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석의 역설
원래 내 철학 인생의 목표 중의 하나가 헤겔의 ‘정신현상학’ 전체를 주석하는 일입니다. “논문이라면 몰라도, 꼭 주석이 필요한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습니다. 나도 논문을 여러 편 써보았지만 그때마다 어떤 한계를 느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이 독특하게도 ‘서술(이야기, 역사)’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결국 주석 외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목표를 세운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간 간간이 인터넷 게시판에 주석을 올리기도 했고(특히 서문과 정신 장의 앞부분), 그 후 정신현상학의 ‘서문’(서론 포함)과 1장에서 4장까지 즉 감각적 확실성에서 자기의식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각각 책으로도 발간했다. 서문을 다룬 책이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무다’(2011)이고 자기의식을 다룬 책이 ‘불행한 의식’(2013)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주석 작업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논문의 경우 논점과 관련되지 않는 부분은 무시하고 지나가도 되지만 주석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석은 모든 부분을 뒤집어 그 의미를 밝히고 전체적 흐름 속에서 그 부분이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특히 이런 흐름 속에서의 연관성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사실 제대로 된 주석이라 할 수 없지요. 내가 논문이 아니라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논문들이 헤겔의 텍스트에서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해서 자기의 주장의 논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헤겔의 복잡다단한 텍스트를 가지고 무슨 주장이라고 합리화시킬 수 있죠.
이런 주석의 작업은 마치 수학에서 늘어선 점들을 일관적으로 꿰어놓는 함수를 발견하는 것과 같이 힘든 작업입니다. 두 개의 점이라면 수십 가지 함수를 가지고 꿰어놓을 수 있겠죠. 그러나 만일 열 가지 점이라면 그 점들을 꿰어놓을 함수는 특정적일 것이고, 사실 쉽게 발견하기 힘들 겁니다. 주석은 그런 점에서 텍스트를 가장 근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됩니다만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주석의 경우 소위 역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헤겔이 천재이기는 하지만 헤겔의 모든 말이 일리가 있고 정합적일까요? 헤겔도 글을 쓰면서 혼란과 자가당착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까요? 그런데 주석은 일단 헤겔의 모든 텍스트가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헤겔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라는 가설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그런 가설은 헤겔이 부여하지 않았던 의미를 텍스트에 억지로 뒤집어씌우는 일일 수도 있죠.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주석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길이라 말할 수 있겠죠.
또한 주석은 모든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니, 작업의 분량이 방대해졌습니다. 그만큼 주석의 작업은 지지부진하게 전개되기도 했구요. ‘정신현상학’의 ‘서문’은 총 62쪽이고, 감각적 확실성에서 자기의식에 이르기까지는 총 68쪽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각기 한 권의 책 정도의 분량이 나오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쳤고 결국 자기의식 장을 끝낸 후 오랫동안 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약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내가 잡았던 철학적 인생의 목표를 완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생각은 때로는 강박적인 악몽처럼 때로는 하이데거가 말한 ‘교회의 종소리’처럼 내 마음에 울렸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그 중얼거림은 “아니다, 다시 이 길에 빠지면 언제 헤어 나올 것인가? 중도에 버릴 수도 없는 길이니!” 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아마도 이 목소리가 합리적 이성의 목소리일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정신현상학의 주석을 단다고 이 세상에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헤겔의 철학은 이제 세상에 거의 잊혔지요. 더구나 헤겔 사후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헤겔을 규탄하고 나섰습니다. 실존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분석철학자들은 또 자기 식으로, 최근 구조주의자들 역시 자기 멋대로 헤겔을 해석했고, 그런 다음 그런 헤겔을 부정했으니,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 헤겔처럼 난도질당한 철학자가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깨에 들었던 기운이 저절로 빠져나가고 맙니다.
나는 그런 목소리 앞에서 다시 마주 보았던 컴퓨터를 끄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으나, 결국 이제 다시 이렇게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정말 강박관념인지, 교회의 종소리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그러나 이성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힘도 있는 것은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2)자기 변명
왜 다시 헤겔인가? 물론 이게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힘 때문일 것이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변명은 스스로 이 일에 자발적으로 나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아Q의 변명처럼 자기를 속이는 짓일지도 모릅니다. 이왕 노예로 살 바에야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다면 적어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기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아Q의 사유법인데, 이런 생각을 하면 이 자리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변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이런 변명이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왜 다시 헤겔인가?”를 생각해 보죠. 지금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복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구조주의적 상대주의에 기초합니다. 구조적 상대주의는 진리를 거부하며, 현실과 시뮬라크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치와 이념을 거부하죠. 억압적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유 자체도 부정하고 감각의 해방에 몰두합니다.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향합니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때 국가적 억압에 저항하는 논리이기도 했으나 결국은 자본 특히 세계적 금융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로 전락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계기가 바로 부시의 이라크 침공입니다. 이 제국주의적 침략 앞에 서구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들은 침묵하거나 자신의 안락을 위해 제국주의적 침략을 찬양했지요. 부시의 이라크 침공 앞에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무력했다는 것 때문에 포스트모던주의에 대한 반발감, 회의감이 급속하게 확대되었습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포스트모던주의가 근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상대주의 철학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억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죠.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복을 지향하는 새로운 철학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복을 위한 철학이 지향하는 지점은 명백했습니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거부한 지점 즉 궁극적으로 진리가 현현하는 지점, 즉 구조적 내부를 벗어나는 지점, 외부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점에서 ‘외부의 철학’이 우리 시대의 철학의 지향점이라 봅니다. 들뢰즈, 라캉, 낭시 등 탈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들은 현전 개념 즉 진리가 현현하는 현재의 복권을 지향하죠. 이 현재는 내부에 있지만 진리나 영원과 접촉하면서 현재의 내부에 구멍을 내고 바깥과 연결되는 지점이죠.
들뢰즈나 라캉, 낭시 등 지금 외부의 철학들은 모두 진리의 순간에 직관적으로 도달하려는 낭만주의적 철학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철학은 19세기 말의 독일 철학 상황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철학을 지배한 칸트의 철학은 물자체에 대한 무지의 철학이며, 이런 점에서 현재의 구조주의적 상대주의 철학과 상응합니다. 반면 지금 다양한 현전의 철학은 직관적으로 진리에 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칸트 철학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철학에 상응됩니다.
이런 낭만주의 철학은 상대주의를 넘어서 진리가 현현하는 외부에 이르려는 인간의 노력을 반영합니다만, 고유한 한계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헤겔은 낭만주의의 밤에 모든 소는 까맣게 보인다고 비판했습니다. 즉 낭만주의는 자신이 직관이 사실은 주관적 입장에 그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진리가 현현하는 현재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연히 자신의 직관이 진정으로 진리에 부딪힐 수도 있을 겁니다. 많은 종교적 사상가들, 예술가들이 이렇게 직관을 통해 시대를 넘어서는 외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또 많은 종교적 사상가, 예술가들이 자신의 한갓된 주관적 입장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고집하고 결국 자신의 고집 때문에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헤겔은 바로 그런 주관적 고집을 낭만주의의 밤에 나타나는 무차별성으로 규정했던 것이죠.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들뢰즈의 철학이 무척이나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되었던 외부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다시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그려낸 외부의 모습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무정부주의입니다. 소위 68혁명 때 등장했던 ‘아우토아르키(자율주의)’ 운동이고 무차별적인 공동체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의 문제점은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정부주의는 무기력할 뿐입니다. 이런 무기력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무정부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들뢰즈주의자들은 그저 연구실 안에서의 혁명을 외칠 뿐이죠.
결국 진정한 외부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성과 직관, 회의와 신앙 등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나는 이렇게 이성과 직관, 회의와 신앙을 통일시키는 철학을 헤겔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구조주의와 낭만주의의 진리의 현현이라는 개념을 통일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다시 헤겔 철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3) 정신의 운동 과정
변명은 이 정도 하죠. 그리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텍스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이성 장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V. 이성의 확실성과 진리의 장이다. 텍스트는 펠릭스 마이너 판(빨간 판), 헤겔 전집 9권, 페이지는 132쪽부터입니다.
여기 제목에 나오는 ‘확실성’과 ‘진리’라는 개념은 ‘정신현상학’을 관통하는 서술의 기본 논리입니다. 이 두 개념은 헤겔이 자주 언급하는 ‘즉자’와 ‘대자’라는 개념과 일치합니다. ‘확실성’이나 ‘즉자’란 어떤 단계의 정신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 단계에서 어떤 정신은 자신이 도달할 목표를 주관적인 확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아직 자기를 나타내지 않은 상태 즉 잠재적 상태에 머물러 있죠. 헤겔은 바로 이런 상태를‘확실성’이라니 ‘즉자’라니 하고 규정합니다.
마침내 어떤 단계의 정신이 운동의 끝에 자기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진리’의 상태가 된다. 왜냐하면 주관적 기대가 실현되면서 기대와 도달한 결과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잠재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므로, 이런 상태를 헤겔은 ‘대자’라고 하죠. 자기의 기대가 실현되어서, 자기 앞에 마주 서 있으니 곧 자기에 대한 것으로서 대자가 된다는 것이다.
헤겔이 이런 정신의 운동과정을 표현하는 경우 때로 ‘의식’과 ‘자기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정신이 의식의 단계에 있을 때, 그것은 목표가 아직 즉자적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가 대상으로 출현한다. 반면 대자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자기의식이 됩니다. 어떤 정신의 단계가 자기의식의 단계에 이를 때, 그때가 바로 진리입니다. 물론 이 진리는 어떤 단계에서 운동의 결과일 뿐이고 궁국적인 최종적 진리는 아니죠.
이런 경우 사용된 ‘의식’이나 ‘자기의식’이란 표현은 정신의 한 단계로서 ‘의식’과 ‘자기의식’이라는 표현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헤겔은 자주 이 두 표현을 섞어서 씁니다. 예를 들어 ‘현실적 의식으로서 자기의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문에 우리는 당혹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의식’와 ‘자기의식’에 관한 두 종류의 표현이 혼용된 것으로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확실성’이나 ‘진리’라는 표현은 이성이라는 정신적 단계의 목표나 결과를 표현할 뿐, 어떤 구체적 의미는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성’이라는 정신적 단계입니다.
4)이성의 개념
이성이라는 말은 철학사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런 철학사적인 의미와 비교해 볼 때 헤겔이 사용하는 이성이라는 말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헤겔이 말한 이성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납니다다.
“개별적 의식이 즉자적으로 절대적 본질이라는 생각..”
“매개는 ..그 통일에 대한 의식이다. 이 통일은 의식에게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확실성이 모든 진리라고 언표한다.”
이와 같은 표현을 위해하기 위해 이성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추상적 인격’이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보기로 하죠. 모든 인간은 추상적인 인격의 측면에서 동일합니다. 이런 추상적 인격은 어떤 구체적 내용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기 결정권을 의미합니다. 이 자기 결정권 자체는 미리부터 주어진 구체적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순수한 형식적인 권리이며 따라서 인격은 추상적인 인격입니다. 이 추상적 인격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것, 개체 자신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이런 인격은 보편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인격을 인정한다면 동시에 나는 다른 사람의 인격 역시 인정합니다. 나의 인격은 타인이 인정하는 한에서만 성립합니다. 이처럼 상호 인정이라는 관계가 없다면 인격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격을 상호 인정하는 관계를 법이 지배하는 사회 즉 법치사회라고 합니다.
추상적 인격과 법치사회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추상적 인격이 인정되므로 법치가 성립하며 법이 보호하므로 추상적 인격이 성립합니다. 이런 점에서 추상적 인격은 자연적 인격과 구분됩니다. 물론 자연인에 추상적 인격이 부여되지만 비자연적 존재 예를 들어 단체에게도 인격이 부여될 수 있으며, 자연인에게도 추상적 인격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매우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종합하자면 인격은 형식적 결정권이며, 보편적이며 평등하고 법적으로 보호받아 현실적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추상적 인격, 그것이 헤겔은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성에서 개체적 결정권이 ‘절대적 본질’ 즉 보편적이며 고유한 것이라 합니다. 또 인격은 법적으로 인정되므로 “확실성이 곧 진리”이다. 여기서 주관적 확실성이란 곧 추상적 인격의 형식적 결정권을 의미하고 반면 진리란 곧 이런 결정권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5)자기의식의 운동
이런 법적인 인격이 어떻게 출현했을까요? 이성 장에 나오는 이런 법적 인격을 바로 앞 장에서 다루었던 자기의식 장에서의 운동의 결과입니다. 간단하게 그 과정을 여기서 추려보도록 하죠.
우선 자기의식은 구체적 현존에서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생명체(‘타자 속에서 자기 동일성’)에서 시작됩니다. 생명체의 신진대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겁니다. 이런 통일성의 과정이 하나의 생명체 내부에서가 아니라 생명체와 생명체 사이 즉 사회적 존재에서 발생하게 될 때, 그게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의식입니다. 사실 동물도 이미 일정한 정도 이런 사회적 존재(‘Gattungswesen; 종적 존재’)에 이르렀지만 이런 사회적 존재의 통일성은 인간에 이르러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곧 자기의식의 구체적이고 유일한 예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인간의 개체와 개체(가족과 가족이라 해야 정확합니다만)는 서로 대립합니다. 각자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해 생사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물론 개체와 타자의 통일적 존재 즉 사회적 존재는 이런 투쟁 속에서 이미 가능성으로 내재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사의 투쟁 가운데서 사회적 존재는 실제로는 다만 피안에 설정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지반인 사회적 존재를 자기의 피안에 설정하는 자기의식이 ‘불행한 의식’이죠.
‘내재하는 것은 곧 피안에 존재(초월성)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헤겔의 변증법에 고유한 논리입니다. 여기서 내재성이 곧 초월성이라는 논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논리는 정신분석학에서 ‘배제된 것이 환상 속에 출현한다’는 소위 환상의 논리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개체와 개체 사이의 대립이 화해되면서, 그리고 개체와 사회적 존재 대립도 화해됩니다. 그 결과 “내가 곧 우리”라는 이성의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개체는 사회적으로 인정됩니다. 그런 점에서 개체는 법적인 인격이 된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인정의 관계는 다만 형식적인 측면에 한정됩니다. 즉 서로가 자기의식이라는 점 즉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기결정권이라는 측면에서만 서로 인정될 뿐이고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아직 상호 인정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형식적인 상호인정의 개념으로부터 즉 추상적 법적인 인격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성이라는 것이 출현하게 된 것이죠. 헤겔은 이런 자기의식에서 이성으로의 운동과정을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불행한 의식에서 즉자는 자기 자신의 피안이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표면 위에서(an ihm selbst) 아래와 같은 것을 수행한다. 즉 완전하게 발전된 개체를 또는 현실적인 의식인 개체성을 자기 자신의 부정으로 즉 대상적인 극단[추상적 인격, 법적 존재]으로 정립했으며 달리 말하자면 그의 대자존재를 자신으로부터 빼앗아내었으며, 그의 대자존재를 존재로 만들었다.”(132)
이렇게 ‘대자존재’가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이 법적으로 인정된 인격 즉 형식적 자기결정권입니다. 이와 같은 개체의 사회성 즉 법적인 인격이 인정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던가요?
“그의 진리는 양 극단이 절대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유지되는 추론 속에서 매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매개는 부동하는 의식에게는 개별자가 자기를 포기했다고 언표하며, 개체에게는 부동자가 더 이상 그에게 극단이 아니며, 그와 화해되어 있다고 언표한다.”(132)
‘부동하는 의식’이란 생사의 투쟁 당시에 불행한 의식에 곧 피안, 초월로서 나타나는 사회적 존재,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이 부동자는 피안에 나타나므로, 불행한 의식에게는 신적인 존재로 간주됩니다. 자신의 인격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노예 즉 불행한 의식은 이런 신적인 존재의 현실적 실현을 메시아적으로 기대하죠. 헤겔은 그 기대가 곧 기독교적 종교로 출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출현한 메시아적인 존재가 헤겔에게서는 부동하는 의식이죠.
불행한 의식에게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피안에 머무르는 이유는 사실 자기의 주관적 욕망 타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생사의 투쟁이 벌어졌던 것이죠. 그러므로 사회적 존재가 피안이 아니라 현실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 지배욕망이 포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의 글에서 “개별자가 자기를 포기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포기를 가르치는 종교가 곧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곧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이른다”는 메시지인데, 헤겔은 이런 메시지가 곧 자기포기, 즉 주관적 지배욕의 포기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기독교적 가르침을 통해 마침내 자기 자신의 주관적 욕망의 포기가 이루어지면서 추상적인 인격이 성립하게 되죠. 이것과 동시에 사회적인 인정 즉 법적인 사회가 성립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