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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평범함, 그것이 감추고 있는 이데올로기-박영균
hanphil 2009.08.19 1079
평범함, 그것이 감추고 있는 이데올로기

박영균(서울시립대)

새로운 시대 문화적 코드, ‘평범함’
이별은 손끝에 있고/서러움은 먼데서 온다/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아침 산그늘 속에/산벚꽃은 피어서 희다/누가 알랴 사람마다/누구도 닿지 않는 고독이 있다는 것을/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저문 산 아래/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김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오늘날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무엇을 떠올리는가? 아마도 여기서 ‘평범한 삶’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평범한 삶’은 일상적인 삶(everyday, daily life)이 재생산되는 그런 삶이며 산다는 것 자체가 평범함을 의미한다. 평범(平凡)의 ‘凡’은 무릇, 모두를 뜻하며 이때의 ‘범’은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이름 없는 甲乙을, 땔나무를 하는 남자와 물을 긷는 아낙네를 의미하는 초동급부(樵童汲婦)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은 생명의 순환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며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그 생명의 희로애락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정서적 교환이 생성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평범함은 이런 식의 평범함이 아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발표한 조사에 의하면 초혼 연령인 31.7살인 ‘평범남’의 경우, 174cm의 키와 4334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졸업자를, ‘평범녀’의 경우, 162cm의 키와 2994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졸업자를 자격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평범함은 있는 것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자격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며 그들은 한 순간에 평범함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들이 제시하는 기준은 남자의 경우 약 1300여만 원, 여자의 경우 약 700여만 원을 상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답변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평범남’, ‘평범녀’라고 말했다.

여기에 오늘날 ‘평범함’이라는 문화적 트렌드가 전치시키고 있는 현실이 있다. 거기에는 이름 없는 갑을도, 땔나무를 하는 남자와 물을 긷는 아낙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평범하지 않다. 아니, 사회에서 이들은 이미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자들로 배제되고 축출된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평범함’의 코드를 생산한다. 평범함을 찬양하는 무수한 글들과 평범함을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평범함으로 자신의 출세욕과 물욕을 정당화하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심지어 노태우의 ‘보통사람들’과 이명박의 ‘평범한 사람’들로 변주되는 정치적 코드화까지 오늘날 ‘평범함’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무슨 기괴한 현상인가? 여기에 오늘날 ‘평범함’이 드러내는 기이하면서 기괴한 평범함의 전치가 있다.

‘평범하다’는 것의 기괴함이 드러내는 진실
‘평범하다’는 것의 기괴함은 지젝이 말하고 있듯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라는 실체를 드러낸다. 그것이 기괴한 것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하며 ‘상상적 동일화’를 만들어내고 ‘상징적 코드화’를 수행한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특정한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맞춘다. 그리고 그 욕망의 코드화를 통해서 실재와 욕망 간의 불협화음, 간극, 틈새를 메운다. 여기에 기괴함이 드러내는 실체가 있다. 특히, 이 설문조사가 결혼정보회사에 실시되었으며 결혼 적령기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사랑이 어떤 코드로 변주되는지가 드러난다.

여기서 결혼은 하나의 ‘거래(deal)’이다. 그러나 결혼이 거래가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거래의 최소조건에 함축되어 있는 그들의 의식이다. 여기서는 중산층이라는 ‘모호함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그것은 모호한 중간의 위치를 ‘중간=중재자, 제3자, 객관, 중용이라는 신화’로 바꾸어 놓는다. 중간은 보편적 형태이며 정상성이며 평범함이다. 그러나 이때 정상성과 평범함은 항상 위로 상승하고자 하는 결핍의 표현임과 동시에 아래로의 하강에 저항하고자 하는 불안의 간극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중산층은 자신의 욕망이 지닌 이중성, 즉 상류층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중산층으로부터 몰락할지 모른다는 불안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중산층이라는 자부심’으로 끊임없이 교묘하게 변주한다.

중산층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 분류에 따르면 중산층은 네 가지 집단, 월평균 가계소득이 420만~499만원인 ‘예비부유층’과 350만~419만원인 ‘전형적 중산층’, 그리고 270만~349만원인 ‘무관심형 중산층’과 200만~269만원인 ‘생계형 중산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중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단은 무관심형 중산층과 생계형 중산층이다. 그런데 무관심형 중산층은 사회적 발전과 성취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생계형 중산층’은 돈, 건강 등 1차적 필요에 종속되어 있는, 사실상 중산층이라고 할 수 없는 집단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들은 위의 ‘평범남’과 ‘평범녀’의 집단에 속할 수 없다. 따라서 중산층의 평범함은 욕망과 현실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 간극을 ‘평범함’의 이데올로기는 봉합하며 감춘다. 그것은 현실적 욕망과 상상적 욕망간의 간극을 봉합한다. 그리고 평범한 삶에 대한 욕구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더 많은 욕망을 누리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의 삶을 복제하는 우리의 욕망, 상품화되고 자본화된 우리 욕망의 실체를 감춘다. 그러나 ‘평범함’의 이데올로기는 더 많이 가짐, 더 많이 누림이라는 욕망의 향유에만 있지 않다. 그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는 가진 자들, ‘특권화된 자들’이 누리는 상층의 욕망을 복제하면서 상층의 소유와 누림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상층’과 상상적으로 동일화시키는 ‘거짓 합치 효과’에 있다.

상층은 그들이 누리는 것을 ‘평범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자신의 특권을 정상적이며 현실적인 것으로 전도시키며 하층은 그 욕망을 복제함으로써 ‘가짐’과 ‘탐욕’이라는 상층의 욕망을 복제한다. 소위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747공약’은 바로 이 욕망의 지평 위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욕망의 배후에서 언제나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몰락의 두려움’, ‘불안’이다.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낳는다. 전자의 결핍은 상승의 욕망이 낳은 결핍이라면 후자의 결핍은 몰락의 두려움이 낳는 결핍이다.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중간층 인구는 1996년 55%에서 2006년 44%로, IMF 이후 지난 10년간 11% 줄었으며 이 감소추세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점에서 중산층의 ‘평범함’은 결코 ‘평범함’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몰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상승하고자 하는 ‘비범함’을 감추고자 하는 ‘평범함’일 뿐이다. 이런 ‘감춤’의 효과는, 그것이 현실 속에서 그 반대의 트라우마를 건들 때 돌출적으로 튀어나온다. 생계형중산층에게 예비부유층을 이야기해보라.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평범하지 못하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누릴 수 없는 자기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의 상처를 감추려 들 것이며 상류층에 대한 비난과 선망의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로 예비부유층에게 생계형중산층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은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근본적으로 다르며 나와 그가 다르다는 근본적인 차별의식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평범함’은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무한 연쇄의 고리 속에서 ‘가짐’이라는 소유의 욕망과 더 많이 가짐이라는 ‘탐욕’을 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지배와 부의 욕망을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문제란 말인가? 만일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면 말이다. 더 많이 향유하는 것, 더 많이 누린다는 것은 언제나 풍요로움, 풍만함을 의미하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풍요로움과 풍만함이 언제나 보다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탐욕스러움이 낳은 풍요로움과 풍만함이라는 데 있다.

결핍을 생산하는 풍요와 ‘평범함’의 역동적 힘
왜 현대인의 평온한 일상은 끊임없이 파괴되는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평온하지 않다. 일상을 엄습해 오는 이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불신과 외로움은 무엇일까? 하늘 아래 더불어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이 근원적 불신은 나를 짓누른다. 그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적자생존의 법칙’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모든 생명계를 지탱하는 원리일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끊임없이 ‘가치와 의미’를 묻는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불어 살면서 맺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러나 현재의 풍요는 이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내가 소유하고 있는 상품들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는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이며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며 행복하지 않다. 아니, 행복해질 수가 없다. 일상의 풍요로움은 끊임없이 ‘결핍’으로 전도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언가 근본적인 악무한의 고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풍요를 ‘결핍’으로 전환시키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코드화이다. 그것은 풍요를 풍요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생산하는 풍요이다. 따라서 그것은 생성의 힘, 자연적 생명력의 다산성을 의미하는 풍요로움과 풍만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을 파괴하는 힘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점에서 풍요 속의 결핍이라는 자본의 코드는 ‘평범함’의 역동적 힘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풍요를 상품화하는 자본의 코드와 단절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애초부터 ‘평범함’을 의미하는 ‘commonplace’는 ‘공통의, 공공의, 보통의’라는 뜻을 가진 ‘common’과 ‘장소, 공간, 입장, 처지, 지위’ 등을 의미하는 ‘place’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평범함은 상품화된 욕망의 코드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눔과 교통에 근거하여 공통의 것을 만들어가는 ‘common’과 생명들의 상호 교감과 생태계적 순환에 근거하고 있는 ‘장소(place)’의 창조에 있다. 그래서일까? 김용택시인은 시의 제목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로 붙였다.

자본이 창출하는 상품 욕망에 포획된 사람들은 모른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 ‘차별’이 아니라 ‘나눔’, ‘개인’이 아니라 ‘공통’을 창조하는, 더불어 사는 삶 자체가 우리의 존재 가치를 실현하며 우리 삶을 창조하는 힘이라는 것을.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그들은 행한다. 왜냐 하면 가짐과 향락이 아니라 자연이나 다른 인간들의 생명과 나누는 존재와의 교감이 자본을 전복시키는 일상의 힘이자 우리 자신의 행복을 생성하는 힘이라는, 단절적인 체험, 반역적 삶을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른 삶을 꿈꾸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일까? 김용택시인은 말한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서고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으며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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