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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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플라톤 국가 1권 질문
정준영 2004.04.24 5495

질문 반갑습니다. 조부님 상은 잘 치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질문을 올려주셨네요. 오늘 교육부 세미나 때 직접 오셨다면 더 좋은 논의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고요.(^^)

우선 1번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다만 제가 유상훈 씨가 의도한 게 뭔지 정확히 포착을 하지 못해 애매한 답변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 이 점은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느슨하게 말하자면, 유상훈 씨가 언급한 어린시절의 정의관은 주인공의 관점에서 그려지는 정의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주인공이 좋은 자로, 그 상대는 나쁜 자로 그려지고, 또 결국엔 주인공이 승자가 되는 모습이겠지요.
-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 속에서 그려지는 그런 관점은, 실은 나쁜 자의 행태가 정형되어 묘사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만화는 부분적으로는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 교육적 측면이 없지 않겠지요. 그리고 기존 사회의 관점이 투영된 만화를 보고 어린아이는 자신을 만화 속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은연중에 나름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과거에 그런 기능을 하던 것이 바로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옛날 이야기였겠고요.
- 다만 어린시절의 그 추억 속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확장시킬 수 있는 건 정의감을 고취하는 게 아닌가 판단이 됩니다. 즉 만화 속에서 적을 무찌르는 과정에는 도덕과는 무관한 승자의 기쁨이 숨겨져 있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정의감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자아의 확장으로 이해될 소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은연중에 2번 물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정의는 영어 justice의 번역어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정의론은 유상훈씨가 표현하듯, 이익의 문제가 언제난 배면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롤즈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이익을 어떻게 배분하는 게 좋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 같고요.
- 그런데 우리가 정의를 옮기곤 하는 희랍어 dikaiosyne는 그런 차원의 의미를 가지면서도 훨씬 포괄적입니다. 영어의 right(올바른)에 가장 가까운 희랍어를 찾는다면, 윗 낱말의 형용사인 dikaios가 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dikasiosyne는 사회정의뿐만 아니라 도덕적 차원의 올바름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래서 박종현 선생님은 <올바름>이란 번역어를 채택하신 듯싶습니다.)
-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정의(올바름)의 원천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트라시마코스의 견해로 제시되는 게 바로 강자의 편익(이익)이라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현실적 권력과 그 권력이 제정한 법이 곧 정의라는 논리를 깔고 있습니다. 유상훈 씨가 말씀하셨듯이, 그런 관점은 문제가 많습니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오해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을 뿐더러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강자의 논리+현실의 논리를 싸잡아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관점을 비판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플라톤의 비판의 핵심은 강자의 논리가 도대체 보편성, 내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취하는 전략은 일단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약자 입장에서도 그런 논리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죠. 이런 질문만 던져도 분명해지는 건, 강자의 논리는 강자의 이득 내지 이기심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 플라톤은 여러 가치관이 난무하고 충돌하던 시대를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 이전에 페르시아 전쟁과 장기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아테네가 겪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 점입니다. 즉 플라톤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조국 아테네를 목도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여러 가지 상충하는 가치관을 보면서, 그런 차이와 상충을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건 제대로 된 철학자라면 의당 시도해야 할 삶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 얘기가 장황하고 두서가 없어졌습니다. <국가>편의 윤리적 논의가 가치는 의미만 간략히 보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플라톤이 <국가>편에서 다루는 문제는 고대 희랍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당대의 새로운 가치관의 충돌, 그리고 그 속에서 무너지는 사회적 연대와 가치의 혼란 등입니다.
- 우선 부자 케팔로스가 등장하는 건 에게해에서 상업을 통해 재물이 축척되면서 재물의 가치에 눈을 뜬 아테네인들의 가치관을 다루기 위한 겁니다.
- 그리고 폴레마르코스의 정의와 시모니데스의 정의, 즉 <갚을 것을 갚는 게 올바르다>는 건 호메로스적 사회의 가치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호메로스 사회는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입니다. 따라서 상층 계급이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력, 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 평가어였던 명예까지 모두 독차지하는 사회였습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이었던 거죠. 아마 모든 신분제 사회가 이런 특징을 공유할 것입니다. 이런 흔적은 영어에도 남아 있습니다.
- 영어 duty와 due는 모두 불어 du를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불어 devoir에서 왔습니다. devoir는 영어 ought to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owe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위의 불어 어원이 되는 라틴어 debeo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갚을 것>으로 번역된 희랍어 opheilomenon(1인칭은 opheilo) 또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전 이게 사회적 규범과 도덕이 미분화된 전통 사회의 흔적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즉 오랜 옛날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빚진 것--돈뿐만 아니라 혈연적 관계 때문에 얻게 되는 이득 등--을 갚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걸 호메로스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걸 빚지면 좋은 것으로 갚고, 나쁜 걸 빚지면 나쁜 것으로 갚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친구한테는 이롭게 해주고, 적한테는 해롭게 해주는 게 정의라는 규정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런 가치관은 함므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 그대로입니다. 이걸 보통 응보(보복)의 법(lex taliones)라고들 합니다.(그리고 이런 가치관에는 전쟁 상태의 정황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즉 전쟁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의 한계가 그대로 가치 개념으로 노출이 된 것이죠. 물론 호메로스적 사회는 전쟁 사회입니다.)

- 플라톤은 바로 이런 관점을 여러 가지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비판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게 플라톤적인 덕윤리, 그리고 이상국가론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점만 연관시킨다면, 친구한테 이롭게 해주고 적한테 해롭게 해주는 방식의 가치관은 유치하다는 겁니다. 좀 각색해서 말씀드린다면, 이롭게 해주는 태도 내지는 심성과 해롭게 해주는 태도 내지 심성이 하나의 자아 속에서 온전한 가치관으로 통일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건 심리적인 측면의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롭게 해줌과 해롭게 해줌이란 상충되는 측면을 가지는 논리로는 가치의 보편적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플라톤은 강자의 논리, 현실의 논리를 깨뜨릴려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철인치자는 현실적인 의미의 강자처럼 삿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선(좋음)의 화신(demiourgos)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 또한 너무 장황한 이야기가 되어버렸군요. 끝으로 말씀드린다면, 철학자로서 우리는 현실 논리의 한계를 지성의 힘으로 폭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때의 지성의 힘이 자기 머리 속에서만 자리한 비현실적 관념에 머문다면 그건 공념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속에 각인된 신념은 마음을 넘쳐 흘러 몸의 행동으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플라톤은 어쨌든 그런 실천을 회피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국가론을 실현하려고 시라쿠사에 여러 번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플라톤이 남긴 육성을 통해서도 그의 가르침을 배울 필요가 있지만, 때로는 그의 실패를 통해 배울 게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악법도 법이다>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은 논리입니다. 그게 논리가 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건 다름아닌 플라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플라톤의 실패를 통해 불의에 대해 <제대로> 싸우는 방법을 달리 모색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유상훈 씨가 그런 문제 의식을 교육분과 세미나를 통해 여러 선생님들과 공유하면서 치열하게 구체화시키킬 기대하면서, 두서 없는 이야기를 이만 줄일까 합니다.

정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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