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나는 외국 교수의 소매상이 아니다
이병창 2009.09.26 1210
아카데미즘이 가장 애호하는 말이 논증이다. 논증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자주 철저한 논증이 이루어졌다고 허세를 부린다. 하지만 논증처럼 형식적인 절차가 어디 있을까?
물론 논증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 순서로 체계화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쉽게 전달하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므로 논증이 잘된 논문들은 그 내용을 파악하기 대단히 쉽다. 논증은 그 이상의 장점을 지닌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면, 생각의 과정 중에 어디에 허점이 있는가가 분명하게 눈에 보인다. 논증은 생각의 허점을 드러내 주는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의 어떤 철학자도 오늘날 스스로 논증적으로 사유할 능력은 보여준 적이 없다. 만일 그랬더라면, 논증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대체로 한국 철학계에서 논증이란, 어떤 위대한 철학자의 주장을 해석하는 데서 사용된다. 그런데 한국의 철학자는 그 자신이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절대로 금기시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히 건방진 태도로 간주되며, 한국의 철학자 자신이 그런 독자적 해석에 대해 심리적인 공포감을 느껴왔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설명한다면 거세공포 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누가 한국에 살면서(외국에서 공부해본 적인 없는 학자 중에 아카데미가 비난하는 이런 건방진 학자가 간혹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면, 이런 해석은 당장 비-논증적이라고 비난받는다. 비판가의 눈으로 보면 그와 같은 독자적인 해석은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은 대체로 어떤 특정한 개념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체계를 밝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해석하는 개념의 체계가 본래 위대한 철학자의 개념에 들어맞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위대한 철학자의 책으로부터 이런 저런 전거를 끌어내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다 보면, 논문은 전거 인용으로 누덕누덕한 것이 되고, 이런 논문은 읽는 사람에게도 고통스럽다. 이렇게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고 싶어 인용을 줄인다면 또는 더구나 100매라는 논문의 양적 제한이 있으므로, 전거를 충분하게 제시할 수도 없으니까, 결국 그런 사람의 논문은 항상 전거부족이라는 이유로 비-논증적이라고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한국 철학자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외국의 해석자를 끌어 들이는 것이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논문을 끌어 모아 본다. 그러면 동일한 개념에 대해서 이런 해석도 있고, 저런 해석도 있다. 이 경우 대체로 동일한 위대한 철학자에 대한 해석이므로 외국 학자들의 논문들은 서로 공통된 점이 있고, 서로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그러면 논문의 본론 첫 절에 A라는 학자의 주장을 요약 정리한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 B라는 학자의 주장을 요약 정리한다. 그러면 논문은 저절로 논증적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A라는 학자의 주장을 B라는 학자가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에서 한국의 철학자는 양시 양비론을 적당하게 전개하면 된다. 이런 틀을 논쟁적 틀이라 하자.
이런 논쟁적 논문이 과연 논증적인가? 겉보기에는 훌륭하게 논증적인 방식으로-더구나 변증법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전개된 것처럼 보인다. A의 해석을 B가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한국의 철학자가 한 일은 단순하다. 그저 외국 학자들의 논문을 여러 편 요약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논증이 한국의 철학자들이 해왔던 아카데미즘이 아니었던가?
한국의 아카데미즘이 바로 이런 것이기에, 한국의 아카데미즘은 외국으로 유학 갔다 온 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는 그 나라의 언어와 그 나라의 논문들을 잘 알고 있다. 학자들끼리의 상관관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논자 A와 논자 B를 찾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나는 이런 논문들 자체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논문들은 적어도 외국 학계의 논의를 소개하는 장점을 지닌다. 국내 학자들이 철학적 논의의 국제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아카데미즘이 과도하게 전개된 결과는 정말 참담하다. 한국의 철학계가 단순히 외국 학자들의 논문을 소개하는 시장터가 되어 버린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철학계의 논의가 위대한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이차적 해석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국내 학자들이라는 소비자가 없다면, 외국의 학자들의 논쟁이란 아마도 관중 없는 공허한 연극이 되어 버렸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이처럼 외국의 논쟁을 소개하는 논문이 한국 철학자들의 논문이므로, 한국 철학자들끼리 논쟁하는 법은 한 번도 없다. 외국의 해석 논쟁과 관련하여 수많은 논문들이 나오지만, 다 훌륭한 논문들이지만, 그 속에 논자A와 논자 B가 대치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반복적 논문에 불과하다. B가 먼저 나오는가, 아니면 A가 먼저 나오는가 하는 차이 밖에 없지 않을까? 논증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이렇다면 논증적이라는 기준이 한국 철학계의 발전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될까?
여기서 생각해 보자. 외국의 학자들의 이차적 해석 논문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가? 전 세계 해석 논문들을 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의 의무라면 모르겠다. 그런데 왜 특정한 나라의 논문들은 반드시 다 읽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헤겔을 해석한다면, 독일의 헤겔 논문은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 내지 의무 관념이 한국의 헤겔연구자들에게 팽배되어 있다. 도대체 왜 독일의 논문들만은 다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학문한다. 학문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논의의 지평이라는 것은 삶의 지평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국내의 논문을 읽는다는 것은 마땅히 의무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논문들을 읽는 것은 결코 학자의 의무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필자도 헤겔을 연구해 왔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독일의 헤겔 연구가 우리보다 훨씬 나으니까 뭐 도움 좀 얻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나라 것도 기웃거려 볼 필요는 있겠다. 그리고 만일 그가 도움을 받았다면 솔직히 그 전거를 밝혀주는 것이 학자의 양심일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논문을 반드시 다 읽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것도 헤겔이라고 해서 독일의, 콰인이라고 해서 미국의 논문을 다 읽어야 한다면, 이것은 솔직히 식민지적 본성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본다.
헤겔을 공부하면서 독일의 헤겔 논문을 읽다가 나는 절망에 빠졌었다. 처음엔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허우적거리면서 그들의 논문을 읽었다. 그러면서 어떤 논문도 항상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고, 그러면서 몇 년 이 지난 어느날 나는 또 다시 새로운 독일 논문들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절망했다. 그리고 이 많은 시간에 내가 헤겔을 더 철저하게 읽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리고 나는 독일 논문들을 읽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논문을 적게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에 눈이 아직 뜨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절대로 헤겔, 칸트, 하이데거 등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열에 든 사람의 책만 읽고, 절대로 외국의 이차적 해석자들의 논문을 읽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독일인 교수들의 노예나 소매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철학의 기초가 논증이라는 것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논증은 아주 다양한 방식이며, 많은 우리의 사유는 논증을 넘어선 것이다. 굳이 형식적 논증, 논쟁적 방식에 자기의 목을 매달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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