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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의 발전을 위한 제언
김호태 2008.06.25 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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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의 발전을 위한 제언



오늘날 퇴계학 연구의 현황은 어떠한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퇴계에 대한 연구논저가 무려 1,400여 편. 역시 학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올 법도 하다.

“퇴계에 대한 연구는 그 미세한 분야까지 좁고 깊게 천착되어 이제는 더 구명해야 할 곳이 없을 정도로 손대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퇴계의 사상에 관해서 나온 논문이 이미 가위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만하다.\"

“그 동안 퇴계는 지나치게 많이 연구되었다.”

변변한 논문 한편 없던 지난 1970년대 이전과 비교해보면 놀랄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는 퇴계학계 내에서의 성취일 뿐이었다.
이번에 필자가 퇴계에 대한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여론을 청취해 본 결과 퇴계학계 밖 현실은 학계의 넘치는 연구 성과와는 너무나도 달라 놀랐다. 퇴계학계 밖에서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빈곤했다. 대중들의 관심은 거의 무관심, 생업에 바쁜 대중들이야 그렇다치자.
문제는 퇴계를 논하는 퇴계학계 밖, 자신의 전공과 관련하여 퇴계를 꼭 읽어야 하는 학자급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퇴계관에는 근래 퇴계학계의 넘치는 연구성과가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퇴계에 대한 (일제식민사관 이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은 여전히 완강한 듯했다. 퇴계는 여전히 보수와, 소극, 관념, 모방, 사대 등등의 단어로 규정되고 있었다.

요즈음 학문간의 소통, 경계허물기, 통섭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적어도 퇴계에 관한 한, 퇴계연구자와 기타 철학연구자와 역사학자, 문학자, 정치학자, 법학자들의 퇴계관은 따로 놀고 있었다. 근래 등장한 참신한 퇴계 연구논저들이 그들에겐 전혀 참고자료로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예컨대,
“나는 퇴계보다 칸트를 좋아한다”는 식의 서양철학전공학자들은 차치하고라도,
역사학자들의 경우, 퇴계의 사상이 16세기 중반이라고 하는 시대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역사적 고찰에 의한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혹자는 “양반지배질서의 사상적 기반을 닦은 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그저 주자학을 충실히 답습한 자로, 그리하여 ‘한국적 성리학’을 수립한 율곡과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자 정도로 평가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퇴계가 주자성리학의 완벽한 이해와 철저한 계승에 충실하였음에 대하여 율곡은 그 문제점을 보완하여 이론적 심화를 보이면서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게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서울대학의 한국사 교재의 내용이다.
정치학자들에게 16세기 ‘훈구에서 사림으로’의 역사적 전환에 기여한 실천적 정치 사상가로서 퇴계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단지 치자의 수신을 강조하는 ‘인간 내면의 도덕성’ 차원에서 정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사람 정도로 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정치학자는 퇴계학이 “조선왕조 말기 제왕학으로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의 제국주의론을 보강시켜 주는 데 기여하였음”을 지적하며 “퇴계학의 강조는 일제식민사관의 강조에 불과하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법학자들은 서구중심주의에 젖어 퇴계 사상에 담긴 헌법과 법철학적 메시지에 대해서는 거의 상상도 못하는 듯 보였다.
한문학 전공의 어느 유명한 학자는 퇴계에 대해 “조선의 학문 기틀을 다졌지만 ‘사상의 편협성’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현실을 돌아 볼 때, 퇴계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성취에 만족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퇴계학 연구자들 앞에는 지금 새로운 과제가 놓여 있다. 퇴계학을 퇴계학계 밖으로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이제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단순히 발표하는 자체에서 그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견해가 퇴계학계 밖으로 제대로 침투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 감시하는 보다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글쓰기가 요청된다. 퇴계를 다루는 역사학자들, 문학자들, 정치학자들, 법학자들의 퇴계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퇴계학 연구자들이 전공의 울타리에 갇혀 침묵할 때, 결국 피해는 누가 보는가. 불성실한 역사학자들, 정치학자들, 법철학자들, 한문학 혹은 국문학자들의 시각을 통해 퇴계를 배워야 하는 학생들이다. 아니 우리 모두들이다. 그 학생들이 성장해서 우리 사회를 현실에서 이끌어간다고 생각해보자. 정치, 언론, 법조, 경영, 문화 등의 영역에서... 부실하고 왜곡된 퇴계관을 안고... 허탈한 노릇이다. 아니 지금까지 그래 왔다. 목하 우리 현실을 움직이는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문화예술인들의 의식에는 퇴계가 없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파워 엘리트 중 존경하는 인물로 퇴계를 꼽은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정치, 경제, 법치, 과학, 한류 등의 영역에서 퇴계의 교훈을 상기할 법도 하건만 아무도 퇴계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실정은 퇴계의 <<성학십도>>의 엄중한 경고를 떠올리게 한다. 퇴계는 통치자에게 경(敬)의 정신이 결여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만약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 가지 사욕이 일어나, 불길 없이도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도 차가워진다. 털끝 만큼이라도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바뀌게 되니, 삼강(三綱)이 침몰하고 구법(九法)도 썩어버린다.”

여기서 연구자들은 퇴계의 교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퇴계의 理發說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학문의 세계에서 ‘지성의 적극성’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본다. 적극적 지성의 모습은 퇴계 자신의 학문적 생애에서 잘 보여지고 있다.
퇴계는 온화하고 인자하며 조용한 성품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매우 공격적이요, 비판적이었다. 그의 비판의 칼날은 중국과 조선을 가리지 않았다. 양명학이 조선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게 퇴계 탓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의 왕수인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유명한 예이다. 퇴계는 그밖에 나흠순, 진백사, 오징 등 중국 학자들을 비판하였고, 조선에 있어서도 화담 서경덕을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이 그가 세운 비판의 칼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처럼 학문적 측면에서 보면 그는 매우 전투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온화하고 화합지향적인 성품과 달리 퇴계는 왜 학문에 있어 만큼은 그토록 치열했던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진리(理)는 지극히 공평한 것이어서 조금도 사사로움을 용서할 수 없다.”

퇴계의 리발(理發)은 ‘정의와 진리는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안이한 태도를 넘어선다. ‘진리를 향한 적극적인 투쟁’의 메시지가 있다고 필자는 본다.
주자학이 조선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데에는 이러한 퇴계의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학문 태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의 적극적인 태도는 외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도 자신의 이론의 정합성에 대한 검증도 철저했다. 그것이 바로 고봉과의 사단칠정론변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 사단칠정론변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 있었다.
몇 년 전 <<오늘의 동양사상>>의 논과 쟁 코너가 보여 준 것이었다. 필자와 같은 외부 관전자에겐 굉장히 흥미 있는 논쟁이었고, 그야말로 한국철학계의 ‘빅 이벤트’라 할 만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상사 전반을 (아니 해석에 따라서는 조선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파워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역사학, 정치학, 법학계 인사들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만큼 퇴계학계가 무기력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인문학 위기의 시대, 퇴계학의 활로를 생각하며 새삼 퇴계 理發說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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