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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교만한 자들의 왕, 그 새로운 리바이어던의 탄생-박종성
hanphil 2009.08.19 1021
교만한 자들의 왕, 그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탄생

박종성(방송통신대학교 강사)


다시 태어난 리바이어던
반 년 전 용산의 참사, 그리고 평택 쌍용차 노동자의 77일간 투쟁, 여기에는 모두 국가의 폭력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국가의 “폭력” 문제를 다시금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다른 사람의 의도에 반해 특정한 이해관계의 관철을 위해 강제수단을 행사하는 ‘폭력(Gewalt)’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주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베버는 근대국가가 폭력을 독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권력으로서의 폭력이 특정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치적 강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와 가치를 옹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의 탐욕이 생산하는 부산물은 인간을 생존의 벼랑으로 몰아가며 사람들은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의 폭력은 보다 전면화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근대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살인이 다른 어떤 살인보다도 많았다. 따라서 국가의 폭력에 대한 독점은 반인간적인 폭력을 낳는다.

  그렇다고 모든 폭력이 반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은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폭력의 두 가지 성격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맑스가 말하는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 역할을 하는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퇴행을 지향하는 반동적 폭력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폭력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본의 이윤과 불가분의 관계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폭력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저항하지 못하는 인민의 복종
  일찍이 홉스는 근대국가의 절대적 폭력성을 『리바이어던』에서 정당화했다. 그는 ‘공화(republic)’, ‘공적 부(commonwealth)’ 등으로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명박 정권은 ‘국가경쟁력’, ‘부자되세요’라는 구호 속에서 21세기 한국의 ‘리바이어던’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의 홉스적 광기를 보는 듯하다. 홉스는 통치자를 리바이어던에 비유하면서 <욥기> 제41장의 마지막 2절(33-34)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위는 그것과 겨룰 만한 것이 없으며, 그것은 처음부터 겁 없는 것으로 지음을 받았다. 모든 교만한 것들을 우습게보고, 그 거만한 모든 것 앞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 하느님은 이 리바이어던의 강력한 힘을 “교만한 자들의 왕”이라 일컫는다. 한국에서 새롭게 태어난 리바이어던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우리는 국민에게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홉스에 의해 처음으로 사회계약적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다. 이것이 홉스가 말하는 ‘사회계약’ 이론의 정치철학이 갖는 중요한 의미이다. 그러나 문제는 홉스가 정당화하는 사회계약은 오히려 그 출발점이었던 자연권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권력이 된다는 점에 있다. 리바이어던은 ‘공공’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와 삶을 통제하고 군림한다. 원초적인 신의 계약(covenant) 으로서 ‘주권’은 ‘교만한 자들의 왕’에게 양도되며 ‘주권’은 그 왕에 의해 절대적으로 행사된다. 따라서 ‘주권’의 원천이었던 개인들은 오히려 그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소위 ‘국민(subject)’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통제권력 안에서의 개인들일 뿐이다.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폭력의 형태로 자신의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네 삶을 갉아먹으며 살아간다.

  홉스는 보상과 처벌을 리바이어던의 수족과 관절을 움직이는 신경과 힘줄과 같은 것으로 비유했다. 홉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은 절대적 주권자이기 때문에 이 주권자에 대한 어떤 항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인민 복종의 의무만이 허용될 뿐이다. 예를 들어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26일 시국선언에 참여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 1만 7천여 명 모두를 해임, 정직, 주의 등 징계하겠다는 선언한 것이나 행정안전부가 8월4일 지난 달 19일 ‘민주회복 민생살리기 2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공무원 16명을 검찰에 고발하고 105명을 소속 기관에 중징계하도록 요청한 것 등이 그렇다. 징계의 사유는 간단하다. 집단행위 금지 규정과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등. 여기서 국민은 리바이어던이라는 절대적 주권자에게 복종을 전제로 안전을 보장 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리바이어던은 모든 국민의 복종을 요구하면서 홉스조차 인정한 최소한의 생명 보호와 안전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다.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현 정권의 폭력성은 노동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의 단적인 예가 바로 77일간의 투쟁으로 끝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다. 폭력은 대다수 노동자들, 쌍용차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심지어 현 정권은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를 9월에 정부입법안으로 발의하여 노사관계를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리바이어던과 자본에 복종하는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바야흐로 국가 폭력에 의한 공포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인민의 주권, 그 저항권을 위한 역사적 투쟁
  모든 지상의 것들 중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없는 리바이어던, 그러나 언젠가는 그 생명이 다할 리바이어던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민의 주권이다. 왜냐 하면<왜냐하면> 맑스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에 대해 신하로서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바이어던이 지우고자 하는 권력의 근원은 삭제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미 외세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통일 조국을 이루기 위해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법과 명령의 근원이 ‘국민의 목소리(vox populi)’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왜곡된 현실의 마키아벨리즘, 즉 폭군적 전제정치를 이어받은 현 정권은 마키아벨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조국, 영광, 힘을 국가, 자본, 폭력이라는 삼위일체의 관계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맑스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거꾸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하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 바로 그 믿음을 전도시켜야 한다. 한 번의 선거로 선출되는 투표 행위가 곧 이명박 대통령의 모든 권력 행사를 정당화한다고 믿는 믿음 그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자신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인민의 실천적 의지를 통해서만 수호될 수 있다. 그러나 인민의 실천적 의지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생산 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이미 생성되고 있다. 반역은 음모가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자들의 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권력이 자신의 토양을 잃어버릴 때, 권력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백성이 없다면 군주는 없으며, 국민이 없다면 국가는 없다. 또한, 사람들 간에 사회적 협력이 없다면 부 또한 없다. 이것이 바로 자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교만한 자들이 잊고 있는 진리이다. 국가의 목적이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있다”는 홉스의 주장은 외면하고 오직 리바이어던만을 숭배하는 교만한 자들의 왕이여!, 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모든 지상의 피조물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죽게 마련이고 쇠퇴하게 마련”이라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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