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학회지 속에 숨어있는 아카데니즘의 망령을 추방하자
이병창 2009.09.20 1093
저는 한때는 한국철학회의 학회지에 투고하기도 했으나, 기존 학회의 아카데미즘에 너무나도 실망해서, 최근에는 그래도 아카데미즘적 성격이 덜한 한철연의 학회지에만 투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철연에 투고했던 논문이 수정후 개제, 개제불가 등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무려 2년 동안 준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기초 텍스트가 되는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철학책이란 것이 난해하기에 어떤 책도 대체로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뭐 능력부족이라면 할 수 없지만,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 그 책을 읽었습니다. 무려 4번이나 읽고 나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 그 책의 저자가 무엇을 추구하려 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여 논문을 썼지만 탈락되니까 정말 한숨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심사평을 여러번 읽어 보았습니다. 왜 저의 논문을 탈락시켰는지 알아야 논문을 고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심사평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렇게 심사해서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심사제도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심사를 한 사람에게 어떤 반감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학진이 추구하는 아카데미즘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진의 아카데미즘을 비판하려 합니다. 저 역시 심사를 자주 맡았기 때문에 비슷한 고통을 남에게 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비판에는 저 자신도 포함된다 하겠습니다.
학진은 심사제도를 개별학회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학회의 학회지의 등급을 판정하므로, 궁극적으로 학진은 심사제도 자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학진이 규정한 심사제도는 날로 형식화되고 있습니다. 소위 아카데미즘이란 거죠. 이 형식화된 아카데미즘의 기본 원리는 주제가 참신한가, 논증이 적절한가, 다양한 자료를 포괄하는가, 얼마나 기여하는가 등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 자체에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누구나 논문을 평가하라 하면 그와 동일한 원리를 제시할 테니까요.
문제는 심사자 3인을 선택하는데, 소위 학계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임의 선택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의선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정말 공정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기대와 정반대의 결과를 자아냅니다.
우선 어떤 논문이 참신한 주제, 학계에 기여할만한 논문으로 평가될까요? 당연히 대학원 석사논문의 주제가 그렇게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에 석사논문의 주제로 선택되는 것입니다. 결국 결과적으로 보면 항상 유사한 주제의 논문이 반복적으로 작성되고 발표됩니다. 만일 누가 진짜로 참신한 주제, 새로이 기여할 논문 주제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3인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은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주제를 선택했을까 생각하고 자기 나름에는 학계를 정화하기 위해 그런 논문을 추방해 버리고 말겠죠. 그는 자신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고, 소위 선무당 사람 잡는다는 식으로 칼을 휘두르고 말죠. 참신한 주제, 새로이 기여할 논문을 발견해내는 것 자체는 그 분야에서 정말로 최고의 감식력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학진은 반드시 임의선택을 통해 심사자를 선정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그런 감식력 있는 사람의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논증이 적합한가, 다양한 자료를 포괄했는가 하는 심사원리는 사실 너무나도 형식적인 원리이기에 모든 논문이 걸면 걸리지 않을 논문은 없습니다. 심사하는 사람이 한번 쑥 읽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논문은 다 논증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사하는 사람이 주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료가 빠지면 모두 다 자료가 풍부하지 못하다는 원리에 걸리고 맙니다. 심사자는 자기 자신을 검증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논증의 문제나 자료의 문제는 심사자가 정성들여 논문을 읽고 이용한 자료의 수준을 검토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거치치 않는 한 그 역시 실현불가능한 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사하는 사람은 심사논문을 받으면 한 달 안에 평가해서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일로 다급하고 긴요한 일이 아니니까 하면서 미루다 보면, 평가를 당장 내일까지 마쳐야 한다는 통보가 다가옵니다. 그러면 한번 쑥 읽어보고, 밸이 꼴리는 대로 평가하고 맙니다. 논문을 이해할 필요 없이 십 분 만에 평가할 수 있는 원리가 논증과 자료의 부족이죠. 모든 논문에 걸면 걸리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이 기준은 마치 너 죄를 졌지 하고 물으면 누구나 다 뒤가 켕기는 법인 것과 마찬가지이죠.
이제 한국철학계에 학진의 심사원리가 통용된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보죠. 한국철학회의 철학지를 본다면, 이건 거의 동일한 논문의 반복입니다. 개개의 논문은 다 가치가 있고 학진의 심사기준을 통과한 훌륭한 논문입니다만, 철학지 전체는 동일한 논문의 새끼치기에 지나지 않죠.
저는 오랫동안 영화와 철학을 연결시켜서 간학제적으로 연구해보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리 연구를 해보아도 어떤 학회지에도 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5년간에 걸친 연구를 최근에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논문은 영화학자들의 학회지에는 실을 자격이 없어서 싣지 못합니다. 어느 학회나 마찬가지이지만  자격 취득이 그 분야 대학원을 다니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철학 논문을 철학회에 투고하면 거의 100이면 100정도 이건 철학적 논문이 아니라고 판정됩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영화철학자들이 따로 모여서 학회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새로 만든 학회지는 학진에 등재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결국 논문을 쓸 수가 없고, 한두 번 심사에서 탈락하면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의 논문도 문학과 철학에 다 함께 걸린 논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학적인 것이라서 철학적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말 무기력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논증이 부족하다, 주제가 명확하지 못하다고 심사자들이 말하더군요. 문학과 철학 사이에 걸려 있는 논문이니 철학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저의 논문의 논증과 주제를 이해하려면 심사자 역시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한 그런 연구를 하는 사람은 한국에 거의 없지요. 만약 이 논문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면, 문학하는 쪽에서는 분명 다양한 자료를 포괄했는지 의심스럽다, 학계에 기여의 정도가 없을 것이라고 평가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논문을 심사한 사람의 고충을 이해할 만합니다. 논문을 심사하기 위해 공부를 새로이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는 그가 아는 대로 솔직하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이런 평가가 학진의 심사원리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학진의 이 심사원리는 원래 논문의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제시된 기준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일등과 이등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 원리를 적용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실 그것도 의심스럽습니다만, 학진의 연구비야 제가 포기하면 고만이고, 솔직히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학진의 심사원리를 학회지에 적용하는 것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학회지는 일등 이등을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이 학회지는 일정 기준의 자격을 가진 논문이라면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주제에 있어서 기왕에 자주 나왔던 반복적인 논문 즉 석사과정의 논문주제가 아니라면 광범위하게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논증의 문제에서도 더 관대해져야 합니다. 논문을 보면 오랜 고투 끝에 이루어진 논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논자가 그 고투 끝에 아직은 부족하지만 어떤 빛을 보았을 때 그가 보여준 그 빛만으로도 비록 논증이 부족하고, 심지어 말도 제대로 안된다고 하더라도 학회지에 실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오히려 매끈한 논증을 가지고, 수많은 전거를 남발하는 소위 학진의 기준에 적합한 아카데미즘적 논문을 보면 칼로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문제는 아무런 고투가 없이 쉽게 작성되어서 누구나 다 좋게 평가하는 논문이 아닐까요?
논문의 심사자는 그저 막연하게 논증이 부족하다, 주제가 불명확하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는 각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이 논증은 적어도 이런 식으로 되어고 주제는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보기를 주어야 다시 고치고 말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저 논증이 부족하다, 주제가 불명확하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니 죄는 니가 알아라’하는 조선시대 처벌방식과 동일합니다.
다른 철학지의 경우는 제가 관여할 입장도 되지 않고, 이미 거대한 권력기관이 되어버린 학진의 개혁을 저는 꿈꾸지 않습니다. 아예 그런 것 없는 데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철연의 학회지인 시대와 철학만은 학진의 억압적인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학문은 즐거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학진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학문이 정말 지겨운 고역이 되고 있습니다. 학문이 학자로부터 소외되고 있어요. 한철연과 시대와 철학을 이런 학문의 소외로부터 해방시키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저의 논문을 공개하려 합니다. 제가 좋아서 쓴 논문이고, 이 때문에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니, 굳이 학회지에 실어야할 필요도 없겠죠. 한철연의 자료실에 보니, 저처럼 낙선한 논문들이 올라와 있더군요. 거기가 앙데팡당전인 모양이죠. 저도 거기에 올리겠습니다.
지금 새벽이군요. 너무 피곤해서 이제 잠들어야 합니다. 피곤한 가운데 두서없이 써서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을 거 같아요. 양해 바랍니다. 그렇다고 이런 글을 다시  퇴고하고 싶지도 않아요. 마지막으로 시대와 철학 학회지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분들을 비난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고, 저의 논문을 학진의 원리대로 심사해준 분에게도 개인적인 반감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고통은 한철연의 회원 대부분이 겪는 게 아닐까 해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저의 목표는 한철연 잡지를 아카데미즘과 학진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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