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동북 만주 기행6
이병창 2013.07.20 252
안내자는 소왕청 유격구의 이곳저곳을 눈에 띄는 대로 설명한다. 안내자의 자랑은 이렇다. “이곳은 정부지요.” 그래서 정부가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는 것이다. 정말 곳곳에 병원, 의복공장, 병기공장 등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김일성의 유격대 사령부터도 보았고, 중공당 위원장 동장영이 있었다는 동만 특위터도 보았다. 안내자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소개한 비석은 마지막 토벌 작전에 희생된 근거지 인민들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안내자는 그때의 근거지 방어전투에서의 고통을 생생하게 알려주었다. 서투른 쏨씨지만 그의 말을 전하고 싶다. 33년 겨울, 일제는 동만 일대의 유격구에 대한 대대적인 동기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특히 소왕청 유격구에는 일본군 정예을 포함하여 도합 1,500여명이 투입되었다. 일제는 이번에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죽이는 삼광작전을 전개하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근거지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유격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점차 수세에 몰렸다.



당시 마촌 근거지 안에는 약 1,500여명의 인민들과 유격대가 남았다. 그들은 쥐, 개구리, 뱀 등을 잡아먹으며 버티었지만 한계에 도달했다. 마침내 그해 겨울 11월 경 근거지를 포기하고 적의 포위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유격대를 둘로 나누어 반은 김일성이 이끌고 적의 후방을 교란하기로 하였다. 그 사이 나머지 반은 인민들을 옹호하면서 근거지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런 탈출과정에서 약 1,000여명의 인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겨우 500여명 정도의 인민들만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다.



당시 동만특위 위원장 동장영은 병이 들어있었다. 그는 탈출을 포기하고 밀림 속에 숨어 있기로 했다. 최금숙이라는 여성이 그를 간호하면서 지키기로 하였다. 하지만 동장영도, 최금숙도 적의 토벌작전을 살아 넘길 수는 없었다.



최금숙은 김일성이 유일하게 누이라고 칭했던 여성이라 한다. 김일성은 후방교란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최금숙에 주기 위해 가방 속에 손거울을 넣고 돌아왔다 한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는 최금숙은 그를 맞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참담한 마음으로 마침내 소왕청 유격구를 떠났다. 다시 왕청현에 돌아와 잠시 점심을 먹는 사이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독한 고량주를 털어 넣었다. 자칭 술에 관한 책을 143권 읽었다는 어느 역사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때 고량주처럼 맛있는 술은 없어. 우리는 모두 그의 말에 공감했다.



버스는 이제 도문으로 간다. 거기서 두만강을 굽어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환영하는 것인가? 두만강 연변에 조선족의 노래와 춤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두만강 앞에 섰다. 정말 두만강을 푸르렀다. 일부는 막걸리를 한통 사가지고 두만강 위에 배를 띄었다. 일부는 선착장에서 말없이 막걸리만 들이켰다.



점심부터 고량주을 먹었는데 이제 또 막걸리를 마시니 더 이상 아무 것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자 가자, 조선족의 수도라는 연변으로. 우리는 모두 두만강의 푸른 물을 가슴에 담고 버스에 올랐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