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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 소돔의 120일 -파졸리니 감독- 영화 후기입니다.^^
이찬희 2007.12.12 3502
살로 소돔의 120일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 영화 후기

이찬희

현대인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영화를 보게 된다. 그 많은 영화 중에는 한 번 보고 또다시 여러 번 보고 싶게 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본 것을 후회하고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영화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소개할 영화는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매우 특별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세계 영화사에 하나의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한 번 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이며 동시에 탐구하는 영화 애호가라면 평생에 한 번은 꼭 봐야 하는 영화이다.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최근 우리에게도 친숙한 (구)허리우드 극장( 현재 필름아트시네마)에서 이탈리아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특별전이라는 형태로 상영되었다. 영화사에 유명한 걸작이라서 그런지 재미 없는(?) 예술 영화 전용 영화관임에도 불구하고 관람석은 거의 만원을 이루었다. 옛날 학창 시절 영어 자막 비디오 테입을 영화 지망생 선배로부터 빌려서 돌려봤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과 친구 여자 아이는 보는 중간에 밖으로 뛰쳐나가 내용물을 쏟아냈다는...
이 영화는 작품성과는 별개로 표현의 수위와 폭력성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관람객의 대부분은 여성 관객이었는데, 이 영화의 폭력적 표현의 강도가 얼마가 강렬하였는지 관람 내내 관객이 불편함을 표시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보통 여성분들은 공포영화나 잔인한 영화를 보면 영화관에서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 잔인한 표현의 수위가 관객들에게 비명이 아닌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도록 강요한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으로 잔뜩 긴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이토록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폭력적인 장면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표현의 미학적 구성과 절묘하게 결합한다는 데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관객이 폭력적인 장면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을 통해 영화로부터 감독으로부터 관객이 직접 폭력을 당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이전에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할 폭력의 극한, 폭력의 미학을 완성한다.
1975년 만들어진 이 영화는 파졸리니 감독의 최후의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완성한 직후 감독은 ‘살로 소돔의 120일’의 배우였던 동성애 애인에게 맞아죽었기 때문이다. 해변가의 쓰레기장에 버려진 감독의 시체는 당시 이탈리아 언론에서 하나의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 중에는 당시 그간의 영화 작업을 통해서 끊임없이 정부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고 신성모독을 일삼던 감독을 테러하고 은폐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결국 자신의 영화같이 살다 자신의 영화처럼 죽은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한 편에서는 인간의 성적 욕망과 새디스트적 욕망의 분석을 통해 권력과 자본을 비판한 정치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감독의 광적인 폭력과 성에의 집착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감독의 과거 다른 작품들을 보아 온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후자와 같은 단순히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게 된다. 영화는 내내 폭력적이되 폭력적 장면에 주목하지 않으며 내내 성적 수위를 넘어서되 관객의 성적 상상을 짖밟는다. 게다가 감독은 당시 이탈리아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던 문필가이면서 동시에 운동가였다. 또한 감독의 동성연애를 빌미로 예술적 창조력을 폄하하는 것 또한 시대착오적이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파시즘이 극성하던 이탈리아가 배경이다. 원작은 나폴레옹 시기에 성적 도착을 주제로 글쓰기를 일삼던 유명한 ‘사드 백작’의 동명 소설이다. 바로 사드 백작의 이름에서 오늘날 가학적 도착의 욕망 일컫는 용어인 ‘새디즘’이 탄생한 것이다. 사드 백작에 관한 영화로는 ‘퀼즈’라는 매우 유쾌한 영화가 있다. 비록 살로 소돔의 120일이 잔인한 영화지만 관객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관람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영상미이다. 끝간데 없이 잔인한 폭력의 장면에서 색채와 구도의 아름다움은 더욱 선명하게 발산된다. 배경 음악 또한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음악 작곡가의 작품으로 고통과 처절함 그리고 잔인한 억압자의 미소를 숭고하면서도 희화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주제, 영상미, 그리고 음악은 파졸리니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또 다른 명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작품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게로 이어진다.
파졸리니는 나폴레옹 왕정 시기의 소설을 2차 대전의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로 각색하였다.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지옥의 입구, 망상의 장, 똥의 장, 피의 장이라는 네 부분으로 진행된다.
지옥의 입구
어느 날 이탈리아 파시스트 4명이 모여 서로를 국무장관, 총리, 외무장관, 법무장관으로 임명하고 위대한 쾌락의 왕국을 완성하기 위해 정책을 논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하 군인을 시켜 지역의 젊은 남녀 수십 명을 납치하여 어느 고립된 성 안으로 데려온다. 일부 젊은이는 스스로 자원한 것 같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납치한 젊은 남녀를 심사하는 장면인데 조금이라도 육체적 흠이 있는 아이는 되돌려 보낸다. 여기선 도덕적 순결함을 내세우는 종교적 위선과 최상의 아름다움을 상품화하는 자본의 세밀한 욕망을 빗댔으리라. 영화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소녀인데 치아가 하나 빠져 있어 심사에서 그만 아깝게 탈락하고 만다.
망상의 장
여기서는 이 납치극의 주도자와 하수인과 납치된 소년 소녀가 어떤 고급 홀에 모여 왕년에 매우 화려한 활약을 했다는 매춘부의 무용담을 듣는다. 일종의 타락한 정부-4명의 지도자가 전부인-의 이념을 세뇌시키고 훈육시키는 과정이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늙은 매춘부는 자신이 과거에 접대했던 고객들의 매우 추악스런 변태적 욕망들을 매우 뿌듯한 추억으로 풀어놓는다. 그리고 납치극의 주도자와 하수인은 그런 변태적인 가학 행위를 납치된 소년 소녀에게 실행한다. 뭐랄까? 감독 자신이 이탈리아인이기에 자신의 조국의 사회 변혁 이론가인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추악한 국가권력의 축소판인 여기 뚜쟁이들의 공간에로 풍자적이면서 비극적 형태로 투영한 것은 아닌가 한다.
똥의 장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한 장면이다.
계속해서 활약을 일삼는 왕년의 잘나가던 매춘부는 자신이 소녀였던 시절을 회상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한 고객이 있었는데 그 고객은 매춘녀의 배설물에 대한 도착이 있었다. 그 고객은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그 행위에서 커다란 쾌락과 행복을 얻는 것이었다. 그 도착이 극에 다다르자 그는 어느 뒷골목 거지 노파의 배설물을 구해다가 도착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홀에서 이야기를 듣던 납치당한 소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 소녀가 우는 이유에 대해 한 하수인은 소녀가 납치당할 때 결사적으로 막아섰던 어머니가 살해당했기에 그 생각이 나서 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자 이 영광스러운 왕국의 한 명의 법무부(?)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운다고 해서 너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푸리라 기대하지 마라!” 이렇게 말한 후 그 뚱뚱한 장관은 뚜벅뚜벅 홀 가운데로 걸어가 바지를 걷어 내리고 배설을 한다. 그리고 울고 있는 소녀에게 그 배설의 결과물을 먹도록 명령한다.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비를 구하던 소녀는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울면서 그 명령에 순종한다. 그 순간 이 홀의 밖에서는 전쟁터에 쏟아지는 폭격기의 굉음과도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그만 모두 신음소리를 속으로 감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 영광스러운 성에서는 하나의 규칙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식사를 배설물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겼을 때에는 앞으로 벌어질 피의 향연에 초대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배설물은 초컬릿과 꿀을 섞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면에서는 그 폭력의 분위기 속에서 그것은 어느 무엇보다도 배설물답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 장면이 후대에 수많은 도착적 영화의 선구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권력이 피지배자에게 요구하고 베푸는 것은 사실 이 배설물에 지나지 않으리라.
피의 장
이 아름답고 위대한 왕국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피의 향연이다. 이 성의 규칙을 어긴 소년소녀들은 4명의 장관들의 지휘 하에 자인한 고문 속에서 죽어간다. 칼 오르프가 작곡한 ‘카르미나 부라나’가 장송곡풍의 장중하고도 어두운 숭고함 속에서 연주되고 납치된 소년소녀들은 채찍 속에서 혀를 잘리고, 성기가 불로 지져지고,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눈알이 뽑히며 죽어간다. 4명의 장관들은 분노의 광기 속에서 고함을 치며 또한 넷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면서 이 향연을 즐기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소재는 도착과 폭력이다. 전혀 제약이 없는 표현의 수위 속에서 관객은 일말의 외설성과 애로틱한 욕망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느끼는 성적 욕망과 일탈의 호기심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철저하게 짖밟히고 억압된다. 무엇보다 폭력이 그것인데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그것을 즐기고 폭력을 통해서 욕정과 쾌락을 느끼는 상황에서, 관객은 더욱 극한의 공포를 느끼고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다소의 가학적 충동마저 엄청난 죄악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이 왕국의 운영자에게 영합하기 위하여 납치된 소년과 소녀들이 서로를 외면하고, 고발하는 장면은 현실 속의 우리를 너무나도 부끄럽게 지시한다.
하지만 피의 장에서 규칙을 어긴 소년소녀가 배설물이 가득 찬 탱크 속에 발가벗겨져 담겨 있는 채로 절망 속에서 주님을 절규하는 모습, 그리고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소년과 소녀가 서로 순수한 사랑의 연민을 보내는 장면은 마치 진흙 속에 피어난 작은 연꽃과도 같은 소중한 애처로움으로 다가온다. 결국 인간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악의 극한 속에서 죽음과 고통의 마지막 절망 속에서 가장 커다란 값어치를 발하는 희망의 빛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가장 근원적인 깊이에 있어서 실존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자신이 無化되는 곳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아이러니하게도 타락과 죄악과 잔인함 속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 삶의 고통은 그것을 요청하고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처럼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똥을 얻어먹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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