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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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링의 자유론
이병창 2021.03.17 107
자유론에 관한 책을 쓰다가 셸링의 자유론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의 인간 자유의 본질을 여러번 읽었으나, 갖가지 의문점에 부딪혔다. 일단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그의 자유론을 정리했으나, 여전히 모호한 것 같다.
셸링의 자유론에 관해 혹시 아시는 분이 있다면 아래 글을 읽어보시고 비판해 주시면 고맙겠다.
논문이 아니라 책의 일부라서, 논증적 형식의 글이 아님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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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2절 셸링과 인간
1) 셸링
앞에서 양심은 즉각적인 행동이며 동시에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한다고 규정했다. 양심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 시도했던 대표적 인물이 서양에서는 철학자 셸링일 것이다. 동양에서라면 단연 왕양명일 것이다. 양심이라는 말 자체가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는 그의 말에서 따온 말이다. 이 자리에서는 서양철학자 셸링 을 통해 양심의 개념을 이해해 보자.
그의 양심 개념은 그가 생전에 발표한 최후의 저작인 『인간 자유의 본질』이라는 저서에 등장한다. 이 저서는 1803년 이후 초기에 자연과 체계에 대한 그의 관심이 정신과 자유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 이후 작성된 책이다. 여기서 그는 그의 자연의 체계가 숙명론적이라고 비판한 프리드리히 슐레겔에 대해 응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저서에는 그가 평생 대립했던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년)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다분하다 .

2) 자연의 두 원리
이 책에서 셸링은 범신론적 체계를 기계적인 체계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역동적인 체계로 이해한다. 이런 역동적 체계를 통해 그는 악의 가능성과 자유의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의 이론에서 최종적 도달지점은 칸트가 예고한 자기강화하는 힘(포텐츠, 멱, 제곱의 힘)인데 이것은 그에게서 양심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우선 그의 자연철학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그의 체계에서 핵심 개념은 신의 실존과 신이 실존하는 근거라는 두 개념이다. 셸링에서 신은 곧 자연이니, 이것은 곧 자연사물에 대한 설명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자연사물도 그 실존과 실존의 근거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실존의 근거는 사물의 형상이 실존하기 위한 토대[매체]이다. 우리는 이것을 물질성의 원리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실존의 근거는 동시에 사물의 일반 원리를 개별화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반면 실존은 신이 자기를 실현하는 계시의 힘이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자신의 타자인 자연에 드러낸다. 형상은 사물을 사물로 만드는 것[말씀, 빛]이며, 이런 형상은 곧 물질적 원소를 하나로 통일하는 힘이다. 우리는 이것을 형상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실존과 그 근거, 형상과 물질, 통일과 해체는 플라톤 이래 철학의 두 근본 원리이다. 그런데 셸링의 자연철학에서 독특한 관점은 그가 두 원리를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상호작용한다고 본다는 데 있다.
셸링은 물질성은 한편으로는 실존이 실현되는 질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립하는 형상의 원리를 촉발하는 반작용의 힘을 지닌다. 그럼 점에서 실존의 물질적 근거 속에는 이미 말씀을 향한 동경, 삶의 시선, 영혼이 들어 있다. 마치 빛이 있기 위해서는 빛을 반사하는 어둠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예를 들자면, 보색의 관계가 그렇다. 어떤 색은 자기의 반대되는 색갈을 반향한다. 그 속에는 이미 반대되는 색을 향한 동경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 사물의 형상은 관념이며 이런 형상의 실현이 곧 신의 계시 과정인데, 이런 형상에는 이미 자기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힘이 내재하고 있다. 그는 이 의지를 단순한 형상 즉 오성[Verstand]에 대립하는 의지 즉 정신[Geist]으로 규정한다. 이 정신은 곧 사물의 요소를 통일하는 힘이므로 근본적으로 사랑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형상을 실현하는 힘이지만 그것이 이미 물질적인 힘 즉 의지이기에 거꾸로 자기를 해체하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그러므로 사물은 자신을 완성하는 순간 이미 자기를 해체하며 이런 물질적 힘은 새로운 형상을 촉발하여 그것이 실현되게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끝없는 진화 속에 있다.
이 진화의 과정은 물질적 원리가 형상적 원리를 반작용하며, 이 형상적 원리가 실현되는 가운데 이미 물질적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자연 속에서 물질과 형상이라는 두 원리는 점차 밀접해지며 인간에 이르러 물질 속에서 형상이 의식[관념적 인식]되며, 관념은 곧바로 물질적 의지[자유의지]로 실행된다. 마침내 신에 이르러 두 원리는 완전한 통일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셸링의 이런 자연철학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여지는 없다. 다만 그의 이런 자연철학이 그의 인간론의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는 사실만 말하고 가기로 하자.

3) 인간론
이와 같은 물질적 원리와 형상적 원리 사이의 역동적 체계로서 자연은 그의 인간론의 배경이 된다.
인간의 단계에서 실존의 근거는 곧 욕망이다. 이것은 개체를 실존하게 만드는 물질적 토대가 되며 동시에 개체를 모든 다른 개체와 분열하게 만드는 이기성[Selbstheit]의 힘이다. 이런 이기성 속에는 이미 개인들의 통일을 향한 동경이 들어 있다.
반면 인간의 본질 즉 형상은 오성[Verstand], 도덕 법칙이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보편적 통일을 이루게 한다. 그 구체적 형상은 곧 민족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런 통일을 향해 나가는 물질적 의지가 있으니 이것이 사랑의 정신. 또는 보편적 의지이다.
인간은 이런 욕망의 힘과 사랑의 정신 사이의 상호 대립을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두 원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메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욕망의 힘은 오성이 실현되기 위한 토대이지만 오성의 빛을 반사하며 이를 향한 동경을 가진다. 사랑은 거꾸로 오성을 실현하지만 그 자체 물질적 의지 즉 사랑의 정신을 지닌다. 사랑이 물질적 의지인 한, 이 사랑의 의지는 완전하지 못하다. 여기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자연의 전체 진화하는 과정 중에서 인간 속에서 두 원리 물질성과 정신성의 원리는 가장 가깝게 다가왔지만 그래도 아직 신에게서 나타나는 완전한 통일에 비추어본다면 두 개의 원리는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셸링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본성을 지닌다고 보지는 않는다. 각 개인은 이 두 원리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각기 독자적으로 형성된 존재이다. 이 두 개의 원리는 상호 순환을 통해 독자적인 방식으로 결합되는데 그사이에 무한히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두개의 원리의 결합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형성되는 물질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물질적 원리와 형상적 원리의 상호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형성되는 관계이므로 마치 성격과도 같이 가변적인 본성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고정될 뿐이다.


4장 3절 악의 기원과 자유의지
1) 악의 기원
앞에서 셸링의 자연철학과 인간론을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자연이든 인간이든 두 개의 원리 즉 실존과 실존의 근거, 형상과 물질, 통일과 해체라는 두 힘이 대립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그 관계는 마치 메비우스의 띠와 같은 관계이다.
셸링은 이런 인간론에 기초하여 악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셸링은 악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로 보았다. 이런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론은 그에게서는 문제가 있는 이론이 된다. 셸링은 이런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악을 그 자신의 인간론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자주 악은 불완전성, 결핍, 부조화를 통해 설명된다. 대체로 물질적 원리가 이런 것에 해당되니, 물질적인 것이 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완전성과 불완전성 부조화와 충만과 결핍 조화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물질과 형상이라는 두 원리가 상호작용하는 것인 한에서 양자는 항상 상호 침투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것을 악으로 한다면 모든 것이 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셸링은 악을 어떻게 설명하려 할까? 그는 물질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이 상호 작용하지만 여기서 진화라는 관점에서 그 위상은 구분된다. 자연의 진화 과정에서는 형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에 대해 우위이며 그것을 지배한다.
자연 사물의 경우 그 자체 물질적인 것은 자연의 운동 과정을 통해 스스로 극복되면서 형상의 원리가 실현된다. 그런 점에서 자연 사물은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선한 존재이다. 자연사물은 성스러운 침묵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도 전체적으로는 사랑의 정신이 결국 욕망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서 일시적인 혼돈이 발생한다. 셸링은 이런 혼돈은 잘못된 사유[logismo notho]에 기인한다고 본다. 즉 이기적 욕망과 사랑의 의지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면서 이런 혼돈이 생겨난다.
물질적인 욕망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원리 즉 사랑이 반작용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만일 잘못된 사유로, 욕망에 집착하면서 사랑의 정신이 이런 욕망의 힘에 반작용하지 못하고 욕망이 오히려 사랑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이 이기성, 자기 보존의 원리 즉 악이 된다. 이 경우 욕망이 중심이 되고 사랑의 정신은 오히려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면 올바른 인식 속에서 욕망의 힘에 대해 사랑의 정신이 반작용하게 된다면 욕망은 오히려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니, 이러한 경우 선이 등장한다. 선은 욕망이 없으면 그 토대가 없게 되며 욕망에 대해 반발하지 못하면 실현되지 않는다.
악한 인간도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사랑은 결국 그의 물질성이 실현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젊었을 때 아름다운 사랑이 후일 결국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사실이다. 결혼 이후 배신감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반면 선한 인간도 욕망에 빠진다. 그러나 선한 인간에게서는 그의 욕망은 오히려 그의 사랑의 정신을 반발하게 하는 힘이 된다. 성인 프란체스코는 어릴 때 온갖 방탕과 탐닉에 빠졌다. 하지만 그에게서 이런 방탕과 탐닉은 신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담고 있었고, 결국 사랑의 정신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런 점에서 프란체스코에게서 욕망은 오히려 선의 실현을 위한 수단, 선을 촉발하는 힘이 된다.

5) 내적 필연성으로서 자유
이상과 같은 인간론과 더불어 악의 가능성을 설명한 다음 셸링은 자유의 가능성을 설명하려 한다.
그는 자의적인 선택으로서 자유의지도 비판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의적인 선택은 자연 속에 우연성을 끌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은 하나의 필연적 체계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셸링의 체계는 역동적 체계이며 기계적인 체계를 거부하므로, 의지의 기계적 결정론 또한 비판한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니 철학은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설명되는 것인가? 역동적 체계라는 관점에서 그에게서 자유는 내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의 행위는 자신의 내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적 본성을 그는 앞에서 말했듯이 모두에게 공통적이라 보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적 원리와 물질적 원리가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두 개 원리의 관계 방식은 각 인간에게서 천차만별하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다른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선이든 악이든 인간의 본성은 자연적으로 태어나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두 개 원리의 투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행위의 필연성이 나오는 본성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성격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셸링은 비록 인간의 행위가 그의 본성, 성격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본성 자체가 그가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필연적이지만 책임있는 행위라는 개념을 우리가 자주 겪는 하나의 경험적 사실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구를 사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그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이 비도덕적이라면 그는 이 행위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셸링은 오히려 그 자신이 이미 그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경험적 사실이 입증해준다. 왜 그런 책임의식이 드는 것인가? 그것은 그의 본성 자체가 그가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이기심의 허기
인간의 본성은 형성과정을 통해 선이나 악으로 형성된다. 모든 행위는 이런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영원히 고정된 것인가
셸링은 악의 본성에서 선한 본성으로 거꾸로 선한 본성에서 악의 본성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그 가운데 악의 본성이 선한 본성으로 전환되는 과정만 설명해 보자.
인간의 욕망 속에는 이미 정신적 원리를 향한 동경, 시선이 들어 있다. 그게 인간의 영혼이다. 이런 영혼이 있기 때문에 악 즉 이기심의 지배 속에 이기심의 허기가 등장한다.

“바로 여기서 이기심의 허기가 일어난다. 이 이기심은 그것이 전체 및 통일성과의 관계를 끊는 만큼 더 목마르고 더 가난하게 되지마 그렇기 때문에 더 욕망에 휩싸이게 되고 더 허기에 차며 더 악의에 가득 차게 된다.”

이기심의 허기는 이기심 속에 영혼이 들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영혼 때문에 이기심을 통해 아무리 충분히 욕망이 만족되더라도 무언가가 부족하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어떤 영혼의 갈증이 생겨난다.
그런데 악한 자는 이런 영혼의 갈증을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이런 영혼의 갈증을 욕망의 갈증으로 오해하게 되면서 더욱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욕망은 충족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한 욕망에 사로잡히니 이것이 곧 이기심의 허기이다. 이런 욕망의 허기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충족되지 않으며 그가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사랑을 실현할 때 비로소 충족되는 것이다.
이기심이 이처럼 더욱 강화되는 것은 결국 그것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이를 매개로 다시 사랑의 정신이 출현하기 위한 매개가 된다. 그는 이를 질병에서 생겨나는 염증을 가지고 설명한다.

“모든 개별 인간 가운데서 빛을 발하는 생명의 시선은 죄인에게서 소모적인 불로 타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생동적인 유기체 가운데 이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개의 요소나 체계가 전체를 벗어남과 동시에 이 요소가 맞섰던 통일성과 음모가 열로 느껴지고 열에 의해 염증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여기서 셸링은 질병 때문에 몸에 염증을 일어날 때, 이 염증은 질병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에 숨어 있던 건강의 힘이 병든 신체 속에 작열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염증은 곧 정신의 회복에 의해서만 치료될 수 있다고 본다.

7) 양심의 개념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셸링은 양심이라고 개념에 이르게 된다.
셸링에게서 양심이란 역동적 관점에서는 이해되어야 한다. 양심은 욕망과 따로 떨어져 있는 순수한 정신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순수한 정신은 관념에만 머물 뿐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순수한 정신의 원리가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그 물질적 토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 욕망은 한편으로 물질적 토대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신 실현을 촉발하는 반작용하는 힘이다.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강하게 인간의 정신적 힘 즉 사랑의 힘이 반작용하게 하니,
거꾸로 말하자면 사랑의 힘은 욕망의 힘의 작용을 통해 그것을 오히려 넘어서는 힘으로 발전하니 바로 이것이 칸트가 예고했던 자기 강화하는 의지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내면 속에 있는 양심의 힘이다. 셸링은 이를 종교성의 원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셸링은 칸트가 자유의지를 욕망의 힘에 대립한다는 측면에서 파악하면서 이를 의무로 규정했다고 보면서, 이런 칸트를 비판한다. 칸트는 욕망이 오히려 사랑을 반작용하게 하면서 사랑을 촉발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셸링은 이런 양심의 특징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우선 그것은 ‘청명한 인식’, ‘정신적 빛 그 자체’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인식은 “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즉 직관적인 것이다. 그는 이것을 ‘내심의 목소리’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는 대로 행위하는” 것이니, 가치 판단에 따른 자유의지이다. 더구나 이런 자유의지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결단이니, 선택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카토의 비유가 등장한다.

“카토가 올바르게 행위했고 그 결과 그가 이렇게 행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다른 식으로 행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덕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에게 이러한 행위의 필연성을 돌린다.”

이런 즉각적 결단으로서 양심은 욕망의 만족에서 얻어지는 쾌락과 다른 종류의 쾌락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양심은 어떤 강제 없이 스스로의 힘을 자기를 발휘하게 된다. 이런 점은 마치 욕망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발휘되는 것과 같다. 이점에서 그는 양심을 취미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이성적 존재로서 아름다운 영혼이고자 하며 정의로운 존재보다는 고상한 존재로 일컬어지기를 원하는 도정에서는 도덕론이 일반적인 취미 개념으로 환원될 것이며 이에 따르면 죄악은 곧 잘못된 취미나 타락된 취미 가운데 있게 될 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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