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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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3일 철학 콘서트 참고 자료-김숨의 소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에 대해
이병창 2013.02.19 473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을 읽고



1.

2011년 이상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다가 김숨의 소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을 읽었다. 숨 막히는 소설이다. 김숨의 소설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은 그의 소설 중에는 가장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김숨의 소설은 근본적으로는 리얼리즘적인 바탕에 서 있다. 그가 포착하려는 세계는 뿌리 뽑힌 사람들의 삶이다. 그러기에 무능한 실업자들, 죽어가는 노인들, 짓눌린 여성들이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삶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으나 그들은 목숨을 끈질기게 이어간다. 김숨은 그런 사람들이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견디는가를 지켜보려고 소설이라는 직업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초기 작품들에서 김숨은 이런 뿌리 뽑힌 사람들 내면에 꿈틀거리는 거친 생명력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투견과 같은 작품은 김기덕 감독의 초기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김숨은 예를 들어 \백치\에서처럼 점차 뿌리 뽑힌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집요한 환상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경우 그의 소설은 마술적인 리얼리즘의 작가 마르케스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2011년 발표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에서 김숨은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돌발하는 분열증적인 증상에 주목하는 것 같다. 이런 증상에 대한 묘사는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그의 문체와 어울려서 거의 숨 막히는 듯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런 강박증적 문체나 분열증적인 증상은 이미 \간과 쓸개\(2011)에서 실험되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이 단편모음에 실려 있는 단편 「룸 미러」에서 평온한 현실은 갑자기 악마적인 세계로 변한다. 아직은 카프카적인 느낌이 강하다. 반면 이번 단편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편집증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지난 해 김숨이 \노란 개를 버리러\(2012)를 발표했을 때 그 난해한 실험성 역시 이런 편집증적인 요소와 관련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는 아버지의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목소리,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음산한 현실-주인공 아버지는 택시 운전기사를 살해한 것 같다,그리고 그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 택시에 시체를 싣고 아들인 주인공과 함께 떠돌아 다닌다 - 그리고 그 시체를 버릴 기회가 끝없이 연기되고 만다는 사실들,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실험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2.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임신 때문에 집에 갇혀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양은들통 속에 오리 뼈를 고고 있다. 오리 곰국은 그녀가 모시는 노인 즉 시아버지가 줄기차게 먹던 것이다. 그녀는 그 뼈들이 아마도 그녀가 노인을 한 번 모시고 가서 먹었던 오리구이 집에서 얻어온 것이라 생각한다.



오리 곰국에서 나오는 누리끼리한 기름이나 뼈 고는 냄새는 온 집안을 감싸고 있으며 그녀는 그 속에서 질식할 듯하다. 그녀를 숨 막히게 하는 이 기름이나 냄새는 실제라기보다 오히려 환상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에 침투한 쥐상스의 조각이다.



김숨의 다른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을 무너뜨린 것 역시 현실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인 노인을 모시고 있다. 노인은 중풍으로 쓰러진 다음 그녀가 모시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사이 노인의 빌라를 팔아 펀드에 투자했다가 그 돈을 다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노인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두 달 전부터 실버타운에 들어가기 위해 그 돈의 반을 돌려 달라고 한다. 그 때문에 그녀의 남편도 가능한 한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노인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녀에게는 멀지 않아 아이가 태어난다. 그녀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노인이 기거하는 방을 원한다. 그 방의 벽지를 파란 색으로 칠할 것으로 꿈꾸면서... 그러나 그녀는 노인을 실버타운에 보내기 위해 노인에게 돌려줄 돈을 구할 수 없다. 그녀는 노인에게서 죄의식을 느끼며, 따라서 노인을 가능한 한 만나지 않으려고 피한다. 그녀는 노인이 자기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할까 보아서 두려워한다.



이런 죄의식 때문에 무너진 그녀를 이제 편집증적 망상이 사로잡는다. 그녀의 망상 속에서 노인은 그녀를 지켜보는 초자아가 된다. 그러기에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노인의 응시하는 눈을 본다. 그녀는 노인이 모든 것을, 자신이 노인을 증오한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기억과 현실은 교차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소설 속의 사건이 진행되는 그날 저녁 노인이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간 사이, 그녀는 국자에 담긴 국물 속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노인의 눈을 보게 된다.



3.

그런데 그날 산책을 나간 노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녁 8시면 돌아온다고 했던 그녀의 남편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들을 기다리면서 편집증적인 망상 속에 더욱 더 깊이 빠져든다.



그녀의 편집증적 망상 속에서 이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망상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작가 김숨은 일부러 그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모호한 것은 한 달쯤 전부터 거실 벽에 보란 듯이 걸린 노인의 영정 사진이다. 그것은 그녀의 망상 속의 초자아의 또 다른 표현인가? 소설 속의 주인공은 스스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아니면 실제로 노인은 죽었고, 그 때문에 영정 사진이 걸렸고, 그녀는 지금 노인이 살아 있다는 망상에 빠진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망상적인 혼돈은 202호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그날 노인이 산책 나가면서 그녀에게 202호 여자가 30만원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돈을 꼭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노인이 무슨 돈이 있어서 202호 여자에게 돈을 빌려주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정말 노인이 돈을 빌려 준 것일까? 아니면 이것 역시 노인에 대한 그녀의 망상 중의 하나일까? 심지어 소설에서 202호 여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런 여자가 있는지 아닌지도 모호하다. 그녀가 두 번이나 허탕을 치고 마지막 12시 경에 세 번째로 202호에 갔을 때 202호 여자의 남편을 만난다. 그녀가 그 남편에게 돈을 돌려 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자, 남편 역시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호하게 대답한다. 더욱 모호한 것은 그 남편의 뒤에서 조용히 “아빠..”하고 부르는 딸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일까? 아니면 여자의 망상 증세를 알고 있어서 아버지에게 대꾸하지 말하는 말인가?



노인의 영정사진과 관련된 기억/망상이나 돈 30만원을 빌려주었다는 기억/망상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주인공은 초자아의 가혹한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그런 초자아의 채찍질을 완화시키는 방어기제일까?



4.

이 소설이 놀라운 것은 현실의 좌절을 편집증적인 망상을 통해서 버티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만은 아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주인공이 이런 망상을 벗어나려는 아주 작은 희망을 작가 김숨이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벌레라는 것을 깨닫고 집을 나가면서 그 순간 새벽의 환한 빛이 잠깐 비추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주인공은 마침내 극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이런 극적인 전환과 더불어 소설은 끝난다.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12시가 넘어 잠시 잠들었다 깨어난 주인공은 들통 속 오리 뼈 국물이 바닥까지 졸아들도록 가스 불을 올린다. 뼈들이 악다구니 하는 가운데, 그녀는 환풍기를 틀고 냄새를 쫓아 보낸다. 그리고 그녀는 노인의 영정 사진을 바라 본 다음 밖으로 나간다. 골목길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노인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노인을 찾아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202호 여자가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소설은 끝난다.



이런 전환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안타깝게도 소설은 그런 전환을 충분히 그려내지 않는다. 아니 작가 김숨은 그런 것을 서술하기를 거부하는 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이 전환에 이르는 계기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열시가 되어도 그 둘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노인의 방에 들어가 본다. 그녀는 노인의 잠바가 걸쳐져 있는 못에 걸린 모자 밑에 노인이 숨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모자를 벗기며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만, 그 곳에는 못대가리만을 발견한다.



②그녀는 다시 빌라 입구로 나가서 목을 빼고 골목길을 바라본다. 어느 집 대문에 장롱이 내버려져 있어 거기에 노인이 숨어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 장롱 문을 열어본다. 이제 그녀는 그녀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잠들고 싶어 한다.



③그녀는 다시 노인의 방에 돌아온다. 그리고 장롱 문을 열어 본다. 거기에 노인이 주어오는 고물이 가득 차있어야 하지만 이제는 텅 비어 있다.



④그녀는 노인이 베껴 쓰던 성경의 글자를 덧대어 베껴 쓴다. 볼펜에서 잉크가 흘러나와서 모든 것을 삼키는 웅덩이가 된다.



앞의 세 가지 계기들은 모두 ‘열어 본다’라는 동사와 관련된다. 모자와 대문 밖 장롱, 노인의 방 장롱, 그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주인공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이미 열기도 전에 놀라고 있다. 그러기에 그녀가 그 문을 열어 보는 행위는 엄청난 내적인 결단이다. 편집증적 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에게 그것은 엄청난 결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주인공은 그 속에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발견이 망상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계기는 마지막 네 번째 계기가 아닐까? 노인의 삶 역시 그녀의 삶과 마찬가지로 뿌리 뽑힌 삶이다. 노인은 그 삶을 성경을 베끼는 일로 견디고 있다. 성경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베낀다는 단순 반복적 행위가 끈질긴 삶의 투쟁을, 단지 존재하기 위한 투쟁을 보여준다. 그녀 역시 노인의 베끼는 행위를 반복한다. 볼펜을 꾹꾹 눌러서 검은 잉크가 빠져나와 모든 글자들을 삼키도록 말이다.



글자를 삼킨다는 행위는 어쩌면 편집증적 환자의 파국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검은 자폐증의 세계이다. 그러나 김숨의 소설에서 글자를 삼킨다는 것은 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 검은 잉크가 삼키는 것은 그녀의 망상이다. 그녀는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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