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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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2강<맑스와 푸코의 권력 이론>에 대한 후기입니다
박종성 2011.04.10 1431
안녕하세요?

2조 조장 박종성입니다.

후기를 이제야 올리게되었습니다.

아래는 이성백 선생님의 <맑스와 푸코의 권력 이론>에 대한 후기입니다.



먼저 그람시의 시민사회에 대한 분석은 이데올로기적 지배양식을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그람시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보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정치철학 강좌 3강에 그람시를 주제도 하는데, 다시금 고민해봐야 할 지점입니다. 하여간 그람시의 이론을 수정하면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시민사회\ 대신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틀을 통해 시민사회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합니다. 그는 이러한 개념을 통해 국가의 지배양식이 관철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는 국가에 위협적인 상황이라고 판단될 때,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권력에 의해 조절되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정치이론을 거시권력에서 미시권력론으로 중심을 이동시키면서 확장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60년 이후에 서구이론은 국가보다는 일상적 권력을 탐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소련사회의 관료화를 비판하면서 10월 혁명 후 소련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급투쟁의 유효성을 견지하면서 ,PT(프롤레타이아 독재)의 타당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 문제에 집중하면서 지배양식의 다원화(환경, 여성 등)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공당산의 교조화를 비판하면서 자본-노동의 관계 너머의 권력 관계, 즉 미시권력의 작동으로서의 감시, 처벌, 나아가 여성, 환경, 동성애 등으로 고찰의 대상을 전환합니다. 즉 생체정치론, 미시권력론으로 지배양식의 틀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의 탈맑스주의 정치이론은 미시권력의 공간을 학교, 교회, 감옥, 병원으로 파악하면서 훈육의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맑스주의 정치이론의 확장인데 미시권력의 공간으로 \학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알튀세로와 마찬가지로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푸코의 문제점은 미시권력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결국 미시권력을 분석하면서 거시권력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미시권력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시권력은 의회주의의 문제로 파생되어 대중의 감시, 처벌의 형태로 작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거시권력을 다시금 분석해야 하는 과제를 여전히 안고있는 것입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리고 이어지는 로크 정치학은 국가를 악으로 규정하면서 국가협오주의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푸코가 국가를 악으로 파악하면서 사회를 원형감옥, 즉 팝옵티곤으로 간주하고 기술, 규범이 학교의 공간으로 통해 훈육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테제 속에서는 해방의 지점을 찾을 수 없다는 단점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감옥이라는 테제는 사회화의 측면과 훈육의 과정을 분리해서 겁근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테제 속에서는 모든 사회는 악으로 규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들뢰즈는 무한성 개념은 더 나은 유한성을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유한성을 더 나은 유한성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정치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유한성입니다. 따라서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은 무한성이고 이는 결국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푸코의 정치적 허무주의는 사회 그 자체, 즉 사회화과정이라는 유한성과 지배-피지배의 권력이라는 훈육이라는 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도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회 그 자체라는 사회화 과정과 훈육의 과정을 분리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푸코가 지배-피지배라는 훈육의 과정을 너무나 과도하게 확장하여 접근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시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사회화와 훈륙의 과정, 즉 미시권력과 거시권력의 결합을 통해 연대의 정치학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지배양식의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양식도 균열이 생깁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지배양식이 증폭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의 폭력성이 이미 우리들이 체험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즉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작은 국가가 아니라 물리적, 폭력의 공권력이 가중됨을 의미합니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지배양식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양식을 관철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전반기가 분열의 정치라고 한다면, 68혁명 이후에 지배양식의 분석에 집중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의 과제는 연대의 정치학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성백 선생님은 지배양식을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각각의 지배양식에 대한 분리가 아니라 지배양식의 결합으로 파악하면서 연대의 정치이론을 구축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질에 대한 응답을 적어봅니다. 응답의 내용만 올립니다. 응답을 통해서 질의한 내용을 추론해야 할 것입니다. 정확하게 질문을 적어놓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ㅎ ㅎ



응답의 내용:

1. 푸코와 알튀세르 모두 훈육의 공간을 대학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지식교육과 이데올로기 교육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2. 혁명의 사회적 조건의 연구가 필요합니다. 즉 혁명의 우연성 속에서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성백 선생님이 대중의 혁명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전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ㅎ ㅎ . 하여간 대중들의 욕망의 분출이라는 측면에서 혁명의 사회적 조건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당정치의 한계성과 유용성을 동시에 검토해야합을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저항의 조직화는 20세기 후반기에 신자유주의의 도덕적 타락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의 요국가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사회운동은 진지전을 구축해야 할 것이며, 더더육 대중적 기반의 형성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진지전에 대한 논의는 오늘 정치철학 3강 강좌에서 다시금 정리하고 토론할 것이라고 봅니다.> 대중적 기반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자의 분열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도 요구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다음의 응답으로 넘어가지요.

3. 푸코의 허무주의에 대한 응답입니다. 푸코는 규범의 자기규범,자기준수라는 그리스적 사유를 통해 자신을 로빈슨 크루소로 규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규멈의 자기준수라는 자아의 배려는 객관적 규범이 억압하는 형태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배려는 자율성인데 푸코는 이러한 자율성이 억압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지배양식의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경제적 지배양식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 관계를 착취, 저항의 구조로부터 국가물리력 장치, 정치적 지배양식의 측면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푸코, 들뢰즈는 무의식, 신체, 욕망의 지배양식을 분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 지배양식 중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신자유주의에서는 정치적 지배양식이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내용만 올립니다. 자세한 것은 강의록을 보면서 정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저의 판단도 조금은 삽입된 것은 구분하여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성백 선생님의 강의 내용이 정치이론의 새로운 모색과 연대의 정치학이라는, 무겁지만 고민의 끊을 놓지 말아야하는, 이후 정치철학의 과제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계기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좌를 준비하신 교육부장과 조배준 간사, 그리고 이성백 선생님,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강좌를 열심히 듣고 고민하시는 모든 분들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오후에 뵙지요.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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