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문학의 아토포스 더 비기닝(최종덕씀)
1.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기 전
저 머나먼 은하의 한 별에서 외계인을 만났는데, 그가 물론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사람 같은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발화행위로 통하지 않는 두 존재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이뤄질까? 결론삼아 말하자면 그 답으로서 공존 아니면 경쟁의 관계가 형성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i)가장 자연스럽고 (ii)가장 그럴듯하며 (iii)공존과 경쟁 범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뜻에서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거주자와 외부인이 공존한다고 가정해보자. 공존의 경우도 여러 가지로 가능할 수 있다. (i)두 존재가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ii)서로의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아예 싸움이 되지 않고 힘쎈 자가 약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경우이다. 공존의 첫째 경우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다면 그 생명종은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현재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하여 모종의 노력이 있어 왔다는 점이며 모종의 노력이란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과 같은 후손을 복제해 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존의 첫째 경우는 논리적으로만 가능하고 자연적이지 않으며 실제로 실재할 수 없다. 공존의 둘째 경우는 현실적이며 증거도 충분하다. 드발의 관찰보고에 따르면 히말랴원숭이의 경우 그들의 엄격한 서열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새끼는 우두머리에게 감히 엉길 수 있는데, 힘의 차이가 현격한 일년 미만의 어린 새끼에게만 관용을 베푼다. 그러나 새끼가 더 커지면 대장의 용서란 얄짤없다.(드발 2014, 244) 침팬지의 경우는 4살까지 봐주고, 인간의 경우는 더 오래간다. 1949년 중국은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 정책을 표방하면서 소수민족을 흡수하는데, 중국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은 사람수 비율로 약 8.5%이지만(2010년) 전인대 대표자수의 비율은 14%를 차지한다.(제11기 전인대 2,987명 중) 중국은 소수민족과 힘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공존하지만 티벳이나 최근의 위구르처럼 중앙세력에 도전하는 힘이 드러나면 가혹할 정도의 폭력성 강제 공존정책을 시행한다. 다 할 만한 상대에 대해서만, 공존하고 소통해준다는 것이다.(진, 10장)
두 존재유형이 경쟁하는 경우는 거주자가 외부인을 쫒아 내거나 지배하는 경우 혹은 침입자로서 외부인이 거주자를 몰아내어 그들을 거꾸로 지배하는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자세히 말할 필요도 없다. 다 아는 것이라서. 그런데 이 경우라도 상황을 이해하는 주변조건이 있다. 외부인이 거주자보다 힘이 월등하게 크더라도 새로운 거주지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면 외부인은 적응에 실패할 것이다. 혹은 그 거꾸로 외부인에게만 맞는 면역학적 조건들을 새로운 거주지에 심어 놓으면 기존 거주자가 소멸하는 경우도 생긴다. 총균쇠에서 보듯 1532년 스페인 피사로의 군인 168명이 1,000만 명 인구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사건의 원인 가운데 큰 것은 유럽엔 있었지만 아메리카 땅에는 없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였다.
외계에서 지구로 돌아와 지구 시간 4만 년 전으로 되돌아가보자. 외계인와 지구인이 조우하던 그런 기분 그대로, 우리 조상과 가장 가까웠던 근연종으로서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와 이 유럽 땅에서 4만년 전 쯤에(여러 가설 중의 가장 강력한 하나) 처음으로 조우했다. 당시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에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보다 키도 크고 뇌용량도 더 컸다. 그러나 외부인이었던 사피언스가 살아남고 추위에 이미 적응된 기존 거주자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했다. 멸종이유에 대한 수많은 가설들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i)그들 사이에서 공존과 경쟁이 같이 있었다는 점이며, (ii)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사피언스 모두 구석기문화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둘 다 벽화를 그렸고, 백조의 뼈에 구멍을 내어서 피리로 불었다.(미슨, 15장)
그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자. 네안데르탈인과 다르게 호모사피언스는 ‘먹는 입’보다 ‘말하는 입’(진, 302)이 더 발달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절되었다는 해석이 많다. 우리는 먹어야 살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도 그랬다. 그러나 먹는 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로지 경쟁만이 있고 공존은 불가능하다. 공존은 먹고사는 조건이 평등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차이가 크다는 것을 내가 인식해야 하고 또한 상대방도 알아차려야 한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아는 그런 것은 언어행위로 가능하며 언어행위는 ‘말하는 입’을 필요로 한다. 상호인식이 공존가능성의 원형이다. 공존은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진은영도 먹는 입이 아니라 말하는 입이 소통의 조건이라고 했다.(진, 10장)
그들은 동굴벽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 조상은 그들의 사냥감과 사냥방식을 그림으로 그려서 그들의 후손에게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가 현존한다. 그들이 우리이다. 그들은 공간적 소통보다 시간적 소통을 더 필요로 했다. 3만 년에서 1만 년 사이의 벽화들이 모여 있는 라스코 동굴벽화에는 들소와 사슴과 멧돼지, 염소가 등장한다. 그런 동물들은 그들의 입을 채워 줄 객체이다. 그런데 먹는 입의 주체 즉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라스코 벽화 700점 가운데 아래 벽화에서 유일하게 먹는 입의 주체,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나 만 년 전 근처로 오면 사람의 모습이 다른 동굴에서 벽화로 자주 등장한다. 먹는 입을 가진 사람들은 벽에 손을 음화(스텐실) 방식으로 그렸다. 이때부터 이미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으로 전화된 조상의 소통노력을 엿볼 수 있다.
(라스코, 1만8천 년 전 추정) (라스코, 2만7천 년 전 추정)
먹는 입은 들소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로서 들소를 그리고자 했으나, 말하는 입은 들소에 의미를 입혀서 상징적으로 그리려 했다. 대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미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해 추정되지만, 어쨌든 그런 행위는 예술의 시작이었다. 3만 년 전 조상은 그들의 개선된 사냥법을 위해 들소의 움직임과 계절에 따른 무리 이동 등을 세밀히 관찰했으며, 그 관찰결과를 ‘기록’하기 벽화를 남겼다. 들소의 관찰결과가 벽화를 그리는 목적이다. 동굴의 어둠 끝 차가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는 동굴 속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돌가루를 준비해서 물에 개놓아야 하고 동물기름을 모아 횃불을 밝혀야 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차가운 돌벽에 그림이 그려지면서 벽은 따듯해지고, 가족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들의 벽화는 당장의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 정치행위였다. 벽화는 사냥감을 기록하는 매체였으며 동시에 서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공유하게 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공유의 고대인의 행위가 곧 예술의 원형이며 예술의 시작이었다. 이런 긴 이야길 하는 이유는 문학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모든 예술은 현실의 삶을 투사하고 삶에 조건인 자연을 투영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나는 이를 예술의 아토포스의 시원이라고 본다.
2.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소빙하가 녹으면서 추위가 좀 풀렸고, 우리 조상들은 동굴에서 평야로 숲으로 서서히 나왔다. 들밀(밀)과 피(벼)의 알곡을 남겼다가 그 다음 해 땅에 뿌려 더 많은 알곡을 생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수렵행위도 줄일 수 있었다. 더 좋은 것은 이리저리 이동하지 않고 가족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된 점이다. 그래서 씨족사회가 형성되었다. 그게 신석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대충 8천 년 전 일이다. 이후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졌고 더 큰 부족이 형성되면서 부족집단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 간 배반과 협동이 드러나면서 권력이 더욱 강하되었다. 이때부터 권력과 정치가 동의어로 되었다. 벽화를 그리던 3만 년 전 조상들의 감정공유의 정치 대신에 권력의 정치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이후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기록은 정치인들의 비밀스런 권력으로 되었다. 소수의 권력집단 외에 기록을 소유한 자는 즉시 처벌되었고, 들소가 가는 길, 산속의 호수, 사막건너 오아시스, 검은 숲속의 통로를 그린 지도나 이야기는 신비화되었고, 뭇사람들이 넘볼 수 없도록 기록의 비전은 권력의 가장 강력한 배후로 되었다. 그 사이에 철학과 과학이 등장했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에 이어지면서 신화는 이성으로 변신되거나 교회의 도그마로 위장되었다. 이성은 보편적 사유에서 시작되었고 소 열 마리와 염소 스무 마리를 가진 부족이 10+20=30 이라는 보편적 수학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이것조차도 여전히 비밀스런 기록으로 여겨졌다.
지구의 분노인 화산의 마그마와 지진, 일식과 월식으로 드러난 해와 달의 운행, 인간에 대한 보복으로 생긴 홍수와 가뭄 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이 권력자에 의해 시로 쓰여졌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시와 그림은 이제 들소와 주변의 사람들, 강의 흐름과 강에 비춰진 달의 감정을 공유하는 정치적 행위를 벗어나서 시와 그림 스스로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예술에 주체를 빼앗겼다. 나로부터 주체를 빼앗아간 예술은 저 혼자 감정을 향유하고 저 혼자 호흡한다. 창window조차 없어서 저 혼자만의 모나드를 자위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예술을 자율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런 예술은 세상을 기록하지 않으며 빼앗아간 주체 자체를 현현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그런 현현성은 권력의 수단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자율성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자율성의 예술과 참여성의 예술은 서로 대화불가능한 배중율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진은영은 자율성을 폭넓게 조율한다.
3. 감성적 자율성
진은영은 예술의 자율성을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적 자율성이란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서 예술이 제 스스로의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기계적 인과법칙 속에서 실현된 일들에 또 다른 원인을 부과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계적 인과사태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한다”(261)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했다. 꼬이고 꼬이는 사태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지만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자율성인지, 아니면 진짜 자율성이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 못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진은영은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호젓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기성의 배치를 위반하는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262) 그리고 이 책의 1장에서 말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이 무엇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와 진은영이 262쪽에서 말한 자율성이란 자율성 2.0 버전으로 참여성과 결합한 자율성, 이분법에서 탈피한 자율성을 말한다. 진은영이 강조하고 중시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의 의미를 그의 책에서 따와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성적 자율성이란 (i)현실에서 분리된 언어의 자기목적주의autotelism의 신성화를 거부하며, (ii)예술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거부하고, (iii) 황금새장을 탈출하여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특이성을 추구하며(감성적 자율성의 특징), (iv)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이지만 (v)그렇다고해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현실정치 참여에 제한될 필요가 없으며, (vi)그런 활동의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는 그런 감성분배의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라고 진은영은 확실히 말한다.
진은영은 문학이 삶과 결합된 정치적이라고 해서 현실에서 문제된 사태에 대해 명확한 내러티브나 선명한 메시지의 직접적 표현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30-35)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은 자칫 선전구호로 되거나 윤리적으로 되고 이는 또 다른 관습적 규칙에 헌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정치의 윤리화를 비판한 글을 진은영의 책에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이나 정치의 활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윤리는 체류의 행위이며, 이미 가정된 관습적 규칙에 복종하고 안주하는 행동원리이다.(101)
한편 진은영은 한국에서 문학의 정치적 논쟁점을 아주 쉽게 정리해 주었다. 하나는 참여의 문학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의 문학이라고 했다. 참여성은 “정치적으로 엄중한 시기임을 강조하여 민족. 민중 문학적 이슈들을 특정한 스타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자율성은 “시인과 시민의 입장을 구분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자유공간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비정치적이고 자율적 형식실험에 몰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267)
4.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은 폐쇄적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의 태도는 “자율적인 그날이 오기까지” 한번 기다려 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유토피아의 허구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상실한 것을 오지 않을 미래에서 찾아가라는 주문과 같다. 신과 내세의 유토피아도 그렇지만 박정희의 잘살아보자는 오염된 치안과 안보의 논리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그 치안과 안보는 우리 한국사회에서 영원히 작동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 쫌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일해보자“는 의 허구는 유토피아 사유구조의 허구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70년대 평화시장 봉재 노동자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한편 독재권력과 그들과 같이 춤췄던 봉재공장 사장님들은 그런 말을 열심히 외쳐댔다. 밝은 미래가 정말 오면 그들의 이윤이 절감되고 그들의 집권이 끝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의 고막을 터트려까지 소리를 질러댔고, 지금은 그 소리의 날카로운 주파수를 더 높여 서해안 해일을 일으킬 정도로 되어 배타고 가는 젊은 학생들의 심장까지 찢어가면서 소릴 질러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그런 밝은 진짜 미래가 오지 않도록 영악한 조치를 해놓고 있다.
유토피아 조작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조작의 권력집단은 유토피아의 현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유토피아의 이상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신은 전지전능하여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신을 믿는 대중들은 지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고 오로지 믿음만을 갖도록 강요될 뿐이다. 권력자는 그들만의 기록을 갖지만, 대중들에게는 기록 대신 믿음의 환상만을 제공한다. 랑시에르도 감정의 분할, 감각의 분배를 믿음에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누구 좋으라는 믿음인가? 이렇게 유토피아는 종교와 만나 사람들의 감각을 더 마비시켜 놓았다. 감각의 분배는 너의 감각, 나의 감각을 먼저 유연하게 연습해 놔야 한다. 현실에 순응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마비와 경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은영은 이 시대 너머 미래를 준비하는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권유한다. 진은영이 이 책 결론에서 말한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나는 이렇게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한다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진은영이 이야기해 줄 것이다.
5. 감각분배의 정치
세상과의 구체적인 접촉이었던 주술과 샤마니즘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되었고, 추상적 신의 존재가 구체적 현실을 지배했다. 나는 신석기 시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은영의 말대로 부족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조에zoe에서 비오스bios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상적 관념론과 종교적 도그마가 결합하면서 비오스는 오히려 그들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래서 겉은 비오스이지만 내용으로는 조에로 퇴락했다. 그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 정치를 진은영은 ‘치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들만의 경영’their own managenment라고 하고 싶다. 치안과 그들만의 경영 상태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 사이의 사적 이해와 편견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조에가 아닌 비오스 영역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진은영은 말한다.(275) ‘먹는 입’의 조에는 생명이 시작하던 10억 년 전의 원핵세포에서나 다세포생명을 거쳐 척추동물로 넘어서 늑대와 국화를 거쳐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조에의 작동은 초시간적이다.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이 추가되면서 우리는 역사의 변화와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비오스로의 혁명이다. 이런 지평선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진은영은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275) 물론 진은영은 이런 정치적 비오스가 경제적 조에로, 권력독점의 조에로, 사적이익의 조에로 위장되고 포장되는 현실의 아픔을 지적했다. 그래서 진은영은 치안의 정치에서 벗어나 감각분배의 정치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진은영의 감각분배의 정치는 마치 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같은 무선통신과 비슷해 보인다.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혹은 위성통신은 정보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문학도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감각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재권력이나 경찰치안은 사람을 잡아두거나 말로 위협하거나 더 먼 땅으로 못 가게 경계를 긋는다. 그러나 문학은 그런 경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 그래서 권력집단도 예술을 무서워했다. 감각은 감정의 열기emotions fever를 지닌다. 권력집단 특히 독재권력은 감각온도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 예술은 감정의 열기까지 무선통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무선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곳이 있듯이, 수많은 다른 언어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문자의 예술이나 그렇지 음악이나 미술은 그런 한계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인류학자 회벨E. A. Hoebel이 동그린랜드 에스키모 부족에서 1908년 채집하고 기록한 노래를 인용하려 한다. 한 부족에서 두 남자가 한 여인을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몸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그들의 싸움을 대신한다. 그 부족에서는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갈등관계를 노래로 처리한다고 한다.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라는 한 남자가 그의 부인을 학대하고 나중에는 그 부인을 버렸다. A라는 남자는 그 나이 든 여인을 데리고 와서 다시 결혼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같이 살았다. 그러나 B라는 남자가 시기심에 A에게 그 여자를 다시 내놓으라고 싸움을 걸었다. 노래로 말이다. 부족장이나 그들의 법률에 갈등해소 혹은 치안을 맡기지 않고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감각분배의 사례인 것 같아서 그 노래 가사를 재인용해 보았다.
남자 B는 자기 옛 부인과 새로 결혼한 남자 A에게 노래했다.
(계속 노래하면서) 이에 남자 A가 응대하여 노래를 부르니
자, 이제 말의 창을 던지노라,
작고 날카로운 나의 말
도끼로 쪼갠 장작처럼 날카로운 나의 말.
옛날부터 내려온 노래, 조상들이 호흡했던 노래,
내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
무례하고 멍청한 바보가 내 아내를 훔쳐갔다네
내 아내를 욕보이고 무시한다네
인간의 살을 탐하는 더러운 악마라네
아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구나
너무 뻔뻔스러워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그것도 노래라고 하느냐
어떻게 나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느냐
내 가슴에 두려움을 박아 넣고 싶겠지?
그러나 나는 죽음도 무섭지 않다.
그래, 당신은 한때 당신의 하녀나 다름없던 내 아내를 노래하는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 여자는 너무나 외로웠거든
당신은 대결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 여자를 칭송하지도 않는구나
이제 그 여자는 나의 아내다.
다시는 잘못된 남자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여자를 배반한 남자가 어디 와서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6. 진은영의 소통의 시학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소개하면서 랑시에르를 넘어서 있다. 진은영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소통의 인문학에서 “정치적 주체화”를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였다. 소통의 인문학을 잘 건축하기 위해 “소통의 과학”과 “소통의 시학”을 구분하는 진은영의 방식을 따른다면(298)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에 속하지만 나는 <소통의 과학> 부류에 속한다. 내가 왜 소통의 과학이라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나도 할 말이 조금 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말이다. 이 모임은 진은영의 공간이므로 그가 말하는 <소통의 시학>의 결론을 말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에서 “철학자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말하면서 거짓말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297) 나는 이런 그의 말을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야만 멀리 그리고 오래 감각을 분배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신비화를 경계하고,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을 차갑게 진단하는 사회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갖는 “소통의 과학”에서 더 나아가 진은영은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그려내고, “불가능한 동일시를 통한 정치적 주체화”를 말이 조금 어렵지만 우리는 철학자의 서재 시간에 진은영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드발 2014. 착한 인류, 오준호 옮김, 미지북스
S. 미슨 2008.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 이파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