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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의 백두산 여행기(한국 고대역사 올바로 잡기를 위하여)
이태수 2008.07.08 2324
4박 5일의 백두산 여행기

  2008년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4박 5일의 일정으로 중국을 통한 백두산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94년도에 북경-길림-두만강-백두산(북파코스)을 통하는 백두산 여행을 한 번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련-단동-환인(졸본성)-백두산(서파코스)를 다녀왔다.

  나는 전에 백두산을 갔다 온 일이 있었지만 이번 코스에서는 대련으로부터 고구려 유적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여행을 하는 코스라고 하여 흔쾌히 이 여행에 참여하였다. 이번 여행에는 본인이 속한 모임의 회원 11가족 22명이 참가하였다.

  여행을 하게 되면 사람마다 보는 관점과 흥미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경치에만 관심이 많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먹고 즐겁게 노는 것에 흥미와 관심이 많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곳 인심과 풍물에 관심과 흥미가 많아서 같은 곳을 여행하더라도 그 흥미와 관점이 사뭇 다른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한국의 고대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한국의 고대사에 더 많은 관심과 흥미와 연관을 짓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한 것이 다른 사람과 다소 달랐던 점이다.

  4박 5일의 주마간산격인 여행을 다녀오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쓰는 것은 혹시 부정확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고 틀린 내용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보고 또 느낀 내용을 기술해서 혹시라도 이곳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관심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 비사성: 고구려의 성은 천리장성과 평지성 2개가 있었을 것이다.  
  오후 1시 1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약 1시간 경과한 2시 10분경 중국의 대련(大連)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고구려 해안방어의 요지였던 비사성(卑奢城)을 처다 보았다. 비사성은 해안가 평지에서 갑자기 600여 미터의 높이로 대흑산(大黑山)이 높게 솟아오른 바위산이다. 적이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천연요새의 바위산을 이용해서 고구려인들이 성을 쌓고 방어를 했다는 곳이다.

  비사성은 신의주로부터 1,000리 정도 남쪽으로 쭉 뻗어 나온 요동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옛날 고구려의 성터이다. 수양제의 4차 고구려 침공 시 내호아가 이곳을 공격한 내용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이후 영류왕 때에는 이곳 비사성으로부터 북쪽의 부여성(만주 장춘시 북부의 농안 지역; 옛 고구려 영토의 서북쪽 끝)까지 16년간에 걸쳐서 1,000리 장성을 쌓아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비사성이 아니라 대흑산성(大黑山城)이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중국정부에서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서 산꼭대기 부근에 중국식 산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못하고 오직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의한 중국식 성을 새로 쌓은 것만 남아 있다고 하면서 동북공정에 의한 중국의 역사 왜곡은 심각하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비사성(중국 이름 대흑산성)을 찾아보니 산꼭대기에서 능선을 타고 중국식 성이 길게 뻗어 있었다. 꼭대기에는 군사들을 지휘하는 점장대(點將臺)가 더 높은 성벽으로 축조되어 있고 또 산성 부근에는 중국식 사찰인 석고사(石鼓寺)가 있었다.

  가이드 자신은 중국인으로서 아버지를 따라 북한 황해도 해주 지방에서 중고등학교까지 나온 화교(華僑)이지만,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오신 어머니 아버지 분들께서도 반드시 동북공정을 막도록 노력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요?”라고 하면서 우리의 동의를 구하고 “저의 말이 맞다면 박수를 좀 쳐 주세요!”라고 하면서 박수까지 요청하였다.

  시간이 충분하면 이 산성까지는 오를 수 있는데 경사가 심하고 고도도 높기 때문에 오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모양이다. 또 꼭대기 일부 지역은 중국의 해군기지가 있어서 접근할 수 없는 지역도 있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평지에서 돌출된 600여 미터의 높은 바위산 위에 천연요새를 이용해서 옛날 고구려인들이 성을 쌓고 중국의 침략에 대비한 것을 생각하면서 감개가 무량했지만, 시간 관계상 처다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였다.

  그런데 나에게 갑자기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고구려에서 비사성을 시작으로 천리장성을 쌓았다면 비사성에는 산 능선을 이용한 천리장성이 물론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와 경계해서 싸운 성은 이 산꼭대기의 능선을 이용한 산성이 아니라, 도시 외곽을 방어하는 도시 주변의 성벽이 반드시 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산능선의 높은 곳을 이용한 지금의 산성이 아니라, 지근 대련시(大連市)를 중심으로 하여 사람이 살던 지역을 둘러싼 다른 비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고구려 군사 수 천 명 내지 수 만 명이 주둔할 수 있고 또 당시 적어도 수 만 명의 고구려인이 거주했을 비사성이 결코 산꼭대기에 일직선으로 만든 지금의 대흑산성(大黑山城: 비사성)과는 전혀 논리적으로 일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사성이 고구려 수군의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므로 아마도 바다 근처에서 올라오는 적군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수천 내지 수만 명의 고구려 군과 수만 명의 고구려인을 보호할 수 있기 위한 성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나는 역사를 모르는 일반인에 불과하지만 후에 나의 논리에 대해서 검토를 해 줄 수 있는 역사학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중국정부는 고의적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고구려가 한국인의 역사나 나라가 아니라 중국인의 역사와 중국인의 나라이고, 또 중국에 편입된 작은 지방정부에 불과하다는 역사말살이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좀 세웠으면 좋겠다.

2. 안시성(安市城)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일까?
  비사성이 고구려 땅이었고 당시 당나라의 수십 만 대군을 무찌른 안시성도 고구려의 국경 부근에 위치된 성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이곳 비사성(大連)과 크게 멀지 않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안시성(安市城)의 위치가 지금 어디냐?고 물어 보았다. 가이드는 잘 모르는 듯 아마도 이곳 보다 훨씬 북쪽일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안시성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매우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이 안시성에 대해서는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그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어째서 지금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안시성(安市城)의 정확한 위치조차 제대로 모르고 정확한 고증도 하지 못하고 있을까? 집에 와서 각종 백과사전과 자료들을 찾아보았으나 역사학자가 아니고 일반인인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각종 백과사전(위키백과사전)에는
  “안시성은 고구려의 토성이다. 안시성은 안시성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랴초닝 성(遼寧城)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위키백과)”라고 나와 있었다.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遼寧城 海城이 어디쯤일까?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중국지도도 제대로 가지로 있는 일반인인 나로서는 도저히 어디쯤인지 추측을 할 수 없었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조사해 본 결과 아래의 인터넷 주소에 그 지도가 올려져 있었다.

http://blog.daum.net/lee1090/12005586

  즉 안시성은 대련에서 서쪽으로 우묵 들어간 요동만을 따라서 북쪽으로 서울-대구 정도의 거리를 가게 되면 그곳에 잉코우(營口)가 있고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리 정도 올라가면 안산(鞍山)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을 안시성으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곳을 안시성으로 비정한 백과사전의 기록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안시성이 토성이라고 하였는데, 결코 토성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당태종이 측근부대 10만 3천명(三國史記)을 동원해서 3개월간 공격해도 넘을 수 없는 성이 토성일 수 없다. 고구려 성이 대부분 견고한 석성인 것을 고려할 때 안시성도 견고한 석성이었을 것이다.
  또 당태종이 60일간에 걸쳐서 50 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흙을 쌓아 겨우 안시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토성을 만들었고 이 토성이 비로 인해서 무너지자 그 압력으로 인해서 안시성의 일부가 무너졌다고 하는데(三國史記), 안시성이 토성이라면 무너질 이유가 없다. 또 충거와 돌쇠뇌를 쏘아서 성위의 일부를 무너뜨렸다고 했는데, 토성이라면 충거와 돌세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이 파 들어가면 되는 것이어서 맞지 않는다.

  둘째 안시성 밖에 있는 당군이 성내에서 닭, 돼지 등을 잡는 소리가 요란한 것을 듣고 그날 밤 고구려 군이 배불리 먹고 당군을 야습할 것을 알았다고 했고 또 실제 성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야습했다고 기록(三國史記)이 있는데, 이를 유추해 보면 이 성은 가파른 산지에만 쌓은 성이 아니고 평지에도 쌓은 산성이어서 성 밖에서 공격하는 당군이 성안의 돼지 잡는 소리와 닭잡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성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셋째 안시성의 지세가 매우 험하다고 했는데 사진에 보여지는 안시성의 지세는 그다지 험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안시성은 결코 험한 성이 아니라 약간 높은 구능지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넷째 수양제가 탁군(涿郡: 유비의 고향, 낙양부근이 아닐까 추측)을 2월 13일 출발하여 3월 15일에 요하에 도착하였다고 하는데, 점령지이긴 하지만 왕의 거마가 탁군에서 1개월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는 현재의 안시성(鞍山, 海城)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다섯째 현재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은 요하가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북경에서 100여리 동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난하(灡河)로 비정하고 있고 또 안시성의 위치도 북경 부근에 있는 만리장성보다 더 남쪽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아래 인터넷 주소 참조)
http://home.megapass.co.kr/~hsg1000/zz141.htm
http://home.megapass.co.kr/~hsg8689/zz232-6.htm

  본인의 생각도 현재의 안시성 비정은 잘 못된 것이고 난하를 인접해서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근에 안시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 아울러 요동성, 본인의 추측이 맞다면 안시성은 지금의 안산(鞍山: 海城) 지역이 아니라 이보다도 약 1,000리나 남쪽에 위치했을 것이다. 아울러 요동성과 건안성이 이 부근에 위치했다는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으므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섯째, 조선조 정조 때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쓴 홍양호는 안시성의 성주가 양만춘임을 밝히고 또 안시성에서 100여리 쯤 떨어진 남쪽에 낭자점(娘子店)이란 마을이 있고, 이 마을에서 10여리 쯤 떨어진 곳에 계명사(鷄鳴寺)라는 절이 있어서 직접 찾아가 보고 또 전하는 기록과 이야기를 듣고 그 야사(野史)를 기록했는데, 만약에 이 낭자점의 위치와 계명사가 확인될 수 있다면 안시성의 위치가 좀 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성주가 양만춘이라는 기록은 1780년 동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보다 10여년 후인 1794년 동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홍양호의 기록은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다음은 홍양호의 안시성 전투와 안시성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이를 소개코자 한다.

3.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기록(홍양호의 海東名將傳)
  연개소문과 양만춘에 의해서 당태종의 중군이 무너지고 당태종은 사로잡히기 직전까지 패배를 했다고 홍양호의 동국명장전에 기록이 되어 있고, 당태종의 군사는 10명중 7,8명이 죽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三國史記), 이 사실이 우리 역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은 계속 발굴되고 밝혀져 진실한 역사가 기록되어야 하겠다.
  후대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안시성이 평안도 용강으로 잘못 비정되어서 수백 년 간 잘 못 알려져 오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가들에 의해서 한사군 위치나 윤관의 동북9성 위치도 잘못 비정된 채 왜곡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를 고치려는 역사학자들이 거의 없는 것을 필자는 늘 한탄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조선조 정조 때 홍양호가 쓴 해동명장전 중 양만춘에 관련된 글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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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안시성 성주(城主)는 역사에 확실치는 않으나 양만춘이라고 전한다. 그는 재주와  용맹을 아울러 가춘 사람으로 연개소문이 일으킨 막리지의 난 때도 성을 지키며 굴복하지 않았는데 연개소문은 이를 쳐서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로 그에게 성을 맡겼다.

  보장왕 4년에 당나라 태종은 친히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3월에 태종은 정주(定州: 하남성 수도, 낙양 바로 옆, 요하로부터 약 3,500리 정도 거리)에 이르러 총관 이세적, 부총관 강하왕 도정, 장군 설인귀, 장손무기 등으로 하여금 장수 9명을 거느리고 만주 요동반도 동북쪽의 개모성, 비사성, 백암성, 요동성 등을 공략케 하고 이어서 안시성을 공략했다.

  당나라 군사라 쳐들어오자, 안시성 사람들은 태종의 깃발을 바라보고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울리며 (당태종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는 남자들은 다 죽여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참고: 실제로 성을 함락시킨 후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린 사건은 자주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킨 다음 진주성 안의 남자들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다 잡아 죽여서 씨를 말린 사례가 있었다. 그 결과 진주성에 살던 사람들의 후대가 끊기고 씨가 말라서 함경도 사람들을 데려다가 후대를 잇게 한 사례가 있었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성을 굳게 지켰다.(중략) 

  이에 당나라 군신들이 이렇게 말했다.
  “장량(張亮)의 군사가 비사성에서 싸우고 있으니 이를 불러서 합세하여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곧 압록강을 건너 바로 평양으로 쳐들어가 이를 빼앗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때 당태종은 그 뜻을 따르려 하였는데, 유독 장손무기만은 이를 반대하여 말하였다.
  “천자께서 친히 치시는 것은 여러 장수들과 다릅니다. 위험을 무릅써서 요행을 얻고자 함은 불가합니다.... 먼저 안시성을 쳐부수고 건안성을 빼앗은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멀리 진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으므로(*과거 수나라 군사가 이 같은 계책을 썼다가 전멸하였다. 더구나 이번 계책에서는 당태종이 직접 기습작전의 계책을 쓴다는 것이므로 참으로 위험천만의 계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을 따르기로 하여 모든 장수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군사들은 밤에 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당나라 군사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태종은 (왕자인) 강하왕 도종에게 명령하여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게 하여 성에 맞닿게 하였다. 이에 성 안에서도 성을 더 높이 쌓아 막으며, 군사들을 나눠 하루에도 6,7 차나 번갈아 가며 싸웠다. 그런데 당군은 충차로 돌을 쏘아 성을 부수므로 성안에서는 목책을 세워 그 헐어진 곳을 막았다. 이때 강하왕  도종은 발을 다쳤는데, 태종은 친히 침을 놓아주기까지 했다.

  적(당군)이 토산을 쌓는데 밤낮 60일이 걸렸으며 50만명의 공을 들였다(*매일 거의 1만 명씩 동원한 것이다). 이 토산의 꼭대기는 성으로부터 몇 길 떨어졌으나 거기서 성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다. 도종의 과의와 부복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꼭대기에 올라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벽이 헐렸다. 때마침 부복애는 마음대로 부서를 떠나 있었으므로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은 성의 헐어진 데로부터 나와 당군을 무찌르고 드디어는 그 토산을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부복애를 베어 죽이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3일동안 총 공격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왕자) 도종은 맨발로 태종 앞에 엎드려 잘못을 말하며 벌을 청하였는데, 태종은 도종이 개모성과 요동성을 파한 공을 참작하여 특별히 용서해 주었다.

  당태종은 이리하여 안시성 공격에 실패하였다. 때는 벌써 늦가을이라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요동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없어서 군사와 말이 지탱하기 어려우므로 태종은 퇴각하라고 명령하였다.(중략)

  이 싸움에서 당나라 군사는 10명에 7,8명꼴로 전사하였다(*전쟁에 大敗한 것이다). 태종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슬프다. 위징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짐으로 하여금 어찌 이와 같은 (대 敗戰의) 싸움을 하도록 만들었겠느냐?” 위징은 당태종 때의 충신으로 벼슬이 지문하성사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고구려 공략 이전에 죽었던 것 같다.

  그 후 훨씬 뒤의 이야기 이다. 조선조 21대 임금 영조 때 이 책의 저자인 홍양호가 1794년 중국에 동지사(使臣)으로 가면서 낭자점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곳은 안시성에서 백여리 쯤 떨어진 곳이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이야기 해 주었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치다가 실패하여 도망치다가 날이 저물고 길은 잃어버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맸는데, 산 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 그 곳을 찾아 갔더니, 마침 한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와 맞아들여 밥을 지어 대접하므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종은 몹시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날이 밝아서야 잠을 깨어 살펴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산속이었고, 다만 그 앞에 돌이 있는데, 마치 닭의 벼슬과 같이 하늘로 뻗쳐 있었다.

  태종은 크게 놀라며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이는 신의 도움이었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장안으로 돌아오는 길로 곧 사람을 보내 그 곳에 절을 짓고 그 뜻을 나타내는 뜻에서 절 이름을 계명사(鷄鳴寺)라 지었다.

  이 얘기를 듣고 필자 홍양호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곧 말을 달려 그 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낭자점에서 10여리 쯤 떨어져 있는 곳인데, 오래 된 절이 있고, 그 불탑 위에는 나무로 닭을 만들어 모셔 놓았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였으며 법당(法堂) 아래에는 명나라 때 쓴 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그 절의 이름을 정한 내력이 적혀 있었다.  이 사실은 비록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야사(野史)에라도 적어 넣어 빠져 있는 것을 보충하는 것이 옳겠다(海東名將傳).

4. 단동과 박작성의 심각한 역사 왜곡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약 360km의 거리라고 한다. 차로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몇 시간 동안 평야지대와 구릉지대를 계속 달렸다. 평야지대와 구릉지대에는 대부분 옥수수가 심겨져 있고, 일부 낮은 지대에는 벼가 심어져 있으며 다른 작물은 별로 심겨져 있지 않았다. 단동에 가까워질수록 산지가 많아졌고 산지에는 엄청 많은 양의 밤나무를 재배하고 있었다.

  단동에 있는 홍원호텔에 투숙하였는데, 건물 벽이 얇아서 방음시설도 매우 부실하고 또 밤에는 물도 잘 나오지 않아서 변기청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등 시설이 별로 좋지 못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압록강변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신의주, 위화도, 월량도, 압록강 철교 등을 조망하였다. 압록강 서쪽으로 배를 몰아 북한 땅에서 약 150m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이 접근하여 손을 흔드니 북한 사람들도 손을 흔들어서 화답하였다.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옛 고구려의 산성인 박작성(현재 중국에서는 虎山長城이라 칭함)을 관광하였다. 박작성의 입구에는 용과 사람을 함께 조각한 큰 조형물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이 박작성(虎山長城)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기가 막히며 기막힌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남아있는 명나라 때 세운 만리장성은 북경에서 차로 1시간 거리 정도 북쪽에 위치되어 있고 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북경에서 정 동쪽으로 대구 정도의 거리에 위치된 산해관(山海關) 옆 친황따오(秦皇島)에서 끝난 것이다. 실제의 만리장성 동쪽 끝은 단동보다도 1,500리 정도나 아래쪽에 위치되어 있음이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국인들은 이 단동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고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이런 역사왜곡은 앞으로 중국인 스스로 양심적으로 때려 부수는 날이 반드시 와야 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또 한국정부에서도 이런 거짓되고 역사를 왜곡하는 흉악한 글귀나 조형물들을 반드시 철거하도록 중국정부에 강력히 요청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박작성(중국명 虎山長城)에 올라보니 고구려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중국식 성(城)을 만들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또 역사왜곡을 선전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성이라면 화살 쏘는 성벽이 중국 쪽인 남쪽으로 위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든 이 성은 화살 쏘는 성벽이 고구려 쪽인 북쪽을 위치하고 있다. 성 모양이나 장수가 지휘하는 성탑이 완전 중국식이고 또 성문 위의 누각에도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중간 쯤 올라가다가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꼭대기까지 오르지 않고 그대로 내려왔다.

  중국인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사 왜곡을 매우 심하게 하는 민족이다. 진실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단동에서 1,500리 정도나 남쪽에 있는 산해관(山海關) 옆 진황도(秦皇島)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동에 있는 박작성을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고 참으로 거짓되고 거짓된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는 것이다.

  이곳을 와 본 중국인들은 이곳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고 고구려 이전의 진시황 때도 이곳에 중국의 국경이 있었다고 알고 가는 것이며, 한국인들은 단동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므로 단동 남쪽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 땅이라고 잘못 알고 간다. 또 이런 역사왜곡과 기록이 수 백 년 지나게 되면 그 때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되고 이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역사가 진실이라고 우길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박작성 성문의 뒤쪽으로 200m 정도를 더 가게되면 일보과(一步過)란 곳이 있고, 지척(咫尺)이라고 쓴 큰 돌비가 있다. 이곳에는 폭 10m 정도의 냇물(압록강 지류)이 흐르는데 이 냇물을 건너면 바로 북한의 방산마을이다. 북한 땅이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있는 것이 잘 실감되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고주몽이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로 건국한 졸본성(桓因)으로 이동하면서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조망하였다. 오녀산성은 높은 곳이 해발 820m이며, 성벽 부근에는 높이 100m 정도의 절벽이 두루고 있어서 동쪽, 북쪽, 남쪽의 일부 지역만 성을 쌓은 천혜의 요새 지역이다. 위에는 길이 1,000m, 폭 300m 정도의 펀펀한 지역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산성까지 오르려면 96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처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곳은 고주몽의 아버지이며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가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내려온 곳이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녀산성과 졸본성을 관광한 후 통화(通化)로 이동해서 숙소인 통가장 호텔에 투숙하였다.

5. 민족의 성지 백두산 등산
  아침 6시 30분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하여 3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백두산 서파 입구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셧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로 향하였다. 셧틀버스로도 반시간 가량은 올라가서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였다.

  올라가는 길은 처음에 울창한 자작나무숲과 전나무, 이깔나무 등의 숲을 지나자 점차 나무들의 키가 낮아지기 시작하고 관목형의 나무가 자라는 곳을 지나게 되면 초원지대가 나타난다. 초원지대에는 각종 이름 모를 한대 지방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이는 백두산의 고도가 높기 때문에 100m 정도 오르게 되면 평균 기온이 0.5도 정도씩 내려가게 되고 2000m 정도 오르게 되면 10도 이상 차이가 난다. 바람이 부는 날이나 비오는 날은 이보다도 더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백두산에는 높이 올라갈수록 더 추운 한대 지방이 되는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백두산 천지가 보이는 5호경계비까지는 1,260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비는 심하고 오고 바람도 심하게 불었지만 바람이 뒤쪽에서 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척추절단을 하고 척추신경 수술을 했을 뿐 아니라, 양쪽 다리에 인공관절을 해서 장애 3급에 해당하는 심한 장애인이어서 남 따라 백두산을 오르는 일이 매우 힘에 겨운 일이었다.

  400계단 정도 올라갔을 때는 매우 힘이 들어서 가마를 좀 타고 가고 싶었지만 가마꾼이 없어서 탈 수 없었다. 올라가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지만 이정도 힘든 것도 참지 못한다면 앞으로 내게 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내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천지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끝까지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구름은 가득히 끼어서 천지를 내려다 볼 수도 없었고 바람도 심하게 불어서 집사람과 함께 천지를 향해서 절을 올리고 천지신명이 우리가 바라는 일을 도와주시기 빈 후 하산을 하였다.

  옛적에 환인천제(桓因天帝) 제석(帝釋天)의 아들 환웅천왕(桓雄天王)이 이 세상 사람들을 널리 이익케 하고 세상을 올바로 만들려는 큰 뜻이 있었다(弘益人間 理化世界). 환인천제는 아들의 뜻을 알고 3천명의 하늘사람들과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이 지구상으로 내려가도록 하였다. 환웅은 백두산(白頭山; 太白山)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3천명의 하늘사람(天人)을 데리고 내려와서 신들의 도시(神市)를 열었고, 웅녀(熊女)와 결혼해서 단군(檀君)을 낳았다. 단군은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여 우리나라를 세운 것이다. 단군의 자손들은 이 땅에 머물러 살면서 세상을 널리 이익케 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환웅천왕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백두산만병초가 아름답게 피어 있어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셧틀버스를 타고 내려온 후 천지가 용암을 분출하며 만들어 V자 형의 “금강대협곡(중국인들은 長白大峽谷으로 칭함)”을 관광하였다. 금강대협곡은 화산 폭발시 용암이 흐르던 자리가 오랜 세월 침식되면서 이룬 깊은 골짜기이다. 폭이 평균 120m, 깊이가 평균 80m, 길이는 10km에 이르는 골짜기로 침식된 바위들이 칼날모양 또는 창모양 등을 이루면서 수없이 펼쳐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대협곡은 드물 것 같았다. 하산하여 통가장 호텔로 돌아와 투숙하였다.

6.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능, 장수왕능 등 관광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 集安縣 通溝)으로 이동을 하였다. 먼저 광개토대왕비를 관람하였다.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높이 6.39m, 각면 평균 1.5m 정도의 4각 통모양 비석으로 네면에 총 1,80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큰 비석이며, 세계적으로도 아마 가장 큰 명문비석(銘文碑石)에 속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이곳으로부터 200m 정도 뒤쪽에 광개토대왕의 능이 있다. 능은 전형적이 고구려식 적석묘로서 지면에 넓게 사각형으로 큰 돌단을 여러층 쌓고 그 안쪽에 크고 작은 자갈돌 등을 피라밋 식으로 쌓아서 만든 왕능이다. 이 능의 부근에서 “바라옵나니 태왕릉이 산악과 같이 편안하고 견고하기 바랍니다(願太王陵 安如山如固岳)”라고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이 능이 광개토대왕의 태왕능임이 비정되었다.

  이곳에서 수백 미터쯤 떨어진 멀지 않은 곳에 장수왕능(長壽王陵)이 있다. 이 왕릉을 중국이나 일본 및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장군총(將軍塚)이라고 부르는데, 이들 역사학자들은 참으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총(塚)이란 말은 중국의 한자사전을 찾아보더라도 “높고 큰무덤”이지 결코 왕릉이 아니다. 왕릉은 마땅히 왕릉(王陵)이라고 표기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총(塚)이라고 표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및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왕릉의 올바른 이름을 하루속히 제대로 쓰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경주의 금관총(金冠塚) 역시 어떤 왕의 왕릉인지는 몰라도 왕관까지 출토된 분명한 왕능이므로 “금관왕릉(金冠王陵)”으로 책에 고쳐 써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름 하나 제대로 고치는 것조차 못하는 역사학자라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역사학자란 말조차 써서 안 될 사람들이라고 질책하고 싶다.

  장수왕릉은 고구려 제20대 왕(재위 413~491)이다.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408년(광개토왕 18) 태자로 책봉되었고 부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장수왕능의 무덤은 고구려의 일반적인 적석총 무덤과 달리 피라미드형 돌무덤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1변 길이 약 33m, 높이 약 13m로 7층의 높이로 되어 있고 무덤 칸은 무덤의 중턱인 4∼5층 사이에 있다. 이집트에 많은 미라미드가 있지만 동양에서는 유일한 피라미드식 무덤으로 생각된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중국, 또는 일본 사람들은 고구려를 중국에 조공이나 바친 적은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큰 잘못이다.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사마천이 세운 서진(西晉) 말기인 304년 흉노족의 유연이 한나라를 세우고, 이밖에도 이웅, 장궤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것이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란 중국 분열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439년 북위(北魏)와 송(宋; 劉宋)나라로 구분되는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135년 동안 중국은 분렬에 분렬을 거듭하게 된다.

  이 시기의 중국은 한족(漢族)이 중국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오호(五胡)라고 해서 다른 민족이 중국을 지배한 시기이며, 이때의 왕조는 전량, 전조, 성한, 후조, 전연, 전진, 후연, 후진, 서진, 후량, 남량, 북량, 남연, 서량, 하, 북연 등 16개 국가가 번갈아 일어나면서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때이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15대 미천왕으로부터 20대 장수왕까지의 기간이며,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나라를 세우고 싸우는데 급급해서 감히 고구려에 대항하기 힘들었고, 또 국력도 고구려보다 미약한 상태이었고, 문화와 산업 역시 고구려 보다 훨씬 뒤져있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16대 고국원왕 때는 16국 중의 하나인 전연의 모용외로부터 공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국이 감히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던 시기이고, 또 고구려는 요동에 있는 요동성과 현도성을 회복케 되었고,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사람들이 많이 귀화했다고 한다.

  19대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쳐서 10개의 성을 빼앗았고, 북쪽으로 글안을 쳐서 500명을 사로잡고 그곳 주민 1 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바다에 둘러싸인 백제의 관미성을 함락시키고, 또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싸워 대패시키고 8,000명의 포로를 잡아 온다. 왕 11년에는 연(燕; 後燕)의 숙군을 공격하고 17년에는 고구려의 지류인 고양씨 후손이 세운 북연과 같은 종족의 예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상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간략한 내용인데, 광개토대왕 능비에는 훨씬 더 많은 나라와 싸우고 훨씬 더 많은 땅을 넓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 5만의 병력을 보내 왜구들을 무찌른 것도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것이다.

  20대 장수왕 때 오호16국(五胡十六國) 중의 하나인 북연의 왕이 위의 침략을 피해 고구려에 항복 하였지만 북중국을 통일한 위(魏; 北魏)는 감히 고구려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15대 미천왕 때로부터 20대 장수왕 때까지는 중국보다도 정치가 안정되고 문물이 발전되고 문화와 산업 역시 중국에 앞서 있던 때로 보여진다. 즉 동양의 최강국 중에 하나이었던 것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본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고구려가 산해관 이남 지역까지 점령하고 영토를 넓혔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거부감을 가질 것임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장수왕 때 중국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중 마지막 남았던 북위(北魏)가 고구려에 항복을 하고 그 땅이 고구려에 편입되었을 것을 추정해 보시라. 북위의 땅이 산해관 아래까지 분명히 점유하고 있었고 또 고구려 장수왕은 중국을 능가하는 군대를 가지고 이를 접수하였다고 생각할 때 고구려의 땅은 산해관 이남의 땅까지 분명히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이 중국과 싸웠을 당시에도 분명히 산해관 부근에서 싸웠을 것이라고 본인은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본인 의견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로 반론이 있는 역사학자가 있다면 그 반론을 제시해 주시기 바란다.

  장수왕능을 관광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내성을 돌아보았다. 국내성은 2대 유리왕 때부터 20대 장수왕 때까지 무려 425년 간 고구려의 수도이었던 곳이다. 국내성은 평지에 만들어진 정사각형 모양의 성으로 그 둘레가 2686m에 이른다고 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성벽의 높이가 약 9m 정도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후 마구잡이식으로 개발되는 바람에 동쪽과 남쪽 성벽은 아예 없어져 버리고 그나마 일부 남아있는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어서 불과 2-3m 정도 높이로만 남아 있었다. 마구잡이식 개발이 문화재 보존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성과 바로 인접된 산지에 환도산성이 있다. 환도산성은 산지에 높고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성을 쌓은 것이다. 산의 높은 곳은 해발 676m에 이르지만 산록 부근에 쌓은 성을 조망할 수 있었다. 남아있는 산성은 매우 심하게 파손된 것으로 보였다. 환도산성 옆에는 고구려의 고분군이 수 십 기 모여 있어서 고분군을 함께 관광하였다.

  국내성 관광을 마치고 단동으로 이동하여 홍원호텔에 투숙하였다. 다음날 아침 대련으로 이동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성해공원을 조경한 후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대련 공항에서 2시 40분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여 약 1시간 후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7. 여행 중 보고 느낀 중국(중국은 거대한 공룡기업이다)
  대련에서 백두산을 다녀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본 풍경과 숙소와 도시를 돌아보면서 느꼈던 몇 가지 일들에 대해서 짧게 적어본다.

  대련에서 백두산까지 대략 2천 수 백리 길을 여행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중국인의 주택들은 한국과 같이 다양한 크기, 다양한 모양의 집들이 아니라, 거의 똑같은 크기 비슷한 모양의 집들로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 농민들의 집을 보면서 중국 농민들이 별로 잘 살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중국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땅을 임대 받아서 임대받은 땅위에 (아마도 정부의 지원으로) 집을 짓게 된다. 그러나 정부가 정해 준 그 집의 크기는 매우 작다. 대체로 18평-20평 정도의 크기로 집을 짓는다. 더 크게 지을 수도 없고 더 작게 지을 수도 없는 것이 과거의 사회주의 체제이었던 모양이다. 이 18평-20평 정도의 작은 집 안에 부엌도 마련해야 했으므로 실제 방은 1개 내지 2개에 불과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방이 1 개뿐인 주택도 많다고 했다. 이럴 경우 여럿이 모여 살아야 하는 가족의 삶에 어려움도 매우 많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획일적으로 강요당한 중국인의 주택은 더 크게 짓는 것이 잘 허용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비슷한 크기의 작은 집을 때려 부수고 더 큰 집을 지은 농촌 가옥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련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천리가 넘는 거리에 심겨진 곡식은 주로 옥수수와 감자가 위주 이고 낮은 평지에는 벼를 심었다. 다른 곡식이나 각종 채소류 등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국의 경우라면 수 십, 수백 가지의 다양한 작물이 재배됨이 일반적인데 왜 한 두 가지 작물만 심는 것일까?

  가이드에게 지금도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계속 실행하여 정부에서 지정하는 한두 가지의 작물만 심는 것이냐? 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등소평의 개방경제 이후에는 정부에서 지정하는 작물만 심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작물을 심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가이드의 답변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일률적으로 옥수수와 감자와 벼 등이 심겨져 있어서 제대로 개인적인 작물 재배가 가능한지 내내 의심이 들었다.

  또 대련이나 단동, 통구 등 대도시에는 수도 없는 아파트가 건축되고 있었다. 이 아파트들을 기업가나 개인이 건축하는 것이냐? 고 물었더니 정부에서 건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정부에서 건축하는 아파트의 평수가 크고 작고 해서 다양하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고 똑 같은 면적의 방을 만든다고 한다. 아마도 이 아파트의 평수도 결코 20평을 넘는 것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중국 정부는 20평도 못되는 작은 아파트를 똑같이 지어서 도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서 임대료를 받거나 파는 것이 현재의 중국 아파트 정책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붙어있는 2개의 아파트 방을 사서 1개로 만들고 넓게 쓸수는 있느냐?” 고 다시 물어 보았는데, 그렇게 하면 임대료가 많이 나가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중국의 도시에 있는 모든 거대한 건물들은 모두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소유인 것이다. 또 지나가다가 볼 수 있는 각종 공장이나 발전소 등의 기업도 개인 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경영하는 기업이다. 도시 중심부에 있는 높은 건물의 호텔들도 개인이 만든 호텔이 아니라 국가에서 만든 호텔이다. 그곳의 직원들도 개인 기업에서 채용하는 직원이 아니라 국가에서 채용한 공무원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쌍룡 자동차를 산 중국의 상해자동차라는 기업도 개인의 기업이 아니라, 중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업인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발전된 기업을 중국정부에 함부로 파는 일이나, 우리나라 공기업을 중국인들에게 함부로 넘기는 짓을 제발 해선 안 된다. 이런 짓은 참으로 매국노의 짓이 될 것이다. 한국 정부의 관료들이 이 사실은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15억 인구를 통제하는데 이 사회주의 경제만큼 유용한 방법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 결과 농민이나 기업 종사자나 호텔 종사자들은 정부에서 정한 적은 금액만 받고 연명하면서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40배나 되는 국토의 전 중국의 인민과 기업과 서비스와 수출, 수입 등을 모두 관장해서 운영하는 중국 정부는 세계에서 무지무지하게 큰 거대한 공룡 기업으로 변신해 있다.

  사실 미국의 큰 기업이라는 마이크로 소프트나 GM은 중국이라는 공룡 대기업에 비교할 때 새 발의 피에 불과하고 바닷물에 들어가는 작은 시냇물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 공기업의 정부투자를 모두 팔면 79조원(약 790억불 정도)인가 된다고 하고, 현 정부에서는 이 공기업 정부 소유분을 모두 팔아 치워서 더 좋은 정책을 수행한다고 하는데, 정말 본인으로서는 이명박 정부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짧은 생각인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제발 이명박정부는 중국정부라는 대기업에게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의 짓을 그만 두기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싶다.

  나는 예전에 62년도 “대통령으로써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글을 30여 Page 타자 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 글을 읽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이후락씨가 답장을 보내온 일이 있다. 또 박대통령이 죽고 나라가 극히 혼란스러울 때 나는 화란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는 빨리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이 때 최규하씨는 “우리나라도 빠른 시일 안에 비행기를 생산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비행기 생산계획을 발표한 일이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이명박 정부에게 제발 국가에서 보유한 공기업 자산을 팔아치우는 짓 절대로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국가 보유 공기업을 파는 일은 거대공룡기업인 중국 정부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크게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이명박씨가 나라를 위해서 더 잘 해주시기 바라는 간절한 뜻으로 요청하는 글임을 이해해 주기 바라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원래 나는 수십 개국을 여행하였지만, 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곳 사정이 어떤지 Spy 짓 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여행기에 다소 껄끄러운 내용이 있더라도 읽으시는 분들의 많은 이해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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