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동북 만주기행 5
이병창 2013.07.19 277
국제공산주의자 이다와 혁명열사 김금순



소왕청 유격구 마촌 근거지를 둘러보던 중 우리에게 역사를 설명하던 안내자가 어떤 비석 하나를 가리킨다. 그것은 일본군 이다 스께오의 비석이었다. 왜 일본군의 비석이 여기에 서 있지? 하는 의문은 안내자의 설명으로 곧 풀렸다. 안내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게 국제주의자들의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는 비석이지요.



이다 스께오는 일본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관동군 간도치중대(트럭부대) 소속으로 33년 3월 말 소왕청 유격구를 습격하러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군이 격퇴된 이후 마촌 근거지를 흐르는 냇물 옆 나무 숲 속에서 일본군용트럭 옆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자살했으며 그의 옆에는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유서의 내용은 이렇다.



“친애하는 중국유격대동지들, 나는 당신들이 골짜기에 살포한 선전문을 보고 당신들이 공산당의 유격대임을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함께 공동의 원쑤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쇼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예까지 운반해온 10만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그것은 북쪽 소나무숲속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쇼군대를 사격하십시오. 내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만은 영원할 것입니다. 신성한 공산주의의 위엄이 하루빨리 성공되기를 원합니다.”



마천근거지에서는 이 국제주의자를 기리기 위해 마촌 근거지의 소학교를 이다소학교로 명명했다고 한다. 이다의 행위를 알아챈 일본특무기관은 이다가 속하였던 부대에 대해 대대적인 수색과 검거를 한 이후 해산시켰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일본공산당에서 이다를 기리기 위해 그의 가족을 찾았으나 오늘날까지 그의 가족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안내자는 두 가지로 추정했다. 하나는 이다가 가명을 썼을 경우이고 또 하나는 이다의 가족을 일본의 특무가 일제 강점기 이미 모두 제거했을 경우이다.



이다의 비석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이번에는 김금순(김금녀로 알려지기도 한다) 열사라는 비석이 있었다. 나이는 10살 안팍이라 했다. 아니 그 나이에 열사라니? 그렇게 묻자 안내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때 김금순은 마촌근거지에 들어와 아동유희단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노래를 정말 꾀꼬리 같이 불러서 유격전사들은 나나할 것 없이 금순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금순이는 워낙 야무지고 또 참을성도 많아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비밀 지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금순이는 일제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금순이를 구슬리면 유격대의 비밀을 캐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금순이는 끝내 비밀을 지켰다. 금순이가 일제에게 했다는 마지막 말은 이렇다. 그녀는 일제에 의해 학살되었다.



더럽다. 너희 같은 강도놈들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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