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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겔로11 관상학의 가능성
이병창 2015.10.23 83
다시 헤겔로 11 관상학의 가능성
1)관상학의 발전
이제 관찰하는 이성 장의 c절에 이르렀습니다. a절은 사물과 유기체에 대한 관찰을 다루었어요. b절에서는 인간 심리에 대한 관찰 가운데 우선 심리와 외적 환경 사이의 법칙적 관계가 분석되었습니다. c절은 앞의 절에 이어서 인간 심리를 다루지만 이번에는 심리와 신체적 형태 또는 심리와 두개골 사이의 법칙적 관계를 다룹니다. 전자가 ‘관상학’이고 후자가 ‘골상학’이죠.

관상학이라 했습니다만 physiognomik의 번역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자연phsys과 인식 gnomos의 합성어입니다. 사람의 외양을 보고 그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얼굴을 보는 관상학보다 더 포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얼굴만이 아니라 신체 전체를 보는 체형학도 여기에 속합니다. 하긴 관상학이라는 말도 상을 관찰한다는 뜻이니, 얼굴만 보는 것은 아니겠죠. 그래서 관상학이라는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대표적으로 발전한 분야가 얼굴의 모양을 보는 관상학이죠.

서양에서도 관상학의 역사는 오래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관상학에 대해 언급할 정도였으니까요. 근래 역사에서는 헤겔이 태어나기 직전 1772년 괴테의 친구였던 목사 라바터Yohanne Kaspar Lavater가 관상학에 관한 저서를 발간했지요. 그의 저서는 대중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아마 헤겔이 관상학을 <정신현상학>에서 이렇게 상세하게 분석하는 이유도 이 저서와 관련되지 않을까 해요.

관상학이 비록 학문적으로 확립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예술가는 얼굴의 모양이나 신체적 체형을 서술하면서 간접적으로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려 하죠. 상식적으로도 얼굴의 표정이 그의 감정을 표현하니, 이런 표현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서 고정되면, 얼굴의 외적인 형태도 변화되지 않을까요? 나아가서 이런 표현이 모든 사람에게 유사하게 나타난다면, 여기에 법칙적인 관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관상학은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술가의 직관적 서술을 기꺼이 수용하지만 관상학이라는 학문을 수용하지는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농담이지만, 제가 철학과 교수일 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 철학과에서 관상학이나 역학 등을 가르치면 어떨까 하구요. 사회적으로 인기 있으니 학생들이 밥벌이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푸코는 학문이란 국가의 인정을 통해서 성립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관상학이나 역학도 국가 공인기관인 대학에서 가르치면 정식의 학문이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전북의 어떤 대학은 대학원에 도학 전공을 두고, 동양에서 발전된 이런 분야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요즈음 제 주변에도 보면 개인적으로 관상학이나 수상학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뭔가, 가능성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왜 학문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걸까요? 관상학이 나온 근거나 그것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헤겔을 능가하는 글을 본 적이 없으니, 헤겔을 통해 이런 문제에 접근하여 보기로 하죠.

2)얼굴의 중요성
헤겔은 우선 내적 심리와 외적인 환경 사이에서 법칙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실패에 이르자, 이성적 관찰은 한 걸음 물러나서 내적인 심리와 신체의 외적인 형태 사이에서 법칙적 관계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이런 발전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헤겔이 이런 식으로 서술한 이유는 아마 논리적인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앞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가운데 설명됩니다. 그때 가서 설명하도록 하죠.

우선 관상학의 개념을 정리해 보죠. 개체는 이중성을 지니죠. 내적으로는 심리가 작용하고, 외적으로는 신체적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신체는 심리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선 신체적 형태는 대부분 타고나는 것, 유전적인 것에 속하죠.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신체는 즉자적인 an sich 존재이죠.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적 형태는 스스로 형성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주름이 많아요. 주름은 근심걱정의 표현이 굳은 것이 아닐까요? 또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은 얼굴 자체가 항상 웃는 상이에요.

“이런 존재, 특정 개체성이 지닌 신체는 개체성에게 근원적인 것이며, 그에게서 비형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체는 그가 형성한 것뿐이니, 그의 신체는 역시 그 개체에 의해 산출된 자기 자신의 표현이다.”(172쪽)

이런 이중성 가운데 후자의 측면이 있으므로, 신체는 이제 자기 자신의 내적 심리의 상징이 됩니다. 우리는 그 형태를 보고, 그의 내적 심리를 파악하게 되죠.

“신체는 동시에 상징이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사물sache로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다만 그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개체는 자기의 근원적인 자연을 산물Werke로 만들었기 때문이다.”(172쪽)

관상학에서 얼굴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굴이야말로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내적 심리를 표현하는 상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 결과 다른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의 형태보다 얼굴의 형태가 심리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부분이 되죠.

얼굴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다보니, 들뢰즈가 말한 얘기도 생각납니다. 그는 ??시네마??라는 책에서 얼굴이 심리를 표현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거론합니다. 그는 얼굴은 반반하다고 합니다. 그 반반함이란 일종의 지워짐, 헤겔적인 표현으로는 자기 부정성이죠. 즉 얼굴은 마치 기호처럼 더 이상 직접적인 사물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죠. 들뢰즈는 그래서 사물도 이렇게 반반하게 되면, 심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반반한 시계에서 표정을 읽는 경우도 많죠. 추상미술이 색을 평면화하는 것도 이런 반반함에 도달하려는 것 때문이 아닐까요? 여성이 얼굴을 햐안 분으로 떡칠해 버리는 이유도, 얼굴의 반반함에 도달하려는 이유가 아닐까요? 이렇게 떡칠해 놓으면 얼굴은 기호로서 더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되죠. 그런 하얀 얼굴에 여성은 자기가 원하는 의미를 그려 넣습니다.

관상학에 대한 헤겔의 논점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관상학이 일종의 기호 해석론이라는 것이죠. 생각해 보면, 배우나 무용가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도 자신의 신체적 형태나 얼굴의 표정을 통해 일정한 의미를 전달하려 합니다. 이렇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체의 어떤 형태가 이미 객관적인 기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주먹을 쥐고 팔을 올리면 누구나 이것은 저항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죠. 관상학이란 이런 의미를 인식하는 일종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되죠. 관상학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훌륭한 학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3)관상학의 출발점
신체에서 자연적이거나 유전적인 측면은 관상학과 관련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신체에서 형성된 부분은 내적인 심리와 관련되니 관상학에서 논의되는 직접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심리적 내용에 따라서 특수하게 형성(“Ausdruck seiner durch es selbst gesetzten Verwirklichung, die Zuege und Formen seines selbsttaetigen Wesen”(172쪽)) 되죠. 신체는 이런 두 가지의 통일체 즉 “미형성된 것과 형성된 것의 통일체”이죠.

신체를 형성하는 내적인 심리에도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의 측면은 내용적으로는 외적 상황에서 나오는 특수한 것이고, 형식적으로 자기활동적인 것이지만(die formelle, inhaltlose oder unbestimmte Selbsttaetigkeit)이죠. 또 하나의 측면은 내용상 본래 유전적으로 타고난 내용(ans sich bestimmter urspruenglicher Charater)을 가지고, 형식적으로는 단순한 활동성(die Taetigkeit)이라는 형식을 지닌 것입니다. 여기서 헤겔은 전자의 경우 형식은 ‘자기 활동성’이라 하고, 후자의 경우 그 형식은 단순한 ‘활동성’이라 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헤겔이 논의를 더 이상 전개하지 않기에 그 차이는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유전적이냐,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것이든 형식적으로는 활동성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관상학은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를 굳이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나중에 나오는 골상학과 관상학의 차이입니다. 골상학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심리가 두개골의 형태에 반영된다고 보지요. 반면 관상학은 개인의 내적 심리의 특징이 문제이지, 그게 타고난 것인지, 외적으로 주어진 것인지는 구별하려 하지 않습니다.

관상학의 개념은 앞에서 말했듯이 내적 심리가 외적인 형태 속에 표현된다는 것, 즉 외적인 형태가 내적 심리의 기호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상학에 대한 비판에 나서기 전에 헤겔은 우선 이런 관상학이 어떤 동기에서 시작되었는가를 분석합니다.

신체는 우선 행위의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내적인 것(욕망, 의도)을 가시화하거나(sichtbar machen) 대타화(zu einem Sein fuer anderes machen)합니다. 예를 들어 입은 말하는 도구이고, 손이나 발은 노동하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내적인 것은 스스로 행위를 촉발시키는 원인이니, 이를 ‘활동성 자체’라고 한다면, 신체라는 도구는 이런 활동을 전달하는 것이니 ‘활동으로서 활동’에 해당됩니다. 이런 수단을 통해 표현된 결과가 말과 노동산물과 같은 ‘행위’입니다. 도구로서 신체는 개체로부터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그 결과인 행위는 개체로부터 분리가 가능하죠.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행위는 “전적으로 탈자화된 내면das Innere ganz ausser sich kommen"입니다.

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내면과 외적 결과 사이의 관계를 두고서 헤겔은 ‘과도와 과소’라는 두 측면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과도하다- 왜냐하면 내면적인 것 자체가 이런 표현들 속에 표출되기 때문이며, 내면과 그 표현들 사이에 어떤 대립도 없기 때문이다. 표현은 내면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과소하다-왜냐하면 내면은 언표와 행위 속에서 자기와 다른 것으로 되기 때문이며, 따라서 변화의 지반에 희생된다. 이런 지반은 언표된 말이나 수행된 행위를 전도하여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든다.”(173쪽)

이렇게 전도되는 이유는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의 이유는 외면성 때문에 타자가 개입하게 되고, 그 결과 지속적인 것으로 머무르지 못한다는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타인이 그 의도를 왜곡하는 경우이죠. 다른 이유는 이 결과는 개체와 분리된 무차별한 외적인 것이니, 개체 자신이 의도적으로나 서투르기 때문에 내적인 것과 다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왜곡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내면과 외적 행위 사이의 ‘과도, 과소’의 관계를 놓고 본다면, 산출된 결과는 내적 개체성의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그 표현이 아니라는 이중성을 갖게 됩니다. 헤겔은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은 내적인 것의 진실한 표현을 찾으려 하며, 그 결과 외적인 행위를 버리고, 동시에 내면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가능성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행위의 수단인 신체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내면이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하게 됩니다. 즉 신체가 내면의 상징, 기호가 되는 것이죠. 이것이 관상학의 출발점이죠.

“이런 이중성 때문에 우리는 내면이 변함없이noch 그러나 개체 자체에서 가시화되거나 외면화되는 방식을 찾으려 한다.”(173쪽)

4)기호로서 신체
관상학에서 외적인 형태는 ‘고정된 전체ruhende Ganze’로서 신체를 말합니다. 이 형태는 내면을 표현기 위해서 전적으로 수동적(Passives Dasein)이 되어야 하죠. 이런 수동성을 통해 신체적 형태는 기호Zeichen이 됩니다.

여기서 수동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짐작됩니다. 기호란 그 자체의 물질적 현존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직 내면이 표현되는 매체로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이런 것을 헤겔은 수동적 현존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얼굴의 반반함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헤겔이 들뢰즈의 말을 선취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더 있습니다. 헤겔은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내면과 표현하는 기호 사이에는 우연적인 관계만 있다고 말합니다. 기호가 지닌 이런 우연성을 헤겔이 강조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언어학은 헤르더와 같은 학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헤르더는 기호가 의미에 대해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괴테의 상징주의도 그 뒤의 낭만주의적 언어관도 이런 본질주의적 기호론에 기초하고 있죠. 그런데 헤겔은 나중에 소쉬르와 같은 구조주의에 의해 확립되는 주장을 즉 기표와 기의 사이의 우연적 관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헤겔이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기표의 변별적 관계를 이해했는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연성을 발견했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기호Zeichen.. 외적이고 우연적인 표현이며, 그것의 현실적인 측면 그것만으로는 무의미하다. 이것은 하나의 언어로서, 그 음성이나 음성의 결합체는 중요한 것die Sache selbst가 아니며, 오히려 자유로운 자의Willkuer를 통해서 언어와 결합되고, 언어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다.”(174쪽)

이런 기호의 우연성은 신체가 내면의 표현일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내면적 심리(이 심리를 더 일반화하면 개인의 ‘성격’이 되겠죠)와 신체적 형태 사이의 기호적 관계는 단순히 외적인 것들이 상호 갖는 관계와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점성술이나 손금 등은 그런 전적으로 외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탄생의 별과 나의 운명, 내 손의 금과 나의 운명은 전적으로 무차별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이죠.

반면 관상학에서 신체적 형태와 내면적 심리의 관계는 우연적입니다만, 그래도 어떤 필연성을 지니죠. 이 필연성은 자연과학적 법칙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약정적인 필연성’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즉 신체의 어떤 형태가 지닌 의미는 사회적으로 약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약정은 물론 의식적인 합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합의의 산물이죠. 문화적 산물의 대부분은 이런 무의식적 합의의 산물입니다. 일단 문화적으로 이렇게 약정이 되면, 기호의 의미는 객관적이 됩니다. 적어도 그 문화권 안에서는 보편적이 되죠. 그러므로 한 문화 내부에서는 신체적 형태의 의미의 해석은 일종의 정의를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건 동어반복이고 분석적인 명제가 되죠. 그런 점에서 필연성을 지니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 문화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지 굴복을 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서양 문화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굴복을 의미하죠. 이것은 그저 약정의 문제일 뿐이고, 어느 나라에서나 그것은 일종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 나라의 문화에서 그런 것은 항상 그런 의미로만 사용될 뿐입니다.

이런 약정적 관계는 비록 우연적이기는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어떤 근거가 존재하죠. 예를 들어 금이 다른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 즉 화폐가 되는 것은 우연입니다. 조개나 은, 아무 가치가 없는 지폐도 이런 화폐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금이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화폐로 사용되는 데에는 금이 화폐로서 어떤 적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5)관상학의 근거
그러므로 관상학의 기호적 관계는 비록 우연적이지만 어떤 근거를 가집니다. 이 점은 전적으로 무차별한 관계인 점성술이나 수상학과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예를 들어 수상학에서 손금을 가지고 사람의 운명(길흉화복)을 판단한다고 해 보죠. 이 경우는 전적으로 우연적이죠. 굳이 근거를 따지자면 손이 노동의 도구이고, 노동이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내지, 손과 운명이 연관된다고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자의적인 연결이죠. 실제 길흉화복은 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니, 손이 노동의 도구라고 하더라도, 그가 손을 어떻게 다룰지 알 수 없는 한, 손을 보고 미리부터 그 운명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손금은 손을 보고, 또는 손의 형태를 보고 그 운명을 미리 판단하는 것이죠.

그런데 관상학은 다릅니다. 여기서도 손의 형태를 봅니다. 손은 노동의 도구로 사용되는데, 이런 노동의 흔적이 ‘신체 자체에서an ihm’ 각인될 수 있죠. 예를 들어 농부의 손은 거친데, 그것은 손을 통한 농부의 노동이 손에 그 흔적을 남긴 것이죠.

“신체 활동의 기관이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존재 속에 내화되어 있는 활동이므로, 또는 달리 말하자면 내면의 즉자존재 자체가 그 기관에서 현현하고 대타 존재를 가진다는 이런 규정을 통해 볼 때, 이전(점성술이나 수상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런 신체 기관을 볼 수 있다. 신체 기관이 일반적으로 내면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입증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위에 말한 규정에 따라서 또한 기관은 양자의 매개로 간주될 수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활동이 그런 기관을 통해서 현현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 동시에 그런 활동의 외면성을 이루고 그것도 행위와 다른 외면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외면성은 개체에게 그리고 그것에 접해서an ihm 머무른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매개이며 동시에 통일이 이제 무엇보다도 스스로에서 외적으로 된다. 그러나 그때 외면성은 동시에 내면속에 받아들여진다. 이런 외면성은 단순한 외면성이고 분산된 외면성에 대립한다.”(175쪽)

여기서 헤겔이 신체라는 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외면성 즉 분산된 외면성 외에 신체 자체에 외면성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 신체 자체에 형성된 외면성, 그게 바로 내면이 흔적 또는 각인으로서 신체적 형태를 말하죠.

이런 흔적 때문에, 신체적 형태는 어떤 내적 심리를 표시하는 기호로서 적합하게 됩니다. 농부의 거친 손은 농부의 내면을 표현하는 기호가 됩니다. 농부의 내면과 거친 손 사이에는 우연적이지만, 그 손에 내면의 흔적이 있으므로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아니죠. 하이데거는 고흐의 그림을 논하면서, 농부의 신발을 농부의 내면을 표시하는 기호로 사용했습니다. 그 농부의 내면이 곧 농부의 존재이고, 신발은 이 존재의 한 부분, 또는 그 존재의 흔적이기에 기호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농부의 신발이 이처럼 기호로 사용될 수 있다면 농부의 거친 손이나 주름진 얼굴, 까맣게 탄 얼굴 등 어느 것도 농부의 내면을 표현하는 기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흰 손, 기름진 얼굴 등도 하나의 기호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농부의 내면을 표현하는 기호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겁니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전적인 우연적 관계만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만 해도 기표와 기의 사이에 지시체를 넣죠. 이런 지시체와 기표가 연관을-유사성이나, 지표이거나, 인과적 관련-을 지니기에 기의를 지시할 수 있다고 합니다. 헤겔 역시 관상학도 법칙적 필연성은 아니더라도 이런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가 헤겔을 연구했던 철학자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제임스의 기호론과 헤겔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관상학이 성립합니다. 이 관상학은 기호론이고, 그 근거는 신체가 내면을 표현하는 중에 그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체 기호론으로서 관상학이 전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손의 단순한 특징, 언표의 방식의 개인적인 규정성으로서 목소리의 울림과 퍼짐..서체 특히 손으로 쓴 서체- 이 모든 것은 내면의 표현이다.”(175쪽)

이제 신체가 이렇게 내면의 각인이 되어 기호로서 사용되면서, 손과 입과 같은 신체적 도구뿐만 아니라 얼굴이나 다른 신체적 형태(예를 들어 꼿꼿하다든지 하는 자세)가 이런 기호로 사용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얼굴이나 형태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산출하지 않는 운동이고 형식”이지만 그럼에도 흔적이나 각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얼굴이나 그런 형태는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즉 “개체에게 억제되어 머무르는 활동(das zurueckgahaltene an dem Individuum bleibende Thun)”에 지금까지의 활동에 대해 감독하거나 관찰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일종의 자기반성적 역할이죠. 다시 말해 “행위를 하면서 그 행위를 반성하는 활동(Auesserung als Refelxion ueber die wirkliche Auesserung)”(175쪽)입니다. 그러므로 손의 형태가 노동의 직접적인 각인이라면 얼굴의 형태는 반성적 능력을 각인하게 되죠. 만일 인간을 평가하는 데서 자기의식적인 정신이 중요하다면 손보다 얼굴을 보아야 하겠죠. 관상학에서 얼굴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론적 활동이나 이에 대한 개인의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타인에게도 감지될 수 있으니, 왜냐하면 그 언어는 스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175쪽)

얼굴의 표정을 헤겔은 “표현되는 속에서도 내면에 머무르는 내면”(176쪽)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반성적의 표현이라는 말이죠. 얼굴이 이렇게 자기반성을 표현하기에 이제 얼굴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이나 행위하는 것에 대해 그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그가 정말 성실한지 아닌지는 관상을 통해 드러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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