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유게시판
무위의 오용에 대하여...
둥글이 2007.04.16 2641
무위의 오용에 대하여...(2007.4.16)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눈앞의 현실에 마음 치우쳐짐이 없이 거울 비추듯이 덤덤히 대하며 유유자작하며 사는 삶. 이는 노장사상의 핵심인 ‘무위적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위의 개념은 ‘기심’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과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돈/권력)욕심’에 의해서 ‘황폐화되는 인간성’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졌다.




무위는 ‘의지작용’에 의해서 빚어지는 갖은 욕망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자기집중’을 중단하여 자아를 해방 시킬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열어준다.




문제는 이 ‘무위’가 ‘존재의 작용’에 대해서 그야 말로 ‘관조’하는 관점을 취하다보니, 이것이 상당수의 이들에게는 ‘극단적인 수동성’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되지 않는 것’의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에만 그 특유의 수용적 관점을 제공할 뿐,

‘자기 자신’이라는 변수가 그 ‘되지 않는 것’ 과 ‘되는 것’에 끼어들어서 그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이 무위의 개념은 ‘실존’ ‘주체’를 빼낸 그야 말로 극히 ‘객관적인 존재의 원리’를 ‘관조’한 극단적인 ‘관념론’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도’와 ‘무위’를 논하는 이들이 (핍박받는 민중/파괴되는 환경의)세상사에 끼어들어서 뭔가 ‘의지작용’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기며, 그냥 덤덤히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고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 이율배반적이게도 자신의 (실존적으로)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문제에 대해서는 ‘응당’ 그것을(열심히) 취하는 괴리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무위’의 개념은 그러한 이들에게는 ‘객관적인 존재의 원리를 관조한 관념론’적인 일 뿐이고, 자신의 피와 살이 물질적 필요를 갈구하는 ‘개인적인 삶’은 ‘현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상의 경계가 생기고, 작용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무위를 나는 ‘관념적 무위’라고 말한다)




이는 극 소수 좀 더 적절한 ‘무위’를 실현하는 이들이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 인류와 환경에 ‘공명’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모습이다.



이러한 극소수 좀 더 적절한 무위의 개념에 자신을 내 맡긴 이들은 ‘자아가 없다’는 의미를 다른 이들과 같이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무’라는 ‘(회의주의적)’ 의미로 여기지 않고, ‘(편견에 일관한)그런 자아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명증해진 자아를 인류와 세계로 확대해서 그 안에서 하나의 ‘작용’(사랑)으로 어우러지려는 시도를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무위를 나는 ‘삶으로서의 무위’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이들(관념적 무위)이 이 ‘무위’를 자기 자신의 현실과는 관계없이 대상화 하고 관념화 하여 결국 세상의 문제를 그냥 덤덤히 지켜보는 극단적인 수동성에 빠지는 것과는 달리, 그 극소수의 이들(삶으로서의 무위)은 ‘자기’라는 ‘변수’를 집어넣어서 덤덤히 세상을 관조하기는 하되, 현실이 자신의 작용에 의해서도 뒤바뀔 수 있음을 인지한다.




대부분의 [관념적 무위]를 즐기는 이들은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보여지는 세계현실을 마치 TV 시청하듯이 덤덤히 관조하고 있다.  

[능동적인 생명의 약동]은 오직 자신이 ‘지켜보는 것’ ‘지켜보는 대상’의 그것이어야 하지,

자신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세상과 조화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의지작용’은 오직 자신의 밥벌이에만 집중시킨다.




반면 [삶으로서의 무위]를 즐기는 이들은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아는 것은 전자와 같되,

세계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알아 자신의 ‘의지작용’이 영원의 한가운데에서, 즉 ‘지금’ ‘여기’에서 모든 존재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까지 판단한다.

그의 ‘의지작용’이 [관념적 무위]를 즐기는 이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밥벌이를 넘어선 인류와 환경의 영역에서 이루워지는 것은 당연한데, 이는 [관념적 무위]를 즐기는 이들이 ‘자아’를 버린답시고 세상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끊은 것과는 달리, 그들[삶으로서의 무위]를 즐기는 이들은 ‘(편견에 일관한)그런 자아’를 버리고 인류와 자연에 자신의 건전한 자아를 확대하여 능동적인 생명의 약동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기심’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과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돈/권력)욕심’에 의해서 ‘황폐화되는 인간성’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진 이 ‘무위’의 개념이, 그 개념이 만들어졌던 근본적인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길로 향해야 할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상황이다.




인류와 환경의 파국이 빚어지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을 TV 지켜보듯이 ‘관조’만 하고 있는 [관념적 무위]는 ‘황폐화되는 인간성’을 방조하는 역할만 하는 격임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이 황폐화에 맞서서 ‘해방된 자아’를 가진 이들의 세상을 위해서 [삶으로서의 무위]를 실현시킬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지만 굳이 일부로 ‘삶으로서의 무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무위’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결과이다.    




위에서는 ‘무위’의 개념을 크게 두개로 구분해서 나눴지만,

실지로의 ‘무위’의 개념은 우리 각각의 사람의 대가리 숫자만큼이 있다.

과연 나 자신이 지금 내가 진정 원하는 ‘무위적 삶’을 살고 있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 들어찬 ‘무위’의 개념이, 내 개인적 ‘기질’ ‘감정’ ‘경험’ ‘가치’에 의하여 ‘재단’되면서 내가 진정한 무위로 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지 되살펴볼 일이다.


0 개의 댓글
(댓글을 남기시려면 사이트에 로그인 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