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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5)-신앙과 순수 통찰, 몰리에르의 희극과 라신느의 비극
이병창 2019.11.11 31
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5)-신앙과 순수 통찰, 몰리에르의 희극과 라신느의 비극


1) 순수 의식과 실제적 의식

이제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기로 하죠. 소외가 일어나는 근대 세계는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의식입니다.


실제적 의식으로 본 세계가 곧 교양의 세계입니다. 이 실제적 의식의 두 요소 즉 보편 의지와 개별 의지, 국가와 부는 모두 스스로 부정됩니다.


헤겔은 소외된 세계를 다른 의식에서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곧 순수 의식의 세계이죠. 실제 의식과 대립하는 순수 의식을 마찬가지로 두 측면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통찰의 측면입니다. 전자가 보편성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개별성에 해당되는 것이죠.


순수 통찰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의지는 자기의 반대로 전도된다는 것에 대한 인식입니다. 반면 신앙은 그런 가운데 모든 의지는 신의 힘 안에 고요히 머무르고 있다는 의식입니다. 다만 그런 세계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현실 너머의 세계입니다.


소외된 세계에 대한 두 관점, 의식은 동일한 세계를 서로 다른 의식에서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두 세계는 꼬리를 맞물고 이어지는 메비우스 띠입니다. 실제 의식의 끝(부의 자기 부정)은 순수의식의 출발점(곧 순수 통찰)이고 순수 의식의 끝은 다시 실제 의식의 출발점(국가에 봉사하는 의식)이 되죠.


2) 순수 통찰과 신앙

바로 앞에서 헤겔은 신앙을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헤겔은 순수 통찰을 제시하면서 이를 신앙과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순수 통찰에서 정신을 구성하는 본성은 “규정성의 부단한 운동이며, 그것은 직접적으로 자기를 자기의 반대로 지양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어떤 차이도 아닌 절대적 차이의 단순성”, “그 자신의 부정성의 위력 속에 존재하는 절대적 개념”이라고 합니다. 말은 다르지만 뜻한 다 같습니다. 즉 자기의 반대로 끊임없이 전도한다는 뜻이죠.


반면 신앙은 “어떤 차이도 더 이상 차이가 아닌” 단순성을 가지며, “긍정적인 일반성, 즉자 존재라는 규정을 갖는 정신”이라고 합니다. 신앙에서는 모든 존재가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면서 존재하는데 이 가치는 모두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이죠.


순수 통찰과 신앙, 양자의 차이를 다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질[Wesen: 지속성]을 결여한 채 자기를 다만 해소하는 세계가 자기 내로 되돌아오면서 정신은 진리에 따라 불가분적인 통일 속에 있다. 정신은 한편으로는 그 현상이 보여주는 절대적인 운동과 부정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내에 만족하면서 머무르는 본질이고 자기를 고요하게 긍정한다.”



3) 순수 통찰과 신앙

헤겔은 순수 통찰과 신앙의 차이를 그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아래와 같은 인용문을 보죠.


① “순수 통찰은 따라서 그 자체에서 어떤 내용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 통찰은 부정적인 대자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앙은 내용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을 통찰하지는 못한다.”


②“순수 통찰이 자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신앙은 그 내용을 마찬가지로 순수한 자기의식의 지반에서 갖지만 이는 개념이 아니라 사유이며, 순수한 의식이지 순수한 자기의식은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유를 벗어나 표상 속으로 전락하여 초월적 세계로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순수 통찰은 자기를 전도하는 가운데 자기만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반면 신앙은 신을 표상하면서 신의 힘에 의존한다는 뜻이죠.


4) 몰리에르 희극과 라신느의 비극

헤겔이 이 자리에서 전개한 신앙과 순수 통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나는 헤겔의 이 부분이 절대주의 또는 바로크 시기 등장한 두 가지 대립된 연극을 통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는 라신느의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몰리에르의 희극입니다. 전자가 신앙을 대변하는 연극이라면 후자는 순수 통찰을 대변하는 연극입니다.


예를 들어 우선 라신느의 비극, 페드라를 보죠.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새로운 왕비 페드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전 왕비의 아들 히폴리투스를 사랑합니다. 원정을 떠난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페드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히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는 아테네 전 왕조의 공주였던 아리시 아름 사랑하기에 페드라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죽었다던 테세우스가 살아 돌아오자 페드라는 히폴리투스가 먼저 자기를 고발하지 않을까 두려워 선수를 칩니다. 페드라는 테세우스에게 달려가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테세우스는 미친 마음에 바다의 신에게 부탁해 히폴리투스를 죽게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드라는 독을 마신 채 왕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죽습니다.


원래 이 비극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에우리피데스는 페드라의 운명은 신의 장난이었으며, 페드라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기에 자신의 사랑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신느는 페드라의 사랑이 그녀의 열정에서 나온 것으로 봅니다. 열정은 두 가지 측면 자유와 필연성의 혼합에서 나옵니다. 한 가지 측면은 자유이죠. 반면 또 한 가지 측면은 필연성입니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알지 못하는 필연성이죠. 페드라는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고 그래서 죄의식을 느낍니다.


결국 라신느는 이 페드라라는 극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은 신의 결정 아래 있다는 것, 인간은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 했던 거죠. 바로 이런 것이 장사니즘이라고 합니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 널리 퍼졌던 신앙이었지요.


이번에는 희극 작가 몰리에르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귀족 수업을 보죠. 부자가 된 자르댕 씨는 귀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귀족 수업을 받습니다. 음악, 예술, 검술, 철학을 배우는데, 이들은 각자 자기의 기술이 최고의 기술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실은 부자의 돈을 노리고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몰리에르는 이들의 자기 기만을 노골적으로 폭로하죠.


이어서 주르 대은 귀족 도랑트과 사귀고, 자기 딸 뤼씰르을 그와 결혼시키려 합니다. 그 자신은 도랑트를 통해 후작 부인 도리멘느의 총애를 얻으려 하죠. 하지만 귀족 도랑트는 주르댕을 이용해 그의 돈을 도리멘느와 결혼하고자 합니다. 도랑트의 음모는 주르댕의 아내에 이해 폭로됩니다. 그리고 뤼씰르를 사랑하는 자수성가한 청년 끌레옹트가 터키의 황태자 행세를 하면서 주르댕을 속여서 뤼씰르와 결혼하는 것으로 주르댕조차 기만당하고 맙니다.


이 글에서 몰리에르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모든 존재, 지식인과 부르주아 그리고 귀족 모두가 자기 기만적 존재입을 폭로합니다. 이 연극은 희극적이지만 이런 희극이 헤겔이 순수 통찰이라는 개념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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