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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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원시인의 정치를 꿈꾼다
이순웅 2009.10.28 1274
원시인의 정치를 꿈꾼다-재보궐 선거에 부쳐  
[철학으로 세상읽기]계모임의 총무처럼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

2009년 10월 26일 (월) 11:16:48 송석현/방송통신대 강사  webmaster@mediaus.co.kr  

또 다시 미니 총선 운운하는 선거가 몇 군데서 벌어지고 있다. 별 관심도 없는 선거 이야기를 왜 하느냐 질책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거철만 되면 반복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신성한 주권행사니 뭐니 하는 캠페인을 보고, 다들 자신이 잘났다고 떠드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국민을 거저 투표하는 기계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뭐란 말인가?  

민주주의는 인민의 정치인가

민주주의(Democracy)는 모두 다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동했다.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어 Demokratia에서 연원했으며, Demokratia는 Demos(인민/평민)와 Kratia(통치/ 지배)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옮기면, 인민의 통치 또는 평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오늘날 인민 또는 평민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한 국가나 사회의 일반대중이며, 주로 사회적인 생산을 담당하면서 피지배자적 범주에 드는 사람들(people)을 일컫는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인민/평민’에는 여성도, 생산을 담당했던 노예도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인민이란, 노예를 가진 자유민 남성, 그리고 노예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성인 남성을 의미했다. 이것은 노예제에 기반한 국가라는 점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부터 민주주의가 정말로 ‘인민의 통치’인양 신화를 낳아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링컨이 말했다는 저 유명한 “민주주의는 인민의 정치이다”는 허구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또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진정한 의미의 \인민 통치\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민을 위한 정치도 거짓이다

동양에는 ‘民本’사상과 ‘爲民’정치라는 것이 있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학자인 맹자는 ‘이익이 아니라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이라면서, 백성을 위한 仁義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의의 정치란 백성들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백성을 위한 정치인데 구체적으로는 백성의 항상된 생업을 보장함으로써 군주에 대한 항상된 마음, 즉 충성심을 얻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맹자는 정신노동을 하는 사대부 계급과 육체노동을 하는 백성을 나눈 후, 백성이 사대부를 봉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지렁이 백성들이 하루 종일 평생토록 농사만 짓고 인간의 도리를 모른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으니 사대부가 옛 성현의 말씀을 들려주어 예의염치를 가르침으로써 백성을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민본사상과 인의정치란 당시 지배계급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민은 단지 생산하는 도구이며, 자신의 지배를 위해서 잘 통치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한다는 모든 정치는, 사실은 지배계급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근대 민주주의 혁명은 이 같은 기만적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848년 2월 발발한 프랑스 혁명에서 8시간 노동제와 노동권, 생존권을 요구하며 민주주의 혁명을 더 급진화시킬 것을 요구했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지는 잔혹한 총칼로 대응했다. 같은 해 3월 독일 혁명기에는 부르주아지가 혁명 발발 직후 곧바로 봉건지주귀족과 타협하여 인민의 뒤통수를 치고 말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돌아가도록 한다? 조금만 참으면 경제가 회복될 것이니 믿고 따라달라? 그러면서 부자에게는 감세하고, 정리해고에 재개발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인민에 의한 정치는 더더욱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을 천만 번 외친들 현실은 정반대임은 작년 촛불정국에서 여실이 드러났다. 대의제 민주주의 아래서 인민에게 주권은 없다. 허울 좋은 1인 1표라는 보통 선거권은 주권이 아니라 투표권일 뿐이다. 선거는 주기적으로 인민 자신을 지배할 권력자를 선출하는 것에 불과하다.

대의제도는 다수 인민대중의 국가권력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통치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서 고안된 지배계급의 엘리트 통치 제도이다. 대의제도와 선거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어떤 사회든 지배계급은 인민의 정치참여를 배제 또는 제한하기 위해서 갖가지 술책을 다 부렸다. 여성 참정권은 애초에 없었고, 재산의 정도에 따라 선거권도 차등 부여했으며, 남녀 평등 보통선거권이 확립된 이후에도, 관권, 금권 선거가 판치고 있다. 게다가 수천만 원 이상의 기탁금이 없으면 출마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확실히 국회의원의 자질에는 경제력이 포함된다.

인민은 어쩔 수 없이 대리주의 정치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 정치에 가장 적은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자본의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인민의 직접적인 자기통치다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말은 일견 모순이다. 인민은 통치나 지배 따위가 없는 것을 본질적으로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기통치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인민의 자기통치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다시 아테네 폴리스에서의 데모크라티아로 돌아가보자. ‘데모스’라는 말에는 평민, 인민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더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서 보면 ‘고기의 가장 맛있는 부위, 양은 적지만 가장 맛있는 부위’라는 뜻도 있다. 이 말뜻에서부터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원시인들은 어떻게 정치했나

농경이 발생하기 전, 인간이 어느 정도 군락을 이루며 살던 즈음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자. 여기에 성인남녀 각 5명씩, 합 10명이 사는 공동체를 가정하자. 이들이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았는지를 통해서 참된 민주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농경 이전에 사람들은 주로 사냥을 하며, 나물과 열매를 캐거나 따고,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 전 과정은 비록 자연의 힘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이었으며, 인류의 재생산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활동이었다. 여기 10명의 사람들은 생산과 재생산을 위해서 부지런히 자신의 몸을 움직여야 했다. 사냥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주인공 10명은 아침 댓바람부터 동굴에 모여 앉아 무언가를 논의한다. 어디로 가서 어떤 짐승을 사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리다. 멧돼지 사냥으로 결정났다. 이어서 그들 사이에 기술적인 분업이 이루어졌다. 갑순이가 길라잡이를 하고 갑돌이를 비롯한 남자 5명이 사냥도구를 챙겨서 떠났고, 나머지 여자 4명은 사냥 후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로 했다.

사냥은 만족할 만했다. 거대한 멧돼지 한 쌍을 잡는 데 성공했다. 사냥이 끝나고 다시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그날 밤은 축제의 밤이었다. 마음껏 먹고 마셨다. 을순이가 말을 열었다. “데모스를 어떻게 할까? 누가 멧돼지 잡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지? 누가 먹을지를 이야기해보자.” 토론 결과 데모스는 정돌이에게 돌아갔다.

스스로 생산계획을 세우고, 소비와 분배를 결정했다

10명 중 이 모든 과정에서 배제된 자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누구든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말했으며, 모두가 그 이야기를 경청하고 존중했다. 간혹 억지 논리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경우 이내 곧 스스로가 잘못된 견해임을 다른 이들의 지적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사냥에 참가한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구분은 없었다. 그들은 생산계획 단계에서부터 데모스의 분배에 이르기까지 그들 스스로가 결정했다. 이들은 경제를 담당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정치를 행하는 주체였다. 모두가 구상하고 기획했으며 모두가 그들의 육체를 움직였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데모크라티아였다.

이들에게 정치와 경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분업에서는 육체적 특성에 따른 기술적 분업은 있었지만, 결코 위계질서를 만드는 사회적 분업은 없었다. 성별에 따른 구별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없었다. 누구를 선출할 필요도 없었고, 누구나 자발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고도 수천 년에서 수십만 년을 잘 살았다. 아주 잘 살았다. 이게 민주주의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을 다스렸다. 더 정확하게는 다스림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떻게 이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구석기 시대 이야기라고? 이렇게 생각해버린다면, 영원히 이런 일은 당신에게 없을 것이다. 아마도 최소 수만 년은 이렇게 살았을 텐데 불과 수천 년 만에 피지배의 굴종을 당하다니,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을 자유, 하늘이 부여한 자유가 있다. 이제 인민이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 억압에 저항하여 자기 본래의 자유를 찾을 것을 본질로 하는 자들로 규정해야 한다.

중국 최초의 맑스주의자 리따차오는 “인민은 사리를 가늠할 수 있는 스스로 맑고 밝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대한 견고한 절개를 가진 존재”라고 했다. 특히 오늘날 인민은 더더욱 그렇다. 현대인에게는 말과 더불어 문자, 영상과 디지털 기술, 온갖 매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 상당히 자유로운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스스로 그것을 창출하고 있기도 하다. 만약에 인민이 권력의지만 충만하다면 언제든지 스스로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자본과 기존 권력이 호명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를 해방의 주체로 호명하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이 가능성을 백분 활용하고 억압받는 모든 사람이 의지를 갖고 연대한다면, 저 원시인들처럼, 그리고 계모임의 총무나 학급 분단장처럼 누구든지 모두가 정치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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