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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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4; 피갈 광장에서 물랭 루즈로
이병창 2015.08.22 75
유럽 여행 4월 22일
1) 몽마르뜨의 길
유럽은 우리보다 북쪽에 있다. 해는 일찍 뜨고 밤은 늦는다. 우리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유럽에서 첫 날을 지냈다. 아침 5시가 되니 벌써 날이 밝아 온다. 벌써 6시 반, 아직 잠들어 있는 호텔 주인을 깨워 문을 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우선 몽마르트 언덕을 감싸는 전철선을 따라 호슈슈아르 길에서 클리쉬 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클리쉬 길 끝에 몽마르트 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묘지를 찾아다니는 관광객을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거리에는 레스토랑과 카페, 지하 클럽 그리고 야릇한(?) 간판을 내건 상점으로 가득 차 있다. 아직 붉은 네온 등이 켜져 있다. 길거리에는 어제 밤의 흔적을 가득 차 있다.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 거리에 굴러다니는 안내 찌라시가 아침의 맑은 기운과 훤하게 밝은 햇빛과 어울리면서 묘한 언밸런스를 이룬다. 부지런한 아랍인들이 벌써 상점의 문을 열기 위해 쓸고 닦고 있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흐트러진 머리로 어깨를 안고 비슬거리며 걸어가는 연인들 사이로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묘지를 향해 걸어갔다. 난 그냥 티셔츠 하나 걸치고 걸어가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약간 싸늘하다. 양복 자켓을 입고 걸어 홍교수가 부럽다.

이 길은 예술가라면 반드시 걸어가 보아야 할 길이다. 19세기 말, 소위 벨 에포크(좋은 시절) 시대 이 길은 ‘모던 카바레’가 열렸던 곳이다. 1881년 세워진 ‘Le Chat Noir(검은 고양이)’, 1889년 세워진 그 유명한 ‘Moulin Rouge(빨간 풍차)’가 이 길가에 있다. 호슈슈아르 길과 클리시 길이 교차되는 곳이 피갈 광장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에릭 사티의 리듬에 맞추어 걷는다. 그는 그 시절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쳤다. 에디 피아프가 노래를 불렀다는 피갈 광장을 지나자, 저쪽 물랭 루즈에서 화가 로트렉이 짧은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듯하다. 그가 그린 캉캉 춤 댄서도 길모퉁이 이쪽저쪽에 숨어 우리를 엿보고 있는 듯하다.

?#?피갈? 광장(사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물랭루즈에서의 공연을 구경해볼까 해서 가격을 알아보니, 지금 기억으로는 100유로를 넘는 듯했다. 우리 처지를 감안하여 그냥 그 앞을 지나가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생각했는데, 물랭루즈를 지나가는 순간,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까지 왔는데, 그 공연을 안 본다니! 째째한 사람이라니! 속으로는 스스로를 욕했지만 엄연한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다. 그저 이 자유로운 예술의 거리의 냄새와 분위기에 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지!

물랭루즈라니? 빨간 풍차가 건물 위에 올라 앉아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겠지만,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풍차일까? 하기야 우리나라에 배를 얹어 놓은 포스트모던 건물도 있으니까. 그때 벌써 포스트모던이 나온 것인가? 그런데 몽마르뜨 언덕에는 옛날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풍차가 있었던 모양이다. 고흐가 그린 그림 가운데 몽마르뜨 언덕의 라 갈레뜨(La galette)의 풍차를 그린 그림도 있다. 르누아르가 그린 무도장 역시 라 갈레뜨 풍차 무도장이라고 한다. 이 장소에는 지금도 레스토랑(Le Moulin de la Galette)이 있다고 한다.



?#?고흐의? 그림 <라 갈레뜨의 풍차>(사진)

나는 이 길을 걸으며 내내 왜 몽마르뜨가 예술가로 가득 차게 되었는가를 생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몽마르뜨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밀집하게 되었고,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에 나서면서 부르주아들의 환락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이곳의 집값이 싸서 모여들었다 한다. 이런 환락의 분위기가 인상파 이후 모더니즘 예술을 자극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환락의 분위기를 부르주아의 위선적인 도덕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내걸었을 것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내 생각에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인 원인에는 여기 묻힌 파리코뮌의 전사에 대한 오마주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시인 랭보가 모든 것을 때려 치고 지옥에서 한 시절을 보낸 것은 파리코뮌에서 전사들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여기 모인 예술가들은 이런 랭보의 후예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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