자와 결혼한다. 그런 남자로 마약에 빠진 청년 클로디가 선택되었다. 그는 마약 때문에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가 죽은 다음 로나는 러시아 불법 이주민과 다시 결혼하면서 만 오천 유로를 받을 예정이다. 로나는 이렇게 하여 얻은 돈과 은행대출과 소콜과 함께 지금까지 벌은 돈을 모아서 벨기에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열 예정이다.



영화는 이런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로나가 벨기에 시민권을 얻고 은행대출을 위해 은행에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약간 불법적인 요소를 포함하지만 그렇다고 범죄적인 음모는 아닌(벨기에서 마약은 합법적이다) 이런 작은 음모는 결국 파국에 이른다. 파국에 이르는 과정에는 부조리한 현실이 개입한다. 로나는 클로디가 마약으로 죽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그녀는 클로디가 마약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대신 그녀는 벽에 스스로 이마를 부딛혀 찢어지게 만들고 이를 통해 법원으로부터 이혼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클로디가 마약을 끊는 것은 로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법원에서 쉽게 허용된 이혼은 오히려 클로디를 절망에 빠뜨린다. 로나는 옷을 벗고 클로디를 껴않아 클로디의 절망을 위로하려 하지만 이미 소용이 없다. 이혼을 허락하는 편지를 받고 로나는 자신이 클로디가 마약으로 죽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 것에 대해 기뻐하지만 바로 그 소식 때문에 클로디는 끊었던 마약을 다시 하게 되면서 과잉복용으로 죽는다.



현실의 부조리는 다시 이어진다. 클로디가 죽은 이후 로나는 클로디의 아이를 임신하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녀는 병원에 찾아가 유산시키려 하였으나 마지막 순간 아이를 기르려 결심하고 초음파 검진을 거부한다. 만일 검진을 했다면 그녀는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신이라고 믿은 로나는 이 때문에 결혼 예정인 러시아인에게 임신을 허용받으려 하지만 결국 러시아인과의 결혼 계획을 망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이 때문에 파비오로부터 위험하다고 판정되면서 고향인 알바니아로 돌려 보내진다. 고양으로 돌아가던 중 로나는 자신이 살해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고 탈출하여 숲 속의 오두막집으로 숨는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나는 숲 속 오두막집에 불을 피워놓고 내일의 희망을 뱃속에 든 아이에게 속삭이면서 잠들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 속의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보면 다르덴 감독의 현실인식이 무척이나 실존적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은 현실의 우연이 아니라 바로 로나 자신이다. 로나는 이미 마약중독으로 죽기 직전에 이른 클로디에 대해 처음 냉담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여 다시 살아보려는 클로디의 애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로나가 클로디를 사랑한 것은 아니며,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동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나는 타자가 부르는 간청에 응답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부조리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이런 로나의 결단은 클로디의 아이를 기르기로 선택하는 데로 이어진다. 아이를 선택한 것은 아마 로나의 죄의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결단을 내렸을 때 그것은 이미 로마의 죄의식을 넘어선 결단이었다. 그러기에 그 결단은 실제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바뀌어지지 않는다. 로나는 이제 마치 환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아이를 지키려 한다. 그 결과 그녀의 모든 계획은 철저하게 파멸에 이르지만 그녀의 결단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우리 관객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로나가 숲속 오두막에서 뱃속에 든 자기 아이를 위해 불을 피울 때, 그녀의 환상은 우리에게 거의 엄숙한 실존적 결단으로 다가온다. 환상이 그처럼 엄숙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3. 까뮈의 실존적 구원

현실은 부조리하다. 그 속에 부조리한 운명을 막기 위해 우리가 내린 결단이 오히려 우리의 등을 치면서 부조리한 운명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마치 외디푸스의 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외디푸스를 버렸으나 결국 그것이 오히려 원인이 되어 외디푸스에게 죽게 되는 운명과 마찬가지이다.



이 숙명적인 부조리 속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삶 속에 어떤 결단을 내리고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실존철학자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까뮈가 바로 이런 실존적 구원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시지포스의 신화를 인용하면서 영원히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이미 알면서도 다시금 무거운 돌멩이를 산 위로 밀고 올라갈 때의 시지포스의 고독에 대해 논한다. 그 고독은 바로 이런 결단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냐 하는 데서 나오는 고독이다.



무의미한 결단은 사르트르의 소설에도 나온다. 그의 소설 󰡔벽󰡕은 게쉬타포에 의해 고문당하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서 레지스탕스는 자기 나름으로는 영웅적으로 고문을 이기면서 레지스탕스의 비밀을 지킨다. 그러나 이미 그 비밀은 다른 통로로 게쉬타포에 의해 알려진 것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무의미한 결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카뮈의 책을 읽은 지 오래라서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는 잊어버렸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차라리 나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시지포스가 그리고 레지스탕스가 스스로 자유로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 비한다면 그것을 통해 돌아오는 부조리한 결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그런 결단을 내림으로써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 신적인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증언한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로나가 내린 결단은 무의미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로나가 그런 결단을 내림으로써 이 세상에 신적인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세상은 마침내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과도한 결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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