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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박정희의 유령
이순웅 2009.10.14 1120
* 미디어스 [철학으로 세상읽기] 열세 번째 글, 문성원 선생님이 쓰셨습니다. 부제 \유령은 삶의 태도에 파고든다\는 미디어스 측에서 달았네요.  
미디어스에 들어가 보니 이른바 \꼴통\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이제 슬슬 입질이 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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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령  
[철학으로 세상읽기] 유령은 삶의 태도에 파고든다

2009년 10월 12일 (월) 14:25:40 문성원 부산대 교수  webmaster@mediaus.co.kr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싸늘하다. 벌써 시월 중순이다. 추석도 일찍 지나고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간다. 그런데 올해는 시월을 맞는 감회가 여느 해와 또 다르다.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10.26으로 유신독재가 붕괴된 지 30년째 되는 해다. 30년이면 한 세대를 헤아리는 세월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장년이 되는 기간이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고 지금은 그때에 비추어 어떤 변화가 있는지 돌아볼 만한 때다.

이미 많은 논의가 있는 줄 안다. 며칠 전에 부마항쟁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있었고, 박정희 정권의 공과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숱한 논란이 있었다. 개발 독재의 시기가 막을 내린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박정희의 유령이 한반도의 중심부에 어른거리고 있으니 이거 큰일이라는 한탄의 소리가 아직 드높다.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과거는 그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돌아와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우리에게 다시 들이미는 유령과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만나는 것이 여직 박정희의 유령이라면 어째 상그럽다 못해 끔찍하다.

세상에 이러저런 유령들이 떠돌아다닌다고 해도 그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헛헛할 때다. 사실 유령 얘기를 꺼내는 데리다의 논의가 부각된 것도 현대 서구 문명이 자신감과 방향성을 잃고 헤매고 있음을 반영하는 증좌라고 할 수 있다. 갈피를 잡기 어려우면 유령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햄릿이 죽은 부왕(父王)의 유령을 쫓아가듯 말이다. 때로 착하고 정의로운 유령, 그런 욕구에 부합하는 유령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령도 유령 나름이다. 박정희의 유령이라면 수년 전에 <효자동 이발사>라는 영화에 등장해서 자신의 운구 행렬을 멈추는 역할을 했던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유령이 출몰하는 한, 그 유령의 정체를 밝히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극소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지적하듯 시대착오적인 경제성장에 대한 갈망이 그 주요한 뿌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단순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그러한 환상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그 시행착오의 폐해를 가능한 한 줄이는 데로 모아져야 하는 것인가?

박정희의 유령을 등에 업었거나 업고 있는 정치가는 이명박이나 박근혜, 이인제 등에 그치지 않는다. 코미디언에 가까워 보이는 허경영은 그렇다 치더라도, 운동권 출신이라는 김문수까지 박정희의 유령을 환대하다 못해 영접하고 있다. 최근에 김문수가 한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우리가 세계 일류 국가로 가기 위한 다리를 놓았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은인이다. 과거에는 자신도 박정희의 정책에 반대했지만 이제와 보니 박정희가 맞았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 수출주도형 경제, 중화학 공업으로의 전환, 이 모두가 그렇다고 한다([프런티어타임스] 2009년 10월 10일자 인터뷰 기사 참조). 박정희의 유령은 이제 ‘개과천선’한 차기 대권주자인 김문수를 통해 ‘1류 국가’의 꿈을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는 턱이다.

백낙청은 박정희가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온갖 강압을 동원했고 일정 시기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방식을 통해서이기는 했으나 어떻든 경제성장에 성공한 인물이라는 얘기다. 유공자냐 아니냐를 둘러싸고도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지속 불가능한’에 방점을 찍는다면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박정희의 유령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심각한 문제를 낳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성장 패턴이 오늘날에도 연장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이며, 세계 ‘1류 국가’에 대한 왜곡된 꿈이다.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지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우리의 일인당 국민총소득은 10배 이상 늘었고 경제규모는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15위 내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배구조는 근래 들어와 악화되는 추세에 있고(이제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 소득의 8배에 달했다고 한다), 환경상태도 날로 나빠져 다보스 경제포럼이 매년 발표하는 나라별 환경지속가능성 지수 순위는 120위권을 밑돌고 있다. 자살률은 몇 년째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청소년과 노인의 자살이 많아 살벌하게 경쟁적이며 팍팍한 사회분위기를 드러내 준다. 이런 상황에는 이미 박정희의 유령이 깃들어 있는 것 아닐까.
        
박정희 시대의 ‘성공신화’를 이으려는 이명박 정부는 ‘녹색 성장’을 내세우면서도 강조점을 ‘녹색’에 두지 않는다. ‘녹색’은 성장을 위한 방편이고 수식(修飾)에 가깝다. 성장만이 살 길이며, 한참 기울어진 분배의 문제도 뒷전이다. 사회복지비 지출에는 인색하면서 부자들의 감세에는 관대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비판적인 입에는 집요하고도 교묘하게 재갈을 물리고 틀어막을 줄도 안다. 진보적 논객인 진중권이 대학의 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희망제작소 박원순 이사가 국정원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더니, 급기야 김제동처럼 현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방송인들까지 자신이 맡았던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정권의 직접적 관여 때문이 아니라면 박정희 유령의 세심한 보살핌 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정작 풀기 힘든 문제의 핵심은 유령이 파고들어 터를 잡는 곳이 사람들의 삶의 태도며 사고방식이고 그걸 뒷받침하는 사회적 조건들이라는 점에 있다. 이제 경제성장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하는데도, 일자리 창출의 방식을 재고해야 하는데도, 치열한 경쟁에 희생되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하는데도, 또 우리를 끝없이 불안케 하고 주어진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을 점검해봐야 하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성장의 양적 지표와 그 효과에 대한 기대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그러한 한, 박정희의 유령을 불러들이는 이명박이나 김문수 따위의 ‘1류 국가’ 푸닥거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형편이라면 우리는 박정희 이후의 한 세대를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광주항쟁을 겪었고, 박정희의 뒤를 이은 군사독재와 싸워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목도했고, 이 땅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을 보았으며, 산아제한에서 출산장려로 정책이 바뀔 수밖에 없는 급속한 사회변화를 경험했고, 컴퓨터와 인터넷을 생활환경으로 받아들였으며, IMF 구제금융과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를 체험한 우리는, 미처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넘어서지 못했다. 박정희 시대의 극복은 아직도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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