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이런 시를 띄워봅니다
유윤영 2004.03.13 4262
전 사실 태극기를 보면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저야 뭐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보지 않았으니까 태극기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와 여러 행사에 항상, 그리고 오후 5시에 항상 울려퍼지는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 또한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제 거리 시위 장면을 방송하는 TV 뉴스에 태극기를 두르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쩝, 뭐라고 해야할지...

불현듯 김남주 시인의 시가 떠오르더군요. 철학하는 사람. 지식인들은 무얼해야 하는가, 어떤 판단을 해야하는가 뭐 이런거 말입니다.



사상의 거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갈 길 몰라 네거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웬 사내가 인사를 한다
그의 옷차림과 말투와 손등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노동자일 터이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요 선생님은
그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집회에 가는 길이라며 함께 가자 한다
나는 그 집회가 어떤 집회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다


집회장은 밤의 노천극장이었다
삼월의 끝인데도 눈보라가 쳤고
하얗게 야산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추위를 이기는 뜨거운 가슴과 입김이 있었고
어둠을 밝히는 수만 개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한입으로 터지는 아우성과 함께
일제히 치켜든 수천 수만 개의 주먹이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날 밤 눈보라 속에서
수천 수만의 팔과 다리 입술과 눈동자가
살아 숨쉬고 살아 꿈틀거리며 빛나는
존재의 거대한 율동 속에서 나는 알았다
사상의 거처는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가 아니라는 것을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가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라는 것을
사상의 닻은 그 뿌리를 인민의 바다에 내려야
파도에 아니 흔들리고 사상의 나무는 그 가지를
노동의 팔에 감아야 힘차게 뻗어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잡화상들이 판을 치는 자본의 시장에서
사상은 그 저울이 계급의 눈금을 가져야 적과
동지를 바르게 식별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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