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4)-신앙; 두 개의 프로테스탄티즘
이병창 2019.10.31 34
정신현상학 근대정신 장 B 절 주석(24)-신앙; 두 개의 프로테스탄티즘


1) 신앙의 출현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장을 전개하면서 A 절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B 절 ‘자기 소외의 정신’에서는 근대정신에 관해 설명합니다. 근대정신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I)이 절대주의 또는 바로크 시대정신을 설명하고 이어 두 번째 부분(II)에서 계몽주의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III)은 프랑스 혁명이죠. 이런 근대정신의 특징은 소외이고, 이를 극복하면서 이제 C 절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칸트, 셸링 등의 철학을 다룹니다. 여기서 정신 장을 넘어 절대정신 장(종교, 예술, 철학)로 이행하게 되죠.


우리는 앞에서 바로크 시대정신의 특징을 이루는 교양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교양은 절대주의 하에서 등장한 휴머니즘 철학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라스무스 등이 그 대표자이죠. 이런 교양의 정신은 절대주의 시대 세상을 전전했던 방랑 기사의 삶을 바탕으로 했죠.


교양인은 세상을 전전하면서 마침내 모든 것이 스스로 전도되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 전도에는 자기 자신조차 포함되죠. 아마 이런 교양인의 모습을 가장 잘 그려낸 것이 소설 돈키호테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교양인은 마침내 세상에 희망을 잃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됩니다. 이를 통해 등장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제부터 헤겔이 다룰 주제가 되죠. 286쪽에서 292쪽까지 약 5쪽에 걸친 길지 않는 부분입니다. 바로 앞의 교양이나 바로 뒤의 계몽주의는 무려 2-30쪽씩이나 할당하였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소홀하다 볼 수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언급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2) 실제적 의식과 순수의식

우선 이런 신앙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앞에서 자기 소외의 정신은 상품 교환이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를 모델로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계는 각자는 자기의 몫을 시장 교환을 통해 찾아갑니다. 각자 주관적으로 생각했던 가치는 부정되고 각자에게는 사회적으로 객관적 가치만이 할당됩니다. 이런 할당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것을 통해 맹목적 필연성을 통해 실현되죠.


이런 세상은 각 개인의 의식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 개인은 이 시장 바닥으로 나아가서 그에게 할당되는 가치를 최대한으로 많이 실현하려 하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분투는 허망하며,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에게 할당되는 가치만이 떨어질 뿐입니다. 헤겔은 이런 측면을 실제 의식이라 규정하고 이 실제 의식에서 나타나는 세계가 곧 교양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장을 통한 교환의 세계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 측면은 전체적으로 보면 각자에게 자기에게 의당한 몫이 분배되는 세계입니다. 시장의 그 보이지 않는 힘은 세계를 초월한 의지이며, 마치 이 세계를 섭리를 통해 지배하는 신의 모습처럼 등장합니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순수의식입니다.


이 순수의식은 교양인이 세계로 나가서 마침내 세계의 진면목을 보면서 처절한 절망을 통해 도달하게 된 정신입니다. 교양인은 세계가 자기를 포함하여 스스로 전도되는 모습을 보고, 마침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신에 대한 처절한 굴복이라고 할까요?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며, 그 신의 힘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맙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더 이상 행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초월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행복을 얻으리라 기대합니다.


3) 분열된 의식과 신앙

헤겔은 이런 신앙인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자기 소외의 정신은 교양의 세계를 통해 현존했다. 그러나 그의 현존 전체가 스스로 소외되었으므로, 이런 교양의 세계 저편에 순수의식 또는 사유의 비현실적인 세계가 나타난다..... 그런데 사유가 우선 이 세계의 지반이므로, 의식은 다만 이런 사상을 가질 뿐이며, 이런 사상에 대해 사유하지도 않으며, 그것이 사유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 사상은 그런 의식이 보기에는 표상의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표상이라는 말입니다. 표상[Vorstellung]은 흔히 관념과 같은 말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 표상이라는 말을 독특하게 사용합니다. 그에게서 이 표상은 지각이나 감각을 통해 얻어진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지만(유래는 무엇이든 간에, 즉 지각이든, 사유이든) 마치 실제인 것처럼 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환상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겠죠. 헤겔은 이런 표상을 항상 종교의 본질적인 형태로 간주합니다.


헤겔은 이런 신앙의 개념이 교양의 세계에서 처절한 절망을 통해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분열된 의식은 즉자적으로는 [가능적으로는] 이미 순수의식의 자기 동일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자각적인 것은 아니다. 분열된 의식은 다만 직접적인 고양이며, 아직 자기 내에서 수행된 고양은 아니며, 자기에 대립된 원리를 통해 제약되며, 여전히 자기 내에 머물며, 매개적인 운동을 통해 대립된 원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분열된 의식이 세계와 자신에 처절한 절망을 느낄 때 그 이면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 신에 대한 신앙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양자는 동전의 이면이며, 서로 대립되면서도 서로를 이미 함축하고 있습니다.


헤겔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열된 의식[신앙의 측면]에서 그의 사상의 본질은 다만 추상적인 즉자[사유]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본질이 아니며 공공연한 현실 즉 실제의 형태로 존재하는 본질이다. 그러나 이런 실제의 형태는 다른 지반[초월 세계]으로 고양되어 있을 뿐이며, 이런 지반 속에서도 사유된 것이 아닌 실제의 규정을 상실하는 법이 없다.”


헤겔은 이 구절에서 신앙에게서는 초월 세계는 현실과 꼭 같은 또 하나의 현실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상에서 얻지 못한 사회적 정의는 천상에서 실현된다는 말입니다.


4) 두 개의 프로테스탄티즘

그런데 헤겔은 여기서 언급하는 신앙은 역사적으로 어떤 단계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신앙의 개념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헤겔은 종교 개혁적 정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보입니다.

알다시피 종교 개혁은 절대주의에 등장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에라스무스 등의 휴머니즘에 영향을 받았지요. 이런 종교 개혁은 1517년 루터가 선포하기 이전 이미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가 보헤미아에서 얀 후스가 제시해 왔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면서 도덕적 실천보다는 내면적 신앙을 강조했어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기로는 초기의 종교 개혁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이어지는데 헤겔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을 절대정신 장에 들어가서야 다루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프로테스탄티즘을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신앙을 강조한 초기 종교개혁적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티즘 즉 초기 종교개혁 정신과 헤겔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구분된다고 보겠습니다. 양자는 모두 신앙 즉 표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내면적 신앙을 강조하죠.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내용에 있습니다.


헤겔의 절대정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사랑의 정신입니다. 반면 초기 종교개혁의 정신을 헤겔은 사회적 정의의 정신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전혀 다릅니다. 사랑은 자주적인 자발적인 의지에 속합니다. 반면 정의는 서로 교환되는 등가교환의 대상입니다.


이어서 헤겔은 분열된 의식이 지닌 신앙의 세계를 다른 유사한 형태의 정신과 비교합니다. 우선 스토이시즘과 비교됩니다. 스토이시즘은 사물의 본질은 지적인 직관을 통해 사유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사유의 형식만 타당하고” 그 내용은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 합니다. 반면 신앙의 세계에서는 “사유의 형식은 타당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집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이번에는 환상의 형태[표상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이니까요.


또 헤겔은 덕의 의식과 비교합니다. 덕의 의식은 정의로운 세상이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덕의 세계는 “현실에 대립해서 현실의 본질 자체로서 그러나 다만 겨우 비현실적인 본질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그 본질은 “현실의 피안에 또 하나의 현실”입니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