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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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모른다
이병창 2013.11.07 307
통진당 해산심판 청구라는 반민주적 폭거;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자유주의자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1)악마의 발톱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의 해산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이미 입을 맞춘 듯이 즉시 보수와 중도(민주당, 안철수) 쪽은 동일한 반응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차분하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 보자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조작된 내란음모 사건이 발생하자 일부 진보 쪽에서 주장했던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은 진보도 헌법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미 그때부터 해산심판 청구는 정해진 길이었다.



보수와 중도 그리고 헌법안 진보들의 태도를 언뜻 보면 무척이나 차분한 대응이라서 의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차분한 대응은 악마의 발톱을 감추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그들의 차분한 대응이 음흉한 냉소가 아닌가 하고 느껴진다.



우선 생각해 보자. 과연 법이 정당의 해산을 심판할 권리를 가지는가? 무슨 말이냐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을 심판할 권리가 부여되어 있지 않는가? 그러니 법이 심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왜 그런가?



2)도덕의 자유

유사한 예를 들어 보자. 법은 도덕을 심판할 수 있는가? 물론 최근까지 법은 도덕 위에 군림해 왔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도 성적 소수자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많은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법이 도덕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일반화되고 있다. 도덕은 어디까지나 법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덕이 아직까지도 법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도덕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차원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법적인 제약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19세기 독일의 법 철학자 옐리네크는 법과 도덕의 관계를 간명하게 정리한 바가 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며 또한 최대한’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 가운데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최소한만을 법적으로 제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최소한의 영역에서 법은 강제적인 폭력을 통해 도덕을 보호하는 만큼 법이 사용하는 수단은 도덕적 수단의 극한 즉 최대한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옐리네크의 주장은 법이 도덕의 영역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야 한다는 데 그 본래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왜 법이 이렇게 도덕의 영역에 개입하기를 자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법은 과거의 가치이다. 반면 도덕은 미래의 가치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변화에 따라서 그 시대의 도덕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일 법이 도덕을 제약한다면 과거의 가치를 가지고 미래 사회의 삶을 제약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에 맞는 새로운 도덕이 창조적으로 출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19세기 억압적인 도덕률로 오늘날의 청년들의 삶을 규제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그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창조적 문화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도덕에 관하여 법이 개입하는 것을 배척하고 도덕은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으로 넘기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도덕의 자유이다.



3) 정당의 자발적 생성

마찬가지이다. 법과 정치의 관계도 법과 도덕과 동일하다. 기본적으로는 법은 정치에 관여할 수가 없으며 또한 관여해서도 안 된다.



정치는 인민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민의 의지는 사실 알기 어렵다. 그것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민의 의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고 말해진다. 필자는 김대중 선생이 한 말 \정치는 곧 생물이다\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 말은 인민의 의지가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정치적 형식 가운데 인민의 의지를 찾아내는 데 가장 적절한 방식이 민주주의이다. 대다수 대중들의 선택을 통해서 인민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주주의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당의 문제이다.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의지는 대중들의 선택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대중들의 선택은 현실적인 민주주의에서는 정당에 대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정당이란 미리부터 인민의 의지를 일정한 방식으로(즉 선험적으로) 표현한다. 대중들은 이렇게 정당들을 통해서 표현된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만일 대중들이 선택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정당들을 통해서 미리 표현된 것이 없다면 대중들은 선택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인민의 의지는 이런 경우 왜곡된 방식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 정당이란 자발적으로 생성되어야 하며 또한 다양성을 지녀야 한다. 정당이란 좌에서 우로 펼쳐지는 다양성 속에서 자기의 의미를 그것도 다른 정당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지니게 된다. 만일 이런 자발적인 다양성이 없다면 인민의 의지가 왜곡되고 정당조차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그것은 민주주의 질서 자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마치 생물학적 진화론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화의 경우에도 생물은 종적인 다양성을 만들어 놓는다. 이런 다양성이 있기에 환경의 새로운 변화가 있을 때 이런 변화에 적절한 것들이 선택되면서 종의 지속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민의 의지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므로 그것에 따라서 정당도 자발적으로 새로이 출현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다양해야 한다. 만일 이런 영역에 법이 개입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정당은 되고 저런 정당은 안 된다고 법이 미리 정한다고 생각해 보자. 법은 현실이므로 이런 제약은 항상 현실을 보수적으로 옹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윽고 정당의 다양성은 사라질 것이며 자발적 생성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법이 나서서 정당을 제약한다면 결국 인민의 의지 자체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게 될 것이니 민주주의라는 형식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4)헌법재판소

물론 도덕이 자유이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있으므로 법이 최소한의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듯이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정당의 생성은 자유이다. 그러나 정당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법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정당에 대한 법의 개입은 자칫하면 인민의 의지를 왜곡시켜 민주주의라는 질서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법이 정당의 자유를 얼마만큼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법은 형법의 한계 내에서만 도덕에 개입한다. 즉 도덕적 행위가 타인에게 실질적인 침해를 주었을 때만 제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은 형법의 한계 내에서만 정당의 자유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일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집단적인 결정이 발생될 때 또 정당의 이념이 아니라 그것이 정당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한에서만 법이 개입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진보당 내에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하여 지금 조작된 내란 음모의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백번을 양보해서 그들이 앞으로 재판에서 유죄가 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진보당 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당이 집단적인 결정으로 내란을 음모하지 않은 한 진보당 자체가 그들에 대해 책임져야 할 필요는 없다.



또 예를 들어 보자. 진보당의 강령을 생각해 보자. 지금 문제는 ‘민중이 주인이 된다’는 표현이라든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이다. 유감스럽게 이 자리에서 그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필자는 이런 표현들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상식을 의심한다. 하지만 정말로 억지이지만 이런 표현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표현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념의 문제일 뿐이다. 이념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법은 마음속에 있는 관념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당의 이념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누리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법이 이념에 제약을 가하면 정당의 자발적 생성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면 항상 현재의 현실을 옹호하는 정당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인민의지의 약동적인 변화를 민주주의가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을 심판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정권이 정당을 함부로 해산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정당 심판기능은 그것이 존재하지만 실행되지 않음으로써만 의미를 지니는 법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정당의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신청하는 행위 자체는 지극히 제한적으로만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정당의 행위에 대한 형법의 판단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한 신청이다. 그러므로 형법의 판단도 없이 정당의 해산을 심판하여 주기를 청구한 행위는 그런 행위 자체로 이미 반민주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중도, 헌법안 진보는 차분하게 그 판단을 기다려보자고 한다. 그들의 차분함이란 냉혹한 미소이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모양만 붕어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이든, 중도이든, 아니면 헌법안 진보이든 모양만 자유이다. 자유주의를 자처하는 그들은 정작 자유라는 개념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당의 자유를 부정한다.



자주 진보당을 해체하려는 음흉한 자들은 겉으로 민주주의를 가장해서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당은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제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어디까지나 어떤 정당이 형법적으로 즉 집단적으로 실제 행위를 통해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한에서만 타당하다.



옛날 박정희의 공화당을 생각해 보자.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통해 당선된 이후 유신을 선포했다. 따라서 공화당은 미리부터 해산되었어야 했다. 현재 새누리당 역시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 반민주주의적인 탄압을 서슴없이 실행한다. 따라서 위의 주장에 따라서 해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보당은 아니다. 진보당은 한 번도 실제 행위를 통해 당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심지어 이념상 즉 마음으로부터도 민주주의를 부정한 적이 없다. 다만 반민주주의적인 탄압을 받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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