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세상읽기]
2010년 01월 08일 (금) 09:43:25 이정은(연세대) webmaster@mediaus.co.kr
인간을 동물로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이 동물이 될 수 있을까? 새해 벽두부터 웬 공상이란 말인가? 경인년이니 인간을 호랑이로 종 전환이라도 시켜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흥행에 성공한 영화 ‘전우치’와 ‘아바타’를 보고서 꿈속을 헤매는 듯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인가?
아니다. 다시 장례식을 치루는 용산 참사 희생자를 생각하니,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히틀러가 불현듯 떠올라서 던진 질문이다. 아렌트가 쓴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어보면, 강제수용소는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수용소는 인간을 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품위를 떨어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단순한 사물로 만드는 실험’을 하기 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파블로프의 개’가 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장소였다.
이 실험은 강제수용소에 감금된 유대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 전체를, 유럽인 전체를, 세계 시민 전체를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유대인을 이용하여 확인한 것일 뿐이다.
인간이 유대인이냐 아니냐, 독일인이냐 아니냐는 히틀러에게 중요하지 않다. 감금 성격은 수용소 안팎에 모두 적용되기 때문이다. 박해 대상이 처음에는 유대인이지만, 그 다음에는 폴란드인, 조금 지나면 독일인 중에서 정신병자, 동성애자, 거지, 더 지나면 심장병에 걸린 자가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그 뒤로 심장병 환자의 가족이 집단에서 분리되고, 점차 사라져 간다. 확산 방법으로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사용하면서 감금 범위를 아리안족의 우수성이라는 기치 아래 유럽으로, 전 세계로 넓혀 나간다.
히틀러가 일차적으로 독일 국민을 상대로 하여 확립해간 조건 내지 인간을 파괴해 가는 과정은 다음처럼 개략할 수 있다.
1. 무엇보다도 첫 출발은 인간을 모두 ‘대중’으로 만드는 것,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낱낱이 분절하여 하나의 원자처럼 철저히 ‘고립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히틀러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친밀한 관계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족들끼리도 서로를 고발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한국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모든 친밀한 관계를 이처럼 끊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원자화된 삶을 살고 있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해관계에 집착하고 실용주의를 추종한다. 이웃은 경쟁자일 뿐이고, 누구나 경쟁자와 고독하게 싸우고 있다. 국민을 철저하게 원자화된 대중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히틀러의 희망 구조 속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다.
관계가 이렇게 단절되어 홀로 고립되는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혼자이다 보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공황상태를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무기력은 사회에 대한 냉소, 무관심으로 이어지며 외로움과 우울증을 심화시킨다.
2. 고립과 무기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그 다음 단계로 익명성이 활용된다. 히틀러는 누가 오늘 잡혀갔는지, 누가 어제 죽었는지를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도록 방법을 강구한다. 생존자가 붙잡혀간 자, 죽은 자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생존자의 기억에서 희생자가 완전히 말소되도록 또 다른 체포와 살인을 계속해 나간다. 체포의 연속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은 가급적 타인과 접촉해서는 안 되며 친밀한 관계는 더더욱 형성해서는 안 된다. 서로가 낯선 타인처럼 익명성으로 빠져들어야만 안전하기 때문에, 옆집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말고, 옆집 사람의 이름을 모르고,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히틀러는 익명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익명성을 몸으로 현실화시킨 사회에 살고 있다. 현대인은 예전과 달리 옆집에 누가 사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옆집 사람과 대화하지 않아도 인터넷 공간으로 들어가면 많은 것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대화는 본명을 알 수 없는 아이디를 지닌 네티즌, 즉 낯선 타인으로 대체 가능하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는 낯선 인간과의 대화도, 익명의 아이디를 이용한 리플도 마음대로 달 수 없게 되었다. 한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일명 ‘미네르바’ 구속 사건은 어떤 아이디로도 자기를 은폐할 수 없고, 어떤 아이디로도 마음대로 진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모르는 어떤 타인을 겨냥해서도, 현 정부와 공권력을 비판해서도 안 되고 그런 대화를 나눠서도 안 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이름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철저하게 고립시켜서 익명성 속으로 던져 넣으라고 현 정부는 요구하고 있다.
3. 히틀러가 인간성을 파괴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적용한 그 다음 방법은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유럽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국적을 모두 독일 국적으로 억지로 바꾸게 한 다음에, 이들의 독일 국적을 모두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일 국적을 지녔던 유대인은 모두 무국적자가 된다. 무국적자가 된 이들 모두는 자연스럽게 독일에서 추방된다. 무국적자는 어떤 나라의 국경이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고, 법적 권리와 법적 보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법적 권리와 보호를 박탈당한 이들이 법적 권리를 회복하려면 권리자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뿐이다. 법적 권리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각 나라는 권리자를 보호하기 위해 범죄자를 처벌할 수밖에 없고, 처벌 대상이 되는 범죄자 유대인은 감옥으로, 법망으로 진입하게 된다. 감옥은 곧 독일 국경으로 진입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에 반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유대인은 어느 국경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으며,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자, 일종의 유령이 된다. 어떤 법적 권리와 보호도 그들을 비껴간다. 유대인 범죄자는 부정적으로나마 존재자로,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무죄의 유대인은 비존재자, 비인간이나 마찬가지이다.
현 정권이 우리의 국적을, 우리의 법적 권리를 통째로 박탈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법적 권리를 소소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박탈하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법적 권리 밖으로 내던져지듯이, 시민들은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밖으로 내던져지고, 4대강 정비 영역 밖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4대강 정비 영역으로 결정된 곳에 삶의 터전을 지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생존권을 빼앗기고 있다. 생존권, 환경권을 자꾸 박탈당하는 우리, 부분적이나마 법적 권리 밖으로 자꾸 내던져지는 우리는 결국 시민도, 인간도 아닌 자에 근접해 가고 있다.
용산 참사에서 세입자들은 법적 권리 밖으로 내던져진 자들이다. 공권력 투입으로 시신도 제대로 못 챙긴 망자들은 법적 권리가 없는 자들로, 그래서 인간도 아닌 자들로 되어 버렸다. 그들의 가족, 그들을 기억하는 자들은 또 다시 이어지는 체포와 감금의 전철을 밟았고, 기억을 말소시키기를 강요받았다. 살아남은 자들, 기억하는 자들이 시민으로서 존재감을 회복하는 길은 범죄자가 되는 길일 터인데, 우리에겐 그런 존재감마저 무의해져 버렸다.
4. 히틀러는 법적 권리가 박탈되어 유령처럼 내몰린 유대인이 인간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점을 악용하여 이들을 손쉽게 강제수용소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법적 권리 박탈이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 수는 있어도, 동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성 내지 인격성을 완전한 박탈했다. 인간 내면을 파괴하는 것, 즉 자발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발성은 자유, 자유 의지에 기초하기 때문에, 자발성을 철저히 말살하면 자유에 기반을 둔 모든 정신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자유는 조금의 여지만 있어도 강압을 비집고 나오기 때문에, 자발성을 말살하려면 자유를 제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자유 자체를 완전히 말살해야 한다. 히틀러는 자유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도덕적 인격을 철저하게 부수어 버린다.
5. 도덕적 인격을 부수기 위해 강제수용소에서 사용한 또 다른 방법이 공범 구조이다. 유대인을 학살하려면 집행인과 희생자가 모두 필요한데,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집행자와 희생자의 이분법을 제거한다. 즉, 모두를 공범자로 만드는 것이다.
마치 모의 심리실험에서 한쪽은 범죄자 역할을, 다른 쪽은 간수 역할을 맡고, 그 다음에는 역할을 바꾸어 실험을 하다 보면, 역할 변화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나치친위대 내지 나치해골부대는 집행자 역할을 맡았지만, 유대인이 항상 희생자 역할만 맡은 것은 아니었다. 나치는 감금된 유대인에게 집행자 역할을 대행시켰고, 그러면 희생자 그룹이 집행자가 되면서 희생자도 범죄에 공모한 공범자로 둔갑한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집행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너나 나나 모두 범죄에 공모한 자들”이 되며, “너나 나나 모두 범죄자”이다. 희생자가 집행자로 둔갑할 때, 양쪽의 범죄 차이는 뭉개지고, 죄의 경질과 정도도 무의미해져 버린다.
이러한 공모 구조는 강제수용소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 전체를 상대로 어제는 집행자였던 사람을 오늘은 희생자로 만든다. 이때 희생되어야 할 적은 그때그때마다 선택된다. 어제는 살인범이 적이었지만, 오늘은 거지가 적이 된다. 어제는 유대인이 적이었지만, 오늘은 심장병 환자가 적이 된다. 독일 국민 전체를, 유럽인 전체를, 세계인 전체를 장악할 때까지, 매일매일 적이 필요하다. 새로운 적은 히틀러에 의해 임의대로 결정된다. 적이냐 아니냐는 히틀러가 적으로 규정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히틀러를 추종하면, 인간은 누구나 모두의 적이 될 수 있다. 누구를 적으로 만들까? 누가 ‘집행자’가 되고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가가 결정되면, 누구든 그 역할 중의 하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적이 진짜로 적인지, 진짜로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역할을 받아들일까 말까일 뿐이다. 그 결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너는 공모자가 된다. 공모자가 되는 순간, 너와 나의 차이, 너와 나의 범죄 차이, 너와 나의 도덕성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도덕성 차이를 고수하거나 도덕성 차이에 기초하여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선전, 선동, 공포 정치, 폭력, 조직력, 이데올로기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차이를 무력화시키는 권력이 가해진다.
6. 이렇게 자발성이 말살되고, 자유가 말살되어 도덕적 인격이 파괴되면, 자신의 의지에 의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행동의 동인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가 된다. 타인의 명령에 의해 조종되며, 타인이 제시한 시간표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인간이 ‘파블로프의 개’이다. 외형은 인간이지만, 정신은 동물이다. 히틀러가 만들어낸 이상한 동물이 만약 일말의 자유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살 가능성’뿐이다.
자유가 말살되면, 나와 타인을 구별할 수 있는 차이, 즉 개성이 말소되기 때문에, 수만의 인간이 모여도, 획일화된 로봇, 마치 식욕도 종소리에 맞춰서 느끼는 이상한 개,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이상한 동물이 집단적으로 양산된다. 이상한 동물은 짖으라 하면 짖고, 물어뜯으라 하면 물어뜯고, 상대방이 범죄자라 하면 범죄자라 외친다. 이상한 동물은 주인이 너를 위해 존재한다고 외치면 그렇다고 믿고, 주인이 서민을 위해 정책을 마련했다고 하면 그렇다고 믿고, 주인이 너를 사랑해서 때리니 기쁜 눈물을 흘리라 하면 그렇게 눈물을 흘린다. 현 정부는 용산 참사 희생자는 나쁜 놈들이니 그렇게 믿으라 했고, 믿지 않는 인간에게는 물세례, 곤봉세례, 연행세례를 감행했다. 우리가 곤봉세례를 받으면서 믿어야 할 것들이 자꾸자꾸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정부의 적이 될지 알 수 없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모두 적으로 둔갑하게 될 터이니.
이 과정에서 현 정권은 히틀러도 만들어내지 않은 또 하나를 덧붙인다. “너나 나나 모두 죄인이다.”를 살짝 뒤집어서 “너나 나나 모두 무죄이다.”로 나아간다. “총리의 오백만원은 오천만원 로비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 “너도 세금 신고를 안 해서 추징금이 나왔다고!” 너나 나나 모두 탈세를 했네. “현 정권의 실력자들도 너희처럼 탈세를 했네!”
이로 인해 새로운 논리가 만들어졌다. 너나 나나 모두 죄인이다. 그러니 너나 나나 모두 무죄이다. 그렇다면 현 정권은 어떤 일을 해도 무죄이다. 현 정권을 죄인 취급하면 희생자 너희들도 죄인이다.
한국 사회를 반추해 보라. 그러면 인간을 이상한 동물로 만들려고 했던 히틀러가, 히틀러의 공범 구조가 겹쳐지고, 모든 비도덕성과 모든 불법과 모든 거짓말을 무죄로 만들려는 정부의 이상한 논리가 머리를 압박한다.
연초에 떠오르는 이 공상이 그저 악몽이기를,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면 악몽이 사라지듯 잘못된 현실 논리가 모두 사라지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