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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 대한 오해와 우리시대의 리바이어던
채진원 2006.10.15 2810
괴물에 대한 오해와 우리시대의 리바이어던


채진원(2006.10.15)

2006년 한국의 봉준호 감독이 <괴물>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Hobbes, Thomas, 1588∼1679)는 자신의 근대 민주주의적 국민주권사상을 집약한 책제목으로 《구약성서》<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환상의 괴물인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을 사용하여, 자신의 진보적 사상과는 무관하게 당시대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현재까지 손해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제한할 수 없고, 개인의 힘만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는 홉스의 생각은 소위 성악설에 근거한 사회계약론으로, 전제군주제나 독재 그리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것으로 오해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홉스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을 흔히 성경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괴물이고 이는 절대권력과 권위를 가진 절대군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홉스의 생각은 이와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오히려 그런 괴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절대적인 신, 현실의 지배자인 왕과 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당시 민중의 열망처럼, 새로운 민주적인 국가, 즉 명실상부한 국민주권 국가의 이미지가 홉스가 꿈꾸었던 리바이어던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본래의 뜻과는 달리 부정적인 이미지로 오해를 받아왔던 것일까? 또 그렇다면, 1987년 민주화운동이후 우리사회에서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국민주권의 원리에 따라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하는 요즘, 리바이어던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람은 사람에 대해 이리”이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이, 민주화이후 우리시대의 갈등과 정쟁의 고통을 집약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우리시대의 과제인 갈등과 정쟁을 치료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리바이어던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할까?를 탐색해보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홉스에 따르면 국가 구성 계약(협약)에 의해 개인들의 무한정한 이기심과 투쟁적 본성을 통제할 공통의 힘이 창출되고, 계약(협약)의 체결은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들을 완전히 양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국가조직에 힘을 부여하는 것,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국가조직을 탄생케 하는 바로 원초적 사회‘계약’임을 알 수 있다. 즉, 만인이 수락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그리고 자연상태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국가권력은 원초적 사회계약 이전부터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약(협약)에 의해 그리고 그 계약(협약)의 체결과 동시에 등장한다.

홉스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약(협약)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홉스가 사용하는 계약(협약)에 대한 원어는 convenant인데, 이것은 contract로 번역되는 ‘계약’이 아니라는 점에서 ‘협약’․ ‘약속’․ ‘합의’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웹스터 유사어 사전』에 의하면, convenant가 “통상적으로 공식적이고 엄정하며 구속력 있는 합의”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서, 홉스가 사용하고 있는 계약(협약)의 개념은 계약을 맺는 사적 이해관계자들간의 단순한 타협수준이 아니라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공적질서인 국가의 창설과 이렇게 합의와 협약으로 만들어진 국가에 대해 계약자들의 절대 복종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의 정당성과 힘은 바로 계약자들 사이에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합의와 협약 그 자체에서 나온다. 국가의 권위와 권력은 국가를 창출할 때 협약의 매체인 ‘말의 힘’에서 왔기 때문에,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의 실체는 폭력(violence)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에 의해서 구성되고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J. Habermas)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론장’(public sphere) 또는 ‘의사소통적 권력’(communicative power)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렌트(H. Arendt)의 표현을 빌리면,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개념의 분명한 구별일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의 대립물은 결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흔히들 \"권력이라는 것이 곧 폭력\"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폭력의 대립물은 권력이다. 따라서 폭력과 권력은 다르다. 폭력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목적을 통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power)은 폭력(violence)과 다르게 행위(action)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에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므로, 권력은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함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할 때, 생겨나는 잠재적인 약속의 힘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 그 권력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권력을 폭력 수단으로 필사적으로 만회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권력은 이미 권력이 아니며, 아무런 정당성도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평가가 그의 생존시는 물론, 사후 오랫동안 호의적이지 못하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재검토되는 이유는 그가 살았던 격변의 시대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질적으로 다르긴 하더라도, 이념간의 대립, 계급간의 대립, 이익간의 대립, 세대간의 대립, 지역간의 대립을 넘어서 사회통합을 이루고,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지닌 시민들이 공론장에 참여하여 말과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여 국민통합이라는 리바이어던을 창출하고 싶은 강력한 열망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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