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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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기다리며-이순웅
hanphil 2009.08.07 1120
*[미디어스] 연재 세 번째 글은 이순웅 선생님이 써 주셨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기다리며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려 했으나 10월로 연기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작년 8월이 발간 일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전 수록 대상자인 장우성과 엄상섭의 후손들이 ‘친일인명사전 발행 및 게시금지가처분’ 신청을 한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그들의 가처분 신청은 올 2월 19일 모두 기각되었지만, 행여 또 다른 이유가 생겨 발간에 차질이 생기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사전을 발간한다고 해서 곧 친일 세력이 청산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작은 발걸음이나마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이번 일은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가처분 신청을 하는 이의 숨은 심리는 무엇일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용서해주고 싶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궤변의 뿌리는 무엇인가?

근대정신의 이중성 - 계산적 합리성
합리성(rationality), 이성(reason)은 근대(modern)를 열었던 핵심 정신이다. 이른바 ‘중세의 암흑기’도 이들 정신이 강조되면서 종말을 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대가 우리에게 축복이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식민지를 침탈해 들어왔던 제국주의 세력의 주요 논리는 ‘너희를 근대화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근대화 논리를 앞세운 자들은 합리성 지상주의, 이성 만능주의를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음으로써 근대정신의 이중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따지고 보면 흔히 합리성이라 번역되는 rationality나 이성이라 번역되는 reason은 어원이 같다. 이 말들은 라틴어 라씨오ratio에서 온 것이며 라씨오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의 번역어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이성, 언어, 원리, 법칙 등으로 번역된다. 그렇지만 이들 번역어 중 어느 것도 정확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로고스라는 말은 그 의미가 풍부하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있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은 원래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헬라어)로 써졌기 때문이다. 로고스라는 말은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 그리스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일종의 ‘계산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라틴어 ratio는 단어 그대로가 영어로 되어 비(比), 비율(比率) 등의 뜻을 가진 ratio가 되기도 했고 rationality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편 라틴어 ratio는 불어 레종(raison)으로 번역되었고 레종은 영어 reason이 되었다. 그런데 근대를 이해하려면 그리스어 logos든 라틴어 ratio든 영어 rationality나 reason이든 ‘계산’(calculation)이라는 뜻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산의 기초는 더하기와 빼기이다. 곱하기는 같은 수를 계속 더하여 합하는 것이고 나누기는 어떤 수를 뺄 수 있을 때까지 빼는 것이다.

사실 이성은 reason의 대표적인 번역어일 뿐이다. reason에는 이유, 추론 등의 뜻도 있다. 다시 말하면 ‘따지다’, ‘왜냐고 묻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분야를 발전시킨 것이 논리학(logic)이라 할 수 있는데, 어원은 역시 logos이다. 논리학이란 따지고 물으면서 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 거짓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빼고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더하여 합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reason을 추론이라는 의미로 보면 이것은 일반명사들의 연결 관계를 ‘계산하는 것’(더하기와 빼기)이기도 하다. 한편, ‘로고스의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아카데메이아에 올 자격 없다’고 했는데, 기하학도 따지고 보면 선이나 도형, 각도, 비례 등을 더하기와 빼기에 기초해서 가르치는 셈이다.

rationality 역시 ‘계산하는 능력’인 ratio에서 온 말이지만 reason과 굳이 구분하자면 reason의 결과가 합리성(rationality)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계산 능력인 이성적 정신 능력을 잘 발휘하면 합리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합리성이란 ‘어떤 행위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데 최적의 수단이 되는가’를 가리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확실히 근대정신은 물질문명과 같은 것을 고도로 발전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여러 가지 편리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근대정신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근대적 이성이 지닌 도구적 측면을 비판하고 대화적 이성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고 푸코와 같은 철학자는 이성이 본래 억압적이라면서 반(反)이성의 길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일제 식민지시대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그들이라고 친일을 선택하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을 안 했을까? 아마도 그들에게도 양심이란 것이 있었기에 내심 찝찝하기는 했을 것이다. 세상에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겠는가. 스스로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생각한 것이 ‘우리가 독립을 할 수 있을까?’이다.

대표적 친일 시인 중 한 사람인 서정주는 ‘왜 친일 시를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일본이 망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100년은 갈 줄 알았다’고 말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구별이 거의 없었고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일제 말로 가면 갈수록 독립의 꿈을 포기한 채 일본 사람으로, 일본 사람보다 더 일본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계산기를 두드려본 거다. 아무리 계산해보아도 ‘독립’이라는 답이 안 나오는 거다. 이럴 바에는 그냥 일본 사람으로 살자. 안 되는 건 하지 말자. 이것이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의 1차적인 자기 정당화이다. 계산적 합리성, 계산적 이성이 작동한 결과다.

이들에게 독립운동은 비합리적이다. 왜냐하면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 큰 데 반해 남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지만 독립이 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에게 독립운동은 완전히 ‘밑지는 장사’다. ‘더하기’는 없고 ‘빼기’만 있다. 그들에게는 친일이 ‘참’이고 독립운동이 ‘거짓’이다. 그들의 계산은 정확했다.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이 독립기념일이 아니라 ‘광복절’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광복’ 이후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는 미군이 들어왔고 이들과 결탁한 친일 세력은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이라 하지 독립기념일이라 하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기념관은 있지만 독립기념일은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독립운동 - ‘해야 하는 것’
그런데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다. ‘깨지고’ 다치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끝까지 독립운동을 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독립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다. 말하자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계산적 이성의 명령에 따른 합리적 삶이고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삶이다. 물론 ‘해야 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면 좋지만, 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선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 아닐까?

흔히 ethic을 윤리로, moral은 도덕으로 번역하는데, 이 두 개의 단어는 사실상 어원이 같은 셈이다. ethic은 성격, 습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ethos에서 온 말이고 moral은 로마의 키케로가 ethos의 형용사인 ethikos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인 moralis에서 기원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이든 윤리든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두 단어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다만 도덕(윤리)의 문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인데 이러한 판단을 하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해야 하고’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실은 윤리(도덕)적인 것도 그리 간단치는 않다. 다만 두 가지로 도식화한다면 (1)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행복(쾌)을 최대화하는 것’과 (2)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1)은 쾌락을 계산해보려고 했던 벤담의 공리주의에 기초한 윤리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고통을 멀리하고 쾌를 최대화하려는 존재이므로 최대다수가 최대행복을 누리는 것이 최선이다. (2)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기초한 윤리이다. 칸트는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법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선의지’가 있기에 그 법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쾌를 가장 중시하는 이기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다른 인간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는 선의지를 가진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윤리학상의 난제이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도덕적 판단의 문제와 관련해서보면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행태는 칸트의 윤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공리주의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일과 영달을 위해 대다수의 우리 민족을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며, 소수가 다수의 행복(쾌)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
위에서 말한 계산적 합리성과 도덕성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물으면 거의 다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시대로 돌아가 보자. 도덕적 삶이란 나에게 희망사항일 뿐일지도 모른다. 독립이 요원한 마당에, 어쩌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맨땅에 헤딩’할 수 있겠는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끝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은 또 어떤가. 역사를 바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금도 나이 많은 어른들은 철도를 설치했느니, 공장을 지었느니 하면서 일본식 근대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들에게는 조선에 설치된 철도와 공장이 일본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란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역사가 너무나 많다. 일본에게 큰소리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친일세력들을 그대로 기용한 이승만, 독립군을 ‘무찌르던’ 만주군 장교출신 박정희, 박정희의 명을 받들어 베트남에서 더러운 전쟁을 펼쳤던 전두환과 노태우, 민주주의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이명박 정부. 이들의 뿌리는 같다. 바로 친일세력이다. 문화재청장 이건무는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손자 아닌가.

아마도 이들이 펼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친일을 정당화하면서 완성될 것이다. 오직 경쟁만이 살 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경쟁에서 이기려면 힘을 길러라, ‘스펙’을 관리하라. 친일은 우리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힘을 길러야 독립도 하지 않겠는가. 결국 우리의 행위는 친일이 아니다. 애국이다, 애족이다. ‘가처분 신청’이니 ‘식민지 축복’이니 하는 자들의 궤변은 바로 이 지점에서도 나온다. 이러한 힘의 논리는 훨씬 세련돼 보이는 또 하나의 자기 정당화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우리가 독립을 하지 않고는 힘을 기를 수 없다는 것, 진정한 힘은 독립에서 나온다는 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니, 사실은 보이는데 자신들의 과거를 어떻게든 덮으려 하다 보니 위와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들의 궤변을 잠재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해야 하는 것’은 안 하는 ‘잔머리’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아픈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산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다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번 󰡔사전󰡕 발간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우리는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채 64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웅(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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