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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창 2014.02.14 289
이병창 칼럼] 강기훈 무죄 선고, 법정에서 절망한 이유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입력 2014-02-14 07:44:13l수정 2014-02-14 08:38:32기자 SNShttp://www.facebook.com/newsvop

1) 철학적 운명



이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중의소리 K기자가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재판정에 한번 갔다 오시지 않겠어요?”하고 말 한 때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나는 그 전화를 들으면서 “으, 재판정은 정말 싫은데...”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K기자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선고가 내려진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나는 언젠가부터 이 사건에 강한 철학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철학적 관심은 내가 이 사건에 관한 대법원 판례를 읽은 다음부터였다.



왜 철학전공자가 이런 대법원 판결(92도1148)을 읽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주제넘게도 나는 철학과 전공강의로 법철학을 개설했다. 나는 법대에서 법철학을 가르치지 않으니 철학과에서라도 법철학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 강의의 대부분을 집단별 발표 수업으로 진행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주로 사회적 문제에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판례나 대법원 판례를 조사해서 발표하라고 했다. 이 강의에서 한 번은 어떤 학생들이 자살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 그때 그들이 찾아서 온 판례가 바로 유서대필과 관련된 대법원 판례였던 것이다.



학생들이 발표 준비를 하다가 도저히 모르겠다면서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대법원 판례를 읽었는데 처음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대법원의 판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축축 늘어지는 문장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논리적 연결사도 없으니 문맥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시 대법원 판례가 엉터리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판례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푸는 방법을 잊어버린 수학적 문제 앞에서 끙끙거리는 교사처럼 찾아온 학생들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끝내 “너희들 다른 주제를 잡아서 발표하면 안 되겠냐” 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때 이후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내 머리 속에 엉겨 붙은 핏덩어리처럼 들어 있었다. 언젠가 저 핏덩어리를 풀어야 하는데 하고 있었는데 K기자가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아, 이런 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나? 철학적 운명이란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번 판사의 선고를 들어보면 대법원 판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2) 고등법원을 찾아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한 시간 정도나 일찍 서울 고등법원을 찾아 갔다. 그런데 해당 재판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법원이 지방법원 속에 섞여 있고 건물의 같은 층이라도 해당 재판정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는 5층의 재판정을 찾기 위해 무려 4번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이거 뭐, 고등법원이 카프카가 쓴 소설 ‘심판’에 나오는 재판정인가?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리저리 오르내리면서 물어물어 재판정을 찾아갔다. 도착해 놓고 보니 또 충격이 다가왔다. 아쉽게도 빈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각 언론사 기자들이 대학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자리를 미리 찜해 놓듯이 이미 자리를 모두 찜해 놓았다. 이거 조짐이 좋지 않는데!



나는 통로에 서서 재판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약간 불안했다. 혹시나 이번에도 원심이 그대로 확정되는 것인가? 몇 분도 안 되어서 다리가 아파왔다. 좀 창피하더라도 바닥에 주저앉아 버릴까? 법정에 주저앉으면 재판정을 모독하는 것일까? 내 앞을 얼른거리는 조폭 같은 법정경찰들이 무서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재판정이 열리고 판사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심 판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선고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판사의 선고문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아 이게 아닌데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산통이 깨진다는 말이 있다. 점쟁이가 목욕재계하고 온 정성을 들여 드디어 산통에서 산가지를 뽑으려 하는데 그만 산통이 깨져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점쟁이는 엄청난 파국이 다가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바로 그런 기분인 것이다.



그 순간 왜 그런 불안감에 사로잡혔는지? 약간 지루하겠지만 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첫 부분의 선고문을 어느 기자가 잘 정리해 놓았기에 여기에 인용한다.



“우선, 자살방조에 대한 1991년 기소 자체가 법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며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되지 않았다는 변호인 측 주장에 대해서 판단했다. 결론은 ‘이유 없다’. 몇몇 변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선고문이 왜 문제인가를 알려면 그 가운데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되지 않았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미리 대법원 판례를 읽은 적이 없었다면 이런 표현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재판이 끝난 다음 서둘러 가까이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갔다. 대법원 판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소사실에 일시와 장소로서 “1991.4.27.경부터 같은 해 5.8.까지의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로 되어 있고, 유서 작성의 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 하더라도, ... 그 유서가 압수되어 특정되어 있는 경우, ...위와 같은 정도의 기재만으로는 현장부재 등의 증명 또는 방어권 행사에 장애를 초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3) 범죄의 현장 검증



대법원 판결문의 이런 내용은 무슨 의미일까? “1991.4.27.경부터 같은 해 5.8.까지의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 유서 대필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건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그래 놓고서 대법원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한다. 대필로 쓴 유서가 있으니까(“그 유서가 압수되어 특정되어 있는 경우”) 언제 어디서 대필을 했는가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대법원의 논리대로 하자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살인의 결과인 시체만 있으면 굳이 살인 사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살인이 있으니까 시체가 있는 것 아니냐? 이거다. 언뜻 들으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건 삼척동자도 의심스러운 엉터리 논리이다.



살인 사건에서 현장재연을 공개적으로 실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범인이 자백을 하는 경우에도 현장재연은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인과적인 과정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살인 사건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이 아닌가?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인과적 과정이 의심스럽다면 살인 사건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진다. 다시 말해서 살해되었다는 그 시체가 사실은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역사학자의 현장답사로 돌려보자. 언젠가 나는 역사학자들의 동만 지역 학술답사를 따라 갔다 온 적이 있다. 나는 물론 관광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을 따라 다니니까 약간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세운 발해농장을 찾으러 갔을 때를 예로 들어보자. 역사학자들은 발해농장이 있었던 바로 그때 그 장소를 찾아 역사자료를 뒤지고 현지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한낮이 지나도 역사학자들이 그 장소를 찾지 못했다. 우주를 다루는 철학자인 나로서는 발해농장이 동경성 근처에 있다 하니 동경성까지 갔으면 만족하고도 남는다. 나는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역사학자들의 쩨쩨함에 대해 공격했다. 그랬더니 역사학자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현장에 가면 모든 것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때도 있어요. 그 때문에 현장을 찾아야 하는 거죠.”



나는 그 뒤로 절대로 역사학자들에게 대들면 안 되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현장을 찾으려는 그들의 고투를 본다면 그들은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법 쪽은 다른 모양이다. 심지어 이번의 판사조차도 사건의 시간과 장소가 특정되어야 한다는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모든 판사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판사들이 옳은 것인가? 그래도 그게 아니라는 변호인이 있지 않은가? 나로서는 아무래도 변호인이 옳은 것 같다. 법원이 사건 현장을 검증하자고만 했다면 이 번 사건은 벌써 끝났을 것이 아닌가?



판사의 말대로 한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조작된 시체들이 얼마나 많이 나올까? 앞으로도 조작된 결과만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될 것인가? 최근에도 조작된 녹취록을 가지고 내란음모니 뭐니 하고 떠들지 않는가? 이번에도 판사는 녹취록이 있으니까 굳이 내란음모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어느 기자가 잘 정리했듯이 이 선고문을 듣자 변호인이 눈을 질끈 감았던 이유가 충분히 짐작된다.



4) 23년이 걸린 이유



다행히 판사의 선고문은 곧 바로 필적 확인을 통해 유서 대필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판사는 사건 초기의 국과수 검증이 어떤 식으로 잘못되었는지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 내용 역시 앞에 인용한 기자가 잘 정리해 놓았다. 직접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란다. 철학자로서 나는 지저분한(?) 사실들 앞에서 오히려 머리가 아프다. 하여튼 이런 단순한 사실들의 나열을 듣다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다시 놓였다. ‘이 정도’면 판사도 애쓴 것이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판사가 장사꾼인가? ‘이 정도’란 장사꾼이 쓰는 말이지. 그래도 이 나라에서 이 정도면 애쓴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침내 판사가 선언했다. 23년 만에 강기훈 씨가 무죄임이 밝혀졌다. 진실은 또 다시 승리했다. 만세! 만만세!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솔직히 너무 우울했다. 도대체 이 정도의 사실을 밝히는데 무려 23년이나 걸렸다니!



주심판사가 밝힌 사실들 가운데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 사실들은 23년 전에 강기훈 씨가 명동성당에 들어 앉아 있을 때 강기훈이 일했던 전민련(全民聯)이 강기훈 씨를 옹호하면서 발표했던 사실들이다. 그 사실들이 이번에 법적으로 인정된 것에 불과하다. 무려 23년이 지나서 말이다.



나는 대법원 판례를 빨리 확인하려는 마음에 서둘러 빠져나왔다. 재판정에 나온 어른들께 인사드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나왔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단순한 사실들이 인정되는데 왜 23년이나 걸렸다는 말인가? 그 23년 동안 한 인간이 겪었어야 했을 절망은 또 얼마나 컸을 것인가? 강기훈 씨의 최후 진술서 속에 그가 겪었던 절망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뭘 어찌하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유서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신세인데, 모르시나요?”





왜 23년인가? 나는 차라리 법리의 싸움이었다면 23년도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법리라는 것은 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고, 그 해석이 바꾸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간통죄가 없어지는데 얼마나 오래 시간이 걸렸던 것인가?



그런데 이번 사건의 경우는 단순한 사실의 문제였다. 필적의 확인이란 과학의 영역이다. 필적 확인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는 국과수의 재검증이 쉽게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재검정을 국과수에 의뢰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던 것인가? 법원이 국과수에게 재검정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법원이 재검정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과수의 권위 때문이라고 한다. 국과수가 스스로 자신의 판단을 고치지 않은 한 법원이 이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과수와 법원 사이의 이 웃기는 동맹은 기묘한 상생 관계이다. 국과수는 사실을 맡는다. 법원은 재판을 수행한다. 양자는 진실한 재판을 위해 서로 협조해야 하는 관계이다. 그런데 양자가 거짓을 위해 협조하게 되면 그 사악한 협조 관계는 진공을 통해 합쳐진 쇠공처럼 깨기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것이 23년이 걸린 이유가 아닐까?



이 세상에는 과학자가 있다. 그리고 권력자가 있다. 과학자와 권력자, 이 둘이 사악하게 결합한다면 이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을까? 철학자 미셀 푸코는 이런 결합을 지식권력 복합체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사악한 협조관계를 대표하는 것이 소위 육법당이다. 군부독재 시절 육사는 권력을 맡았다. 그리고 서울 법대 출신은 머리를 제공했다. 이 둘이 독재를 위해 결합해서 육법당이 만들어졌다. 이 육법당을 깨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가? 이 나라는 아직도 육법당이 지배한다. 남재준 김기춘 동맹이 그것이다.



이 나라에 지식권력 복합체가 어디 그것뿐일까? 정부 조직 속에 각종 위원회 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대학교수들을 보라.



국과수와 법원, 육사와 법대, 이 기묘한 조합들에서 고리가 되어 있는 ‘법’의 건물을 나오면서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우람한 건물이 압도할 듯이 나의 뒤를 덮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법원 건물은 전부 저 모양일까? 그리스 신전 기둥이나 고딕식 창문을 내는 것이 하나 같이 원래의 맥락을 잃어버리고 오직 권위 자체를 위해 봉사할 뿐이었다. 서초동 서울 지방법원에서 서울 검찰청을 거쳐 오면서 대법원 건물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대법원 건물은 수평적 건물 위에 고딕식 수직 건물을 결합한 것이다. 대법원은 그런 식의 건물이 전형적으로 파시즘적 미학을 토대로 한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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