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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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만주 기행8-길림에서 꿈을 꾸다
이병창 2013.07.26 319
우리는 손정도 목사의 목회터를 찾는 동안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이미 오후가 기울어지는데 우리는 승리에 도취하여 기세등등하게 다음의 목표를 향하여 전진했다. 이번에는 북산공원 약왕묘이다. 당시 그 지하에서 김일성이 동지들과 비밀하게 모여 학생운동에 관해 토의했다고 한다. 북산공원을 찾기는 쉽다. 지금도 여전히 큰 공원이니까. 그런데 거기 약왕묘라면 약신을 보시는 사원일 텐데, 거기에 왜 지하실이 있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도 운이 나빴다. 길림육문학교를 막아섰던 것이 길림당국이었다면 이번에 우리 길을 막아선 것은 하늘이었다. 우리가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갑자기 하늘이 구름으로 시꺼멓게 뒤덮이더니 급기야 우르 쾅쾅 천둥을 동반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무슨 징조인가? 하여튼 이 폭우는 우리의 의지를 꺾고 말았다. 폭우 속을 지나 산꼭대기까지(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로 버스를 돌리고 말았다.



저녁 우리가 들어간 호텔은 길림에서도 최고급 호텔이 속한다. 서울에서도 이런 호텔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호텔의 각 방에 두 개의 침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인용 실인데, 방의 크기는 거의 20평에 가까워 방안에서 축구를 해도 능히 할 만 했다. 그 엄청난 크기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벽에는 너무나 멋진 그림이 하나 걸려 있어서 누가 그렸을까 서명을 찾아보았으나 서명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날 다들 통음했다. 나 역시 그동안 약간 낯선 사람들과 섞여 있어서인지 혹 술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여 긴장을 풀지 않았으나 이제 긴장이 거의 풀린 탓인지 술이 잘 들어갔다. 더구나 내일은 마지막 날이라 일제가 건설한 만주국 수도 장춘을 들렀다 연변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기에 일정에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의 꿈에 김일성 주석이 찾아 왔다. 나는 꿈속에서도 술에 덜 깬 채, 물었다.



아니, 김 주석님이 아니십니까? 어찌 저를 찾아 오셨어요?



아니, 동무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동무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찾아왔다네. 내가 원래 사람들 만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아, 고맙습니다. 주석님, 그런데 저한테만 오신 겁니까?



아니야, 지금 여기 곤히 잠들고 있는 동무들 모두에게 동시에 출현하고 있지. 그게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고유한 능력이야. 그런데 그 동무들이 아침에 깨면 모두 나를 만났다는 것을 기억할지는 모르지.



오신 김에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어, 좋지,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무얼 망설이겠나.



예, 사람들이 저보고 자주 주체철학이 무언지 물어봅니다. 제가 철학을 하니까 모든 철학을 기본적으로 아는 걸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자기 전공 이상을 공부하지는 않거든요. 저의 전공은 헤겔이구요. 그래서 사실 잘 모르거든요. 하긴 저도 전자제품 서비스 센타에 가면 한 명의 기술자가 모든 제품들을 다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항상 누가 묻기만 하면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이번에 가르쳐 주시면 저도 앞으로 체면치레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거 뭐 어려울 게 있나? 남조선 서울에 국립도서관에 가면 북한실이 따로 있어서 누구나 들어가 내가 지은 책들을 열람할 수 있다는데, 거기 가서 책을 보게나. 근데 남조선은 아직도 내 책을 보면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는다던데 사실인가?



그거야 공안당국 마음입니다. 고무줄 같아요. 집어넣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걸고, 빼고 싶으면 어떤 것도 괜찮아요. 그 변덕이 정말 심해서 분위기 따라 이리저리 눈치 봐야 하거든요. 공안당국은 일부러 이렇게 변덕을 부리는 것 같아요. 가끔씩 변덕을 부려놓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자기를 검열하죠.



국립도서관에서 보는 것은 괜찮다면서?



예, 저도 압니다만, 책을 읽어도 모르는 게 많아요. 주석님은 낙관주의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언젠가 정의는 실현된다는 믿음이죠. 하지만 저는 좀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에요. 과연 정의가 역사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



물론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을 거야. 도무지 이 세상 어디에도 희망의 불씨가 보이지 않은 캄캄하기가 정말 캄캄한 밤처럼 보일 때가 말이야. 그런데 역사를 보게나. 항상 바로 그럴 때가 희망이 바로 직전에 다가온 시절이라네. 산을 오를 때도 마지막은 정말 힘들지. 그 마지막 오름길은 끝나는 것 같지 않아. 주저앉고만 싶지.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작스럽게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네. 동무, 믿음을 갖게나! 성경에도 보면 묵시록에 이렇게 나와 있지. 7개의 봉인이 모두 뜯겨지자 30여분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고 했어. 그 침묵의 시기는 회의와 절망이 지배하는 시기야. 그러나 그 시기는 고작 30여분이야. 사람들은 그 30분이 마치 한 천년이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지. 그래서 못 견디는 거지.



주석님 말씀 들으니, 희망이 솟아납니다. 주석님은 누구한테 그런 철학을 배우셨나요?



나의 철학은 내가 역사적으로 투쟁하면서 몸으로 배운 거지. 동무들처럼 책으로 배운 게 아니야. 그런데 거슬러 가보면 예수님이 나의 스승이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버지가 목사님이었다는 거 알지?



예수님이 자주성의 철학의 원조라구요?



그렇다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하늘에 대고 외쳤어.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말이야.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회의에 빠진 게 아닐까?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면 하늘이 무언가 이 세상을 바꾸어 줄 것으로 기대했는지 몰라. 그런데도 하늘은 여전히 그대로인거야. 그래서 마지막 순간 그렇게 외친 거지.



그러면 주석님, 예수님조차 절망에 빠진 것이 아닌가요?



어, 참, 이 동무 성질이 급하그만. 끝까지 들어 보래도.



예, 죄송합니다. 동무,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을 외치는 순간 갑자기 깨달은 거야. 그래서 숨을 거두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네. 다 이루었다고 말이야. 그런데 동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한 줄 알겠어?



주석님, 전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 뜻을.



내 생각에 말이야.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 고통 속에서 외쳤지. 그런데 그 말을 외치면서 깨달은 거야. 신이 어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바로 신이라는 것을 말이야. 스스로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는 자주적인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진정으로 신적인 의지이거든.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기를 신으로 만든 인간 곧 자주적 인간이야.



주석님, 그러면 그런 자주성이란 신적인 존재에게만 가능한 것 아닐까요? 예수님은 신으로 태어났으니까요.



동무, 예수는 그저 마굿간에 태어난 인간에 불과했어. 그런데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주성을 길러서 신이 된 거지. 이 세상이 예수님이 처음으로 신이라는 존재가 된 거야. 그 이전에는 신이란 존재는 없었어.



주석님, 아무래도 저는 자주적인 인간이 되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신이 되기는 너무 어려워요.



동무는 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신이란 자주적인 인간이래도. 자유를 사랑하여 투쟁하는 혁명가, 사랑에 몸을 던지는 여인, 아름다움에 자기를 불태워버리는 예술가들, 그리고 진리를 위해 결코 지치지 않는 학자들, 타인의 먹거리를 위해 한 숨도 쉬지 않는 노동자들, 이 모두가 다 자주적인 인간이고 곧 신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네. 그런데 동무, 꿈을 너무 길게 꾸는 게 아닌가? 깨어나면 다 잊어버릴 텐데, 길게 꾸면 어떻게 다 기억하나? 그만 꿈꾸고 아침을 준비하게나.



예, 주석님, 내일 저녁에도 꿈에 오시는 거죠?

글쎄 자네가 꿈을 잊지 않는다면 언제나 날 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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