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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배제와 거래의 정치에 대응하기 - 박준영
hanphil 2009.10.20 1152
*14번째 글입니다.


배제와 거래의 정치에 대응하기  
[철학으로 세상읽기]이봐, 좀 더 영악해지라고!

2009년 10월 19일 (월) 14:46:36 박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webmaster@mediaus.co.kr  


MB정권의 변태

MB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가 40~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촛불정국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이 지지율을 놓고 조바심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성장발달이 더딘 내 자식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둥대는 걸 보는 것 같아 오히려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겨운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제 생명과 그것을 부여해 준 부모에 감사하기보다 여전히 거짓말하고, 옛 잘못에 대해 사과 한마디도 없으면서, 마치 효도라도 하는 양 유세를 부릴 때면, 못난 자식,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보가 불쑥불쑥 솟구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권이 예년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1)  
  
인민을 신민으로

부르주아 국가의 권력이란 것이 태생적으로 노동인민의 지지율을 기반으로, 또 그 생산물과 인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통치의 모순’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통치하는 자는 통치 당하는 자의 활력에 기생한다. 외관상 ‘착취’나 ‘배제’로 보이는 모든 것이 실상 ‘자기착취’나 ‘자기배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여기서 유래한다. 따라서 권력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즉 기생활동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인민을 착취하고 배제해야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인민의 저항은 국가의 무능력으로 비춰지며, 그것은 곧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멸시감으로 현상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나마 합리성을 갖춘 권력이라면 저항을 불러일으켜 가며 자기모멸감에 빠지기보다는 다중의 요구를 적절히 수용하고, 형식적으로나마 권력분점을 허용함으로써 다중이 스스로 정치권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자기기만의 놀이터에서 놀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2) 이렇게 되었을 때에만 권력은 비로소 다중에 대한 ‘책략’에서 앞서 나아갈 수 있다.(3) 마침내 이 책략이 인민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히고, 권력의 호명에 자동적으로 반응할 때 저 유명한 ‘자발적 복종’(Spinoza)이 완성되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 자유의 선택!

MB 권력기계가 초기의 기능부전 상태를 벗어나 균형 감각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책략’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 즉 통치의 모순과 저항의 필연성이라는 그 조건을 인정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4) 일단 책략의 조건을 인정했다면 이제부터 인민을 신민으로 호명하기 위한 여러 기제들이 동원될 것이다. 선거는 인민의 능동적 저항의 본성을 신민의 수동성으로 조련하기 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상투적인 기제다. 따라서 ‘민생’이 선거승리를 위해 동원되며, 각종 혜택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선거를 통한 ‘선택의 자유’를 부르주아 권력의 ‘자유의 선택’으로 가공하는 것은 선거기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 이데올로기 전술을 펼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MB권력의 경우도 이 경로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여기 패착이 도사리고 있다. 가까이는 쌍용차가 있고, 좀 더 멀리는 용산이 있으며, 더 멀리는 광우병이 있다. 이른바 파격적이며 적절한(?) 정운찬 총리 기용이라는 정치적 패는 이 패착을 선거기간까지 끌고 가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이 이끄는 관료체계는 용산과 쌍용차 그리고 광우병이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그 계급 계열, 즉 배제된 자들(the excluded)(5) - 프롤레타리아 - 다중이라는 유령의 계열을 달래면서, 애도와 위로의 환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운찬은 선거기간이 끝나면 버려질 것이다. 만약 이 책략이 성공해서 저 유령의 게토를 넘어서면 어떻게든 한나라당 장기집권의 터가 잡힌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인민의 마키아벨리즘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MB권력이 자신을 위협하는 유령들을 달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에서 중간계급들에게 ‘빅딜’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이만큼 했으니, 그 ‘고귀한 도덕적 공분’은 내려놓으라는 것. 하긴 중간계급의 본성이란 작은 거래들로 이루어진 것이고, 거기서 가족을 부양하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허용된다면, 아니 그런 미래 보장(이것은 결국 환상이고, 다시 환멸로 귀착될 테지만)이라도 해준다면 기꺼이 신민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언제나 권력은 이들을 쉽게 노리개 삼아 권력을 전유했다. 정운찬 패는 결국 이 선거 유동층을 신민으로 만들어내는 순간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른 모든 책략들이 이 전략계열 주변에 배치된다. 광장을 조성하는 것, 놀이 공간을 주는 것, 아파트를 지어 이 계급의 자산 가치에 허영심을 불어 넣어 주는 것, 교육에 대해 뭔가를(그게 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려주는 것, 그럼으로써 상처받은 프티부르주아의 좁은 가슴과 도덕성을 위무하면서 정작 실제로 고통 받는 자들은 배제하는 것, 경찰로 둘러싸 고립시키고, 일인 시위를 막고,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구속하고, 해고하고, 지방발령, 대기발령으로 더 멀리, 더 구석으로 밀어붙이면서, 이 두려운 게토를 더 심하게, 더 노골적으로 주변화하는 것, 기억으로부터 동시에 정치로부터.
  
이 모든 것이, 다시 말해 이 모든 MB의 책략이 성공할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이 권력의 중간계급 호명에 아직 답하지 않은 다중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던져져야 한다고 본다. 즉 이렇게 말이다. 과연 당신들은 촛불 이후로 더 영리해질 수 있을 것인가? 거래라고? 좋다. 거래하라. MB가 이행하겠다는 모든 것을 ‘촉구’하라. 그런데 이 권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거래 이후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라. 지지율을 높여주어라. 좋다. 하지만 그것이 경제적 이유일 뿐이라는 것, 권력은 여전히 다중의 것이라는 것을 매순간 드러내라. 앞에서 읍소하지만 언제든 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영리한 것이다. 그것이 권력을 다루는 인민의 기술, 즉 인민의 통치술이며, 인민의 마키아벨리즘이다. 피렌체의 능수능란한 외교관이 말 한 것처럼. 이렇게, “이봐, 좀 더 영악해지라고!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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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MB권력기계의 변태, 즉 억압의 패러다임(조임쇠)에서 규율의 패러다임(밈쇠)으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 참조. “노무현·김대중의 서거와 MB, 반동의 도래”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28975§ion=sc20§ion2= ‘벼리’는 필자의 필명임)

각주2) 이를 마르쿠제라면 ‘억압적 관용’이라고 할 것이다.

각주3)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소위 국민-참여정부는 이러한 권력과 인민의 길항의 메커니즘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정치는 일종의 합리적인 \give and take\ 과정이었으며, 때로는 프롤레타리아 편에서 때로는 부르주아 편에서 이 거래를 교묘하게 수행하였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바로 이 거래의 피드백이 나름대로 선순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관점에서 이 두 정권은 이 방면에서 기여한 바가 있다.

각주4) 만약 이 정권이 이 모순과 필연성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 파쇼화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가지 않으리라 전망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권이 억압을 미시적 방면에서 철저하고 교묘하게 구축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이를테면 집시법이라는 하위법의 개정과 강제적 시행을 통해 상위법인 헌법을 무력화하는 방식, 신체적 폭력보다는 손배 가압류, 벌금을 통해 다중에게 법률적 상해를 입히는 방식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를 또 다른 형태의 ‘미시파시즘’이라고 규정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각주5) 슬라보예 지젝의 개념이다. Slavoy Zizek,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 New Left Review No. 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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