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동녁의 역사
최종덕 2011.01.24 1300




























































냉전시대의 \출판반란\
\동녘\이건복 사장, 《아리랑》펴내고 석달만에 \기관\行
 




















\"\" 시사저널 [205호] 1993년 09월 30일 (목) 김현숙차장대우 \"\"


 








 동녘출판사의 李鍵馥 사장(41)이 《아리랑》번역 원고를 처음 본 것은 83년 말이다. 노동원동가로 은신중이던 친구 조우화(41.가명)가 41년 미국에서 출간된 《아리랑의 노래, 한 조선 반항자의 생애》를 번역하여 그에게 내밀었다.



 이씨는 원고를 읽고 이토록 치열하게 살다간 이가 있을까 하는 감동에 \소름이 끼쳤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원고를 서랍 속에 넣어 둔 채 서너 달을 망설였다. "감옥 문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아리랑》의 출판을 검토한 출판사는 여럿 있었다. 수년 전에 원본과 일본어판이 국내에 들어와 지식인 사회와 젊은이들 사이에 필독서로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적 재미와 전기의 진실을 갖춘 데다 27년의 광동코뮨 실패, 중국 최초의 해륵풍 소비에트 붕괴에 대한 저자의 증언은 고증 자료로서도 희귀하고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어, 저마다 출판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누가 국가보안법을 뚫고 나갈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출판할 경우 1주일 내에 잡혀 들어간 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던 시절이었다.



 이건복씨는 \내고 튄다\는 계획으로 단안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초판을 낸 것이 84년 8월. 이씨는 예정대로 잠적했으나 독자들의반응은 말 그대로 열화와도 같았다. 동녘측은 서점에서 압수당한 책값을 모두 변제해 주며 \뺏겨도 좋으니 팔아달라\고 당부했다. 정문에서 망을 보는 사이 캠퍼스 간이 판매대에서 반짝 세일을 하는 도깨비시장도 《아리랑》의 주요 판매 루트가 되었다.



 이건복씨가 기관에 불려간 것은 책이 나온지 석달 정도 지난 후이다. 용공 서적으로 분류되고 판매 금지와 지형 반납이 결정된 것은 예측한 일이었으나 당장 구속시키지 않은 것은 뜻밖이었다. 이씨의 기억에 의하면, "잡아들일까 말까 고민 많이 했다. 그러나 이태복이 형제를 다 집어넣는 것도 뭣하고..., 하여간 팔지마!"라는 것이 그날의 심문 요지였다고 한다(이태복씨는 그의 장형으로서 81년 전민노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으며 87년 출감하여 현재 주간 《노동자 신문》발행인이다). 그러나 이후 수년간 동녘출판사는 수색과 압수라는 정례 행사를 수없이 치러야 했다.



 "초판 2천부 찍어놓는 것만 다 팔겠다.""그건 다 팔지 않았느냐?""아직 다 못 팔았다."



 사무실과 창고에는 수색 날짜에 맞추어 4백~5백권을 주니해 두었으며, 당시 사회과학 출판사가 으레 하는 수법대로 지형도 두장씩 떠놓아 압수에 대비했다.



 이론서 쪽에는 여전히 철저한 탄압이 내려졌으나 《아리랑》발행인이 구속되지 않았다는 데 고무되어 이와 유사한 기록 문학 발행 붐이 일었다. 그리끼의 《어머니》(석탑)나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두레) 같은 명저는 바로《아리랑》에 힘입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리랑》은 92년 1월 문화부에 정식 납본을 하고 개정판을 낼 때까지 \재판은 내보지 못한 채\끝없이 초판을 내었다. 이 개정판에도 여전히 김 산이라는 저자명을 내놓지는 못했으나 이건복씨에게는 특별한 뜻이 담겨 있다.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님 웨일스와 연락이 닿아 그의 육필 서문을 받아 실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김 산의 사진까지 구해 실었기 때문이다.



 90년 4월 한양대 이영희 교수로부터 님 웨일스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들은 이씨는 즉각 편지를 내여 저자에게 출판 사실조차 알리지 못한 결례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사례비 1천달러를 보냈다.



 님 웨일스는 난관을 무릅쓰고 출판해준 데 대한 감사와 "한국인 이만큼 변한 줄은 몰랐다"는 놀라움에 가득찬 회신을 보내왔다. 그는 "미국에서 출판한 책이 출판사에 큰 손해만 입혀서 인세라고는 받아보지 못했다. 《아리랑의 노래》를 쓴 이래 한국인으로부터 처음 원고료를 받아 기쁘고 신기하다"라고 편지에 적었다.



 사실 41년 펄 벅이 낸 존 데이 출판사의 첫 《아리랑》이 \어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힘에 의해\도서관 소장본까지도 사라져 버리고, 53년 첫 일본어판을 낸 조일서방이 곧 파산한 것과 달리 한국의 동녘출판사는 광고 한번 낸 일 없이 15만부를 팔아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말대로 한국에서 《아리랑》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살아온 셈이다. 그는 지난 8월 개정 2판을 냄녀서 표지에 님 웨일스와 나란히 김 산이라는 필자명을 발표했다.■


金覽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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