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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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진보와 교양인
이병창 2019.10.21 48
교양인과 입진보

요즈음 지성인을 비난하는 말이 많다. 대표적인 말이 입진보라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의 뜻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하겠다.

요즈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시 읽고 있는데, 유사한 표현이 나와 탄복을 금하지 못하겠다. 그 시대에 이미 그런 입진보가 있었다는 말이니, 흥미롭다. 하기야 헤겔이 이 책을 썼던 시대(1807년)에는 나폴레옹의 영향 아래 독일 남서부 지역[라인강 서역] 민주화와 자본화가 전진하고 있었을 때니 당연할 것 같다.

이를 토대로 진보적 지식인이 출현했지만 사회 전반은 여전히 봉건적이었다. 민주화와 자본화를 추진할 부르주아와 노동자 세력이 없었다. 실천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지식인이 입진보화되었던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5장 ‘정신’ 장 B절 ‘자기소외의 정신’ 절에서 근대정신을 서술한다. 여기서 먼저 그는 바로크 시대 처음 등장한 교양인의 개념을 설명한다. 교양인이란 개념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성인이라는 말이 되겠다.

헤겔은 이런 교양인을 세계의 이면을 알고 자기 자신의 이면조차 알고 있는 존재라 한다. 그는 이런 인식을 세계에 대한 다양하고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그는 때로 모험을 하기도 하고 때로 긴 여행을 통해, 어느 곳에 이르면 때로는 여성을 유혹하며 때로는 권력자에 아부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허사가 되고, 그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유랑한다. 한마디로 그는 세상을 전전하면서 이 세상의 온갖 이면을 꿰뚫고 있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문학화되는 것을 본다. 그때 많은 젊은 기사들이 세상의 부나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곳곳을 떠돌았다. 대개 그들은 용병이 되어 전쟁에서 공을 얻어 권력과 부를 얻으려 했다. 바로크 시대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인 돈키호테가 바로 그런 유랑하는 기사의 모습을 풍자한 것이다.

결국 세상을 전전하면서 그들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세계도 공허하며 자신도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에 대한 냉소와 자기에 대한 자조로 가득하다. 그 웃음은 마치 영화 조커에서 조커가 터뜨리는 웃음과 닮았다. 이런 모습은 자주 이런 사람을 초연하고 허탈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그러고 보니 자주 이런 존재는 문학에서 광대라는 모습으로 상징된다. 광대는 바보스럽지만 세상의 바보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현자이다. 광대는 그 스스로 비웃음 당하는 존재이지만 또한 그는 세상을 냉소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는 웃으면서도 동시에 슬퍼하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이나 산속으로 은거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운명이 그럴 바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또 한 번의 신나는 모험과 쓰라린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모험과 여행을 하는 동안은 진지하다. 그들은 이 세상 남들과 마찬가지로 한 알의 곡식과 한 치의 땅을 뺏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존재, 초연함와 진지함이 뒤섞이고 교체되는 이런 존재가 곧 교양인이니 요새 말로 하면 입진보인 것이다. 입으로는 세상의 진리를 터득한 것 같지만 몸으로는 한 치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존재이다.

헤겔은 이런 존재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세상을 평가할 줄은 알지만 세상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입진보의 특징이 무엇이든 평가한다는 데 있다. 그는 진리를 안다. 세상의 이면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진보 자신은 그것을 넘어설 어떤 대안과 힘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것을 교양인은 파악할 줄 모른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입진보라는 말은 비판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나는 약간 긍정적이다. 입진보는 적어도 세상의 이면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 역시 공허한 입진보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요즈음 입을 열기 싫지만 그래도 세상의 이면을 알리는 어릿광대의 짓을 멈출 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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