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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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의 혁명
최종덕 2009.05.28 1355
죽음으로의 혁명

광명시 시민단체에서  세운 분향소를 치우라며 광명시장이 한 말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다. \"일국의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지, 자기 부인이 검찰조사를 받는다고 해서 자살한 것은 잘못됐다. 어린아이들이 그런 것을 보고 뭘 배우겠느냐\"며 노무현의 무책임론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불행했던 역사를 반복하는 것 같아 더더욱 씁쓸하다. 이런 사람들의 서슴없는 발언도 따지고 보면 조중동이 노력한 의식화의 산물이다. 과연 책임론이란 무엇인가 잘 따져보기나 하자.

조중동을 비롯한 극우보수파들은 노무현의 죽음울 어느 심약한 정신이상자의 자살로 몰고 가려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니 \대통령이나 해먹은 자가 책임지기 싫어서 자살이나 했지\라는 극악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우리 시대의 젊은 청년마저도 그들의 해괴한 무책임론 논법에 휘말려 따라할까봐서, 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개혁가들의 역사적 기록 몇몇을 제시해본다. 일제의 강점기에 즈음한 조선 말기 지식인의 죽음을 말이다.  

동학과 시대를 같이하여 생겨난 민족종교의 하나인 대종교 시조인 나철1863-1916은 일본 탄압에 항거하여 자결한다. 박은식과 정인보 그리고 신채호와 유영모의 생명의 철학을 계승하는 나철의 죽음은 역사적 저항이 어떻게 민족의 미래로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 교훈이었다.  

조선말기 문신이었던 민영환1861-1905의 자결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대로다. 국제적인 외교감각을 지녔으면서도 자주적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능약의 아픔을 개인의 아픔이 아닌 민족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자결을 한다.

또한 을사조약 무효와 5적 처단 요구를 상소한 조병세18827-1905의 굽히지 않는 저항은 삶의 자주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역사정신이었다.  민족적 굴종이라는 백척간두의 어려움에 처하자 조병세는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폐 5조(時弊 5條)의 상소를 올려 고종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간곡히 아뢰었다. 그 5조는 다음과 같다.

1. 재상을 신중히 선택하여 정강(政綱)을 세울 것.
2. 황제 주변의 간신배를 숙청하여 아첨을 막을 것.
3. 간관(諫官)을 두어 언로(言路)를 넓힐 것.
4.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잘 가려 임명하여 대외교섭에 신중을 기할 것.
5.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

지금이나 그때나 시황은 마찬가지였다.
나철의 정신적 스승이었으며 왕양명 계열의 대유학자였던 황현1855-1910의 역사적 아픔은 처절하기 그지 없었다. 국권의 피탈(被奪)에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7언절구의 저항시를 남기고 자결한다. 그의 절명시 한 구를 읊으면서 이글을 마친다.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새도 울고 짐승도 슬피 울어 온 강산이 찌프려졌네
무궁화 가득했던 온 세상이 이제 모두 죽어가는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사람사는 세상에 등불지킬 사람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구나  

그 분들의 역사적 죽음을 그 누가  한 개인의 무책임성으로 돌릴 것인가?  바로 그런 폐륜을 저지르는 조중동의 행위는 마땅히 시폐5조의 첫째가는 역적이리라.

청년들이여 \무책임한 죽음\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분개할 줄 아는 일 그것이 청년의 청년됨이라.
최종덕씀2009년5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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