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세상읽기]
2009년 12월 04일 (금) 10:35:24 박영균 서울시립대 HK연구교수 webmaster@mediaus.co.kr
용산은 잠들 수 없는 도시이다. 그곳에는 결코 이승을 떠날 수 없는 ‘목소리 없는 자들’, ‘몫이 없는 자들’의 원혼이 떠돌고 있다. 벌써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도 300일을 훌쩍 넘겨버렸다. 지난 11월 15일이 300일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용산참사에 항의하는 문화제와 집회는 계속되고 있지만 소수만이 이 짐을 질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용산에 무관심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진 욕망이 진실과 대면하는 것을 애써 회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산의 진실은 명박산성으로 상징화될 수 있는 불통과 아집, 그리고 1970년대 권위주의적 폭압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이 진실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청계천과 시청과 광화문의 그 화려한 스펙터클을 즐긴다. 그러나 일상의 삶은 비루하고 경쟁에 지쳐가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과 대면하기에 너무나 지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과 대면하기를 외면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용산의 죽음을 방조할 때, 죽음은 우리를 스스로 파괴하는 거짓-죽음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죽음은 죽은 자의 원혼을 풀어냄으로써 산 자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죽음의 진혼곡을 외면하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부셔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세계의 진실에 직면하기를 거부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자본의 욕망과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과 끊임없는 불안을 생산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을 욕망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윤리’적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한에서 욕망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의 욕망’과 ‘패배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외설적인 아버지’를 불러내고 있다. ‘외설적인 아버지’는 살해되기를 거부하는 아버지이다.
가이아(땅)와 우라노스(하늘)의 아들로 태어난 크로노스는 폭압적인 아버지를 살해했고 제우스는 자신의 형제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를 살해하고 새로운 세계, 상징계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살해된 아버지는 ‘종족의 수호자’, ‘민족의 정기’-법 그 자체, 상징이 되었다. 그는 곧 법이자 규범이며 인간의 윤리적 잣대가 되었다. 프로이트에게 부친 살해는 곧 어떤 규칙이나 규범도 지키지 않는 외설적인 아버지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문명이 생겨났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화하는 자본은 이 문명을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살해되기 이전의 아버지, 법이나 규범, 가치에 구애받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웠던 원초적 욕망의 화신으로서 아버지를 불러내고 있다. ‘747공약’과 ‘부자 되세요’, 그리고 ‘뉴타운열풍’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압승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외설적인 아버지는 한나라당과 이명박으로 상징화되는 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외설적인 아버지를 대변할 뿐이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가짐’이라는 자본의 욕망에 포획된 우리들 자신 속에 있다. ‘청계천’-‘뉴타운’-‘광화문의 광장’-‘한강 르네상스’는 이것을 보여준다.
한강 르네상스, 도시의 판타지와 자본의 욕망
용산참사를 낳은 것은 소위 ‘한강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이었다. 도시재생사업은 새로운 서울, 국제적인 도시이자 오늘날의 환경파괴를 벗어난 쾌적하고 럭셔리한 서울을 창조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이 서울은 결코 생태적이지도 생명친화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생태-이미지를 기술적으로 판타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청계천복원사업’이 그랬듯이 이런 도시재생사업이란 기술적으로 구축된 이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이미지상으로 이와 같은 사업의 결과는 쾌적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지일 뿐이며 실제로는 전혀 환경친화적이거나 생태적이지 않다. 청계천의 물을 끌어오기 위해 해마다 서울시는 연간 8억 7천만 원이라는 돈을 지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복원사업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사업이 되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도시재생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서울만이 아니다. 인천, 아산, 창원, 전주 등, 모든 도시들이 재생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재생사업이란 “산업구조의 변화 즉, 기계적 대량생산 위주의 산업에서 전자공학, 하이테크, IT산업 등 신산업으로 변화된 산업구조 및 신도시 위주의 도시 확장으로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있는 기존 도시를, 새로운 기능을 도입하고 창출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물리적으로 부흥시키는 도시사업으로 재편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도심의 공동화와 슬럼화된 도시를 환경친화적이고 쾌적한 삶의 공간으로 바꾸면서도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도시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전자공학, 하이테크, IT산업 등은 이런 산업으로 각광받는 분야들이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뉴타운 개발과 ‘한강르네상스’를 추진하고 있다. 신개발주의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토건국가라는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이 현상이 보여주는 본질은 자본의 탐욕스러운 욕망이며 그 욕망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외설적으로 풀어내는’ 욕망의 정치경제학에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도 ‘도시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마크 데이비스가 말했듯이 그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국면에서 새로운 국제적 불로소득자들의 순환구조”를 만들어내는, “국제적 금융투기”에 의한 재개발사업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삶의 환경을 이원화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시로부터 축출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가난한 자들은 스펙터클한 도시의 전경 속에서 모습을 감춘다. 봉천동 달동네도, 미아리 집창촌도, 청량리 588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더럽고 추한 쓰레기들이 사라졌다! 대신에 화려한 네온사인과 첨단공학으로 설계된 미래도시가 자리를 잡는다.
신개발주의는 이미지와 상징자본, 문화산업을 끌어들이면서 지역 주민들의 부에 대한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탐욕을 실현하는 자들은 지역의 유지들이며 이미 충분히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공공주택이나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주택을 ‘가로채기’하면서 돈을 불리고 지역발전과 개발을 내세우며 세금과 자원을 자신의 부로 전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강남과 부동산투기, 그리고 각종 소도시들의 축제와 문화적 아이콘들이 바로 이 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청계천과 광화문의 밀폐된 광장에 구현되어 있는 현대기술과 조작된 인공적 세계를 소비하며 즐거워한다.
소비욕망,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욕망은 연쇄적인 파동을 그리며 대중들을 끌어들였고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대세가 되었다. 현대도시는 욕망의 도가니가 되었다. 거대한 부를 소유한 자들의 욕망은 대중의 욕망으로 복제되었다. 그리고 스펙터클 도시의 경관은 자본의 욕망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유동적인 흐름의 공간으로서 도시는 안과 밖이 없는 공간이 아니다. “엘리트들은 자신만의 사회를 형성하여 상징적으로 차단된 자신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부동산 가격이라는 물질적인 장벽으로 자신의 참호를 구축”하며 “전 세계 엘리트들의 상징적 환경들을 단일화하기 위하여 일정 공간형태를 설계하고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한다.
세계적인 것은 그들의 욕망이다. 강남에는 유수한 세계의 다양한 음식점들과 옷 가게를 비롯한 쇼핑몰이 즐비하다. 부자들은 이것을 향유한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에서는 22만 7천명의 새로운 금융백만장자가 탄생했다. 로버트 프랭크에 의하면 그들은 기업을 창업해서 팔아넘기는 기업매각이나 해지펀드, 사모펀드, 벤처캐피탈, 머니매니저, 최고경영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1억 달러가 넘는 5-6만평짜리 호화주택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런 소비욕망을 복제했으며 건설경기가 활성화되고 주택가격의 상승과 더불어 투기열풍이 불었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투기로 벌어들인 돈은 각종 소비의 과열화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0.5%가 1년 동안 쓴 돈은 6천 500억 달러로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지출 규모와 맞먹는다. 그러나 이 소비열풍은 실질소득의 증가율에 비례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상위 1%의 부자들은 1995년에서 2004년 사이에 3천 830억 원의 부채를 떠안았으며 부채가 자산보다 2배의 속도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2008년 모기지론으로 시작된 미국의 경제 위기는 세계 공황의 형태로 세계를 강타했다. 이제,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결국 그 책임을 지는 자들은 우리들이다. 따라서 용산 참사에 대한 우리의 외면은 결국 우리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총체적 빈곤과 희망의 정치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이후, 미국 부자들의 소득은 2000년에 비해 2005년 두 자리 숫자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미국 중산층의 가계 소득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2000년에 비해 3천 달러가 줄어들었다. 또한, 현재 미국의 가장 부유한 1%의 집단은 미국 전체 자산의 33%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위 90%가 가지고 있는 자산보다 더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인구는 가장 가난한 인구 57퍼센트의 수입을 모두 합친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곤화는 이런 부의 상대적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확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빈곤이 총체적이며 절대적이라는 점에 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1/2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생계를 영위하고 있으며 이 중 12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40년 전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사람은 4억 명이었으나 현재는 8억 4,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이런 빈곤화는 총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도시는 사센이나 카스텔이 이야기하는 “한쪽에서는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집단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가치절하된 집단과 쇠락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집단이 끊임없이 분절화되는 이원화되고 양극화된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삶의 공간 자체가 이원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첨단공학으로 설계된 마천루와 타워팰리스의 스펙터클하면서 판타지적인 세계도시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적 빈곤뿐만 아니라 먹을거리와 문화적 결핍이 중첩되어 있는 슬럼의 세계가 존재한다. 제 1세계와 부자들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첨단기술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삶을 친환경적인 쾌적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데 반해 제 3세계와 가난한 자들은 광우병 파동이 보여주듯이 GMO와 ‘LMO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가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장기를 매매하는 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자본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지 않는다. 자본은 자신의 욕망을 복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적 힘과 욕망을 배제하고 통제하도록 만든다.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은 배제된 욕망, 폭력적으로 자신을 짓밟는 권력의 아이콘이다. 그들에게는 윤리나 최소한의 상식이 없다. 용산참사-쌍용자동차파업-언론장악의 프로그램 등 그들의 행태에서 ‘외설적 아버지’는 명증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용산참사 300일 범국민추모대회 참가자 일동은 <용산참사 300일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서 “개발악법을 제정한 입법부, 살인 진압을 자행한 행정부, 유전무죄를 입증한 사법부, 다시 말해서 이 땅 권력자들은 한 몸뚱이였습니다. 삼권분립이 아니라 삼위일체였습니다.”라고 부르짖고 있다. 이처럼 용산참사가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은 생존의 벼랑 끝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힘없고, 빽 없고 짓밟힌 자로서 자신이라는 진실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또한, 거기에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의 정치적 야합 속에서 원칙도 소신도 없는, 오직 돈만이 지배하는 ‘물신주의의 화신’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욕망, 박탈된 욕망이 보여주는 ‘슬픔’과 ‘분노’가 있다. 사람들은 ‘부자 되세요’라는 지배자의 욕망을 복제하면서도 그 복제를 통해 또한 그들에 대한 ‘반역’의 충동을 생산한다. 이것이 왜 욕망이 한편으로 이명박 정권을 만들어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촛불과 같은 저항적 운동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이유이다. 욕망의 역전은 생명의 힘이 지닌 잠재성을 통해서 언제나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용산’에서, ‘쌍차’에서, 그리고 ‘4대강사업’을 비롯한 일련의 독선과 패륜적 사태들에서 사람들은 진실에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희망은 용산참사의 진혼곡을, 그들의 죽음을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로 가져오는, 죽어도 죽지 못한 자들을 다시 불러내어 우리의 미래 속에 새기는 데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생명적 힘들이 만들어내는 저항적 운동들 속에서 자본 지배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정치는 사회적 개인들의 자기 권리와 ‘현실 극복’의 자기 긍정적 권력의지를 생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만일 이 땅에서 진보적인 정치가 사유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생명의 힘을 어떻게 정치적 권력의지로 조직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