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새번역 주기도문의 오역에 대한 논쟁-이대환#석동신
석동신 2005.06.26 3090
이대환

이번에 KNCC가 고치려는 주기도문을 보면 표현이 쉽고 잘못된 부분이 수정되어 있어서 대체로 환영한다. 특히 \"나라이\"가 \"나라가\"로 고쳐진 것은 반드시 그렇게 고쳐져야 한다. 학생들이나 일반 성도들은 이 \"나라이\"에 대하여 \나라에\"로 오해한다. 이는 아버지의 나라(하늘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 달라는 뜻인데, 사람들은 아버지가 이 나라(현실세계)로 오시는 내용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아니면 뜻을 잘 모르고 사용하며, 어떤 이는 부사 \"나란히\"로 오해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것이 고쳐지는 것은 당연하며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고치려고 내어놓은 기도문에도 한 가지 오류가 있다고 보기에 지적을 하고자 한다. 고쳐진 내용에는 \"우리가 우리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선정된 단어와 내용 자체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본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풀어주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풀어 주시고\"의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잡힌 땅, 잡힌 몸, 그리고 빚 담보가 능력자의 대속(무르기: redemption)으로 풀려서 자유케 되는 원리다. 그 원리 그대로 우리의 죄를 하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경제생활에서의 무르기, 곧 대속은 경제원리이자 우리 기독교가 말求?영적구원의 방법으로 핵심 교리다.

따라서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풀어주듯이(또는 사하여 주듯이) 우리 죄를 풀어주소서(또는 사하여 주소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시장원리인 무르기와 구원원리인 대속, 생활과 종교, 인간과 구원자, 경제와 영혼의 문제가 하나로 융합되는 통전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대강 써 보았는데 여기에 대하여 독자들의 의견이 있으면 내어 주기 바란다.

2004. 12. 9./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자유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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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신

어차피 빚 탕감의 경제 원리를 인간 죄의 용서의 원리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새 주기도문의 번역이 크게 잘못되어 보이지는 않는군요.


님과 같은 원어에 입각한 주장은 교회 신도들에게 주기도문을 해설해 줄 때나 필요한 설명한 것이지 번역까지 그런 식으로 해 버리면 오히려 번거롭고 구차한 번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이란 신중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독교인 중에 그런 빚 탕감의 원리에 따라 자기에게 빚진 자를 탕감한 사례가 있습니까? 일전에 모교에서 50주년 희년을 맞아 그런 운동을 한 사례가 있다는 뉴스를 접했으나, 이를 실천에 옮긴 신도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이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자본이야말로 진짜 신으로 군림하는 세상헤서...

진실로 목사들의 진짜 신은 여호와가 아니라 자본 아닙니까?

저는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과연 기독교의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한 속죄의 교리가 타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 자체가 메시아 상에 짜 맞춰진 조작된 신화적 메시아인데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는 바울로 신학 또는 초대교회의 신학은 유대인과는 다른 새로운 메시아 상의 정립에서 파생된 한 무리의 독단적 종교사상일 뿐 그것을 믿는다고 과연 내가 지은 죄가 사해지겠습니까?

또 죄란 무엇일까요? 사법상의 죄는 형법상 벌을 받게 되어 있고, 소위 양심상의 죄는 늘 반성하고 성찰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겠습니까?

또 만물은 유전하여 실상이 없으므로 죄도 본래 없는 것이라는 불교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님의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의 홈은 xbible.com.ne.kr<기독교성서포럼> 입니다.

2004. 12. 9.KNCC 자유게시판에서
======================================================================================이대환

의견에 감사를 드리면서 님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는 점 두 가지를 말씀 드립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는 하나님의 아들로 역사적 그리고 실제적으로 존재하신 분이지 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은 신화적 가상물이 아닙니다. 그 분의 초림은 실제상황이었고, 앞으로 있을 재림도 실제 있을 사건이겠지만 우리의 안목은 그분을 제대로(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거나 없는 분으로 불신자라고 여겨 집니다.

2. 관련 주기도문은 전반부(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는 것 같이)에서 원문도 빚, 내용도 빚 탕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가 죄에 대한 사함입니다.

원문과 내용에 충실한 번역이 왜 좋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다만 처음 들으니 우리가 늘 종교적 안목으로만 훈련이 되어 있다가 경제생활에 관련된 것이 나오니 좀 어색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님이 말씀대로 어차피 자본주의는 배금주의 사상이 기독교의 본질보다 더 강한 면이 있다면, 그럴수록 성경이 말하는 빚 탕감의 경제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고쳐야 하겠지요. 님은 이 부분에서 오히려 자기 모순을 보이는 주장을 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은 아주 오묘하여서 균형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어쩌면 사도신경보다 더 탁월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생활상의 기도 내용이고, 사도신경은 사람이 만든 종교적 신앙의 고백문일 뿐입니다.

2004. 12. 10. KNCC 자유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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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신

빚 탕감의 원리로 속죄를 기원하는 예수의 기도로 전해 온 초대교회의 기도문은 님의 말씀이 옳으신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소위 주기도문을 옮긴 이들은 왜 번역을 그렇게 했을까요?

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의도적 오역이 되겠지요?

만약 무지의 소치라면 소위 주기도문을 옮길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소위 주기도문을 옮긴 것이 되고,

의도적 오역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영리사업에 의한 자본의 원리가 지배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원리와 다르므로 이를 감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번역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그들이 신봉하는 소위 주 예수의 가르침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 원리를 더 중시하는 소위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제 원리로는 빌린 돈을 갚되 이자는 줄 의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자 그럼, 어느 것이 현실적인 가르침일까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빚은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이 됩니다.

즉 예수는 오른빰을 맞으면 왼뺨까지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면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 주라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님은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나 실천하셨나요? 아니 님은 지금까지 남에게 돈을 꿔 주었을 때 언제나 갚을 필요 없다고 항상 거저 주십니까?

물론 이렇게만 한다면 훌륭한 자선사업가는 되겠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얼마 안 가 본인 자신을 알거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와 노자는 원수를 사랑 또는 덕으로 갚으라고 가르쳤지만, 공자는 원수를 곧음으로 갚으라고 했는데요.

예컨대 내 아버지를 살해한 살인범이 내게 용서를 구하는 경우 기독교인이나 도교인은 무조건 용서하고 오히려 사랑을 베풀지 모르지만, 유교인은 먼저 형법상의 죄값을 치른 다음 내게 오라고 할 것입니다.

자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기독교]는 인간이 결코 행할 수 없는 도덕률을 인간에게 부과해 놓고는 , 즉 초대교회가 예수 인간을 신격화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를 행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어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 가라는 엉터리 복음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예수의 말대로 산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그러한 가르침을 문학적 과장법이니 어쩌구 하는 것입니다<소위 문학비평>.

이제 님은 두 가지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최소한 오역된 소위 주기도문을 예수의 가르침대로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 잘못된 번역을 잘못잡기 위한 운동을 해야 합니다.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만약 이 운동에 실패하신다면, 그리고 만약 님이 목회자시라면, 최소한 님의 교회만이라도 님의 주장에 맞는 소위 주기도문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님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실천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즉 님에게 돈을 꿔 달라는 사람에게 거저 돈을 주는 생활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50년 희년 개념과는 다른 평소의 생활태도를 예수가 가르친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지막으로 님의 예수관에 대해 한 말씀하겠습니다.

예수를 역사적 실체로 믿는 님이야말로 이성적 사유에 문제가 있으신 분 아닙니까?

어떻게 예수가 인간이라면 성령의 잉태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물 위를 걸어가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40일 만에 하늘로 승천했으며, 지금은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가 종말에 인류를 심판하러 구름타고 재림하겠습니까? 예수가 손오공입니까?

이러한 예수에 대한 소위 신약 또는 초대교회의 주장은 신화시대의 주장 아닙니까? 초대교회는 구약의 메시아 사상, 이집트 오시리스 신의 부활신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 및 종말사상 등을 짜집기 해서 예수를 메시아로 조작해 낸 것 아닙니까?

이러한 메시아상이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소원에 들어맞아 그동안 기독교가 2천 년 동안 세계 종교로 군림해 온 것 아닙니까?

요즘 유치원 생이 아니고서야 정신인 온전한 사람이라면, 이따위 신화론적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만약 님이 신학생이거나 목회자시라면 도대체 신학교에서는 무엇을 공부하셨습니까?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적어도 신약이 신화론적 세계관 위에서 쓰여진 종교사상 책이라는 것 아닙니까? 즉 인간이 만든 사상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신화시대의 세계관은 현대인에게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견해에 대한 님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4. 12. 11. KNCC 자유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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