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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세상읽기] 우리 시대의 자화상 - 경제주의
이순웅 2010.01.29 1039
우리 시대의 자화상 - 경제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

2010년 01월 29일 (금) 13:14:48 이병수 경남대 연구교수  webmaster@mediaus.co.kr  

경제주의의 광풍

현 정부의 정책이나 한국사회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휘몰아치는 경제주의의 광풍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다. 4대강 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공권력을 무리하게 투입한 결과 생긴 용산참사도 그 배경에는 건설자본의 배만 불리는 뉴타운이라는 재개발정책이 놓여 있고, 국토균형발전의 원안을 백지화한 세종시 수정안법도 그 정당성을 효율성과 경제논리에서 찾고 있으며, 미디어방송법 개정을 정당화하는 논리 역시 선진화와 경쟁력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녹색성장이라는 말도 녹색 가치의 존중이라기보다, 환경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데 방점이 놓여 있다. 미네르바와 피디수첩, 촛불시위 등을 잠재우기 위해 여론을 동원하는 방식도, 이런 사건이 한국사회에 끼친 경제적 손실을 발 빠르게 조사하여 발표하는 식이다.
  
이런 경제주의적 국정운영은 IMF 위기 후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해온 신자유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으나, 현 정부 들어 가히 전방위적이고 총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현 정부의 국정운영은 60년대 개발독재 이래 확산된 경제주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질이 아니라 경제적 지출의 차원에서 복지문제에 접근한다든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적 자원의 양성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든가, CEO 대학 총장의 등장이나 논문의 질보다 양을 따지는 교수평가 등이 당연시되는 풍조는 현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이미 한국사회에 안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이런 풍조가 더욱 심화되고 사회의 여러 영역에 확대되고 있다. 이를테면 학문의 영역에서도 경제적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나 박정희, 심지어 전두환 정권까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마저 나오고 있다.

경제주의란 경제를 중시하는 노동운동의 투쟁방식 혹은 이런 투쟁방식의 저변에 놓인 경제결정론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모든 것을 돈벌이의 관점에서 보고, 그 돈벌이 관점으로 세상일을 대처하는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의식세계의 밑바탕에는 이 경제주의가 강하게 깔려 있다. 대부분 땅과 집을 사는 곳이라기보다 팔기 위한 상품으로 생각하고, 땅값과 집값이 오르면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처세술이나 자격증, 토플점수 등 이른바 ‘스펙’ 쌓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시중의 자기계발서는 인문학 서적보다 훨씬 많이 팔리고 있다. 무어니 해도 한국인의 이런 경제주의적 마인드의 결정판은 지난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이다. 오직 돈 벌이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지나쳐,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도덕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CEO출신의 성공한 샐러리맨’의 이미지는 돈벌이 경력만큼은 어떤 다른 후보보다 발군이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경제주의적 구호를 내 건 후보는 그만이 아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선수라는 이미지를 보유했던 것이 당선의 이유였다.

자본주의 고유의 가치관

흔히 배려나 연대보다 경제적 가치만을 우선하는 풍조를 경제제일주의라고들 비판한다. 우리 사회의 지적, 도덕적 천박함을 질타하는 이런 도덕주의적 비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결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도덕주의적 비판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대주의라고 말을 하면 누구나 비판하지만, 지난 100여 년 동안 이 땅에 진행되어온 서구식 근대화를 염두에 둘 때 문화적 사대주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는 것처럼, 경제제일주의란 비판도 마찬가지다. 경제주의적 삶의 방식의 침투가 전방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60년대 이래 사회 전반에 걸쳐 시장의 원리가 급속도로 진행되어온 한국사회에서 경제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기란 힘들다.

자본주의는 그에 고유한 가치관을 낳는다. 모든 것을 부의 창출과 증식이라는 돈벌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제주의적 가치관이 그것이다. 오늘날 경제라 하면 돈벌이, 돈 벌이를 위한 경쟁력, 효율성, 생산성 등을 연상한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경제관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민초들의 생활세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생활세계는 일과 놀이, 교육과 경제, 행정, 복지, 언론 등이 어우러져 유기적으로 기능하고 있었고, 경제는 이러한 생활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살림살이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이런 관념이 생활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이윤추구를 위한 돈벌이로 변모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되면서였다. 자본주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모든 것은 상품이 되었고, 따라서 살림살이의 수단에 불과했던 경제가 돈벌이로 변모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특징은 경제가 인간다운 생활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무한 이윤추구라는 자기목적으로 변하는 데 있다. 인간 삶의 기초인 생활세계와 단절된 돈벌이의 추구가 생활세계를 오히려 전면적으로 지배함으로써, 돈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결과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주의적 가치관과 자본주의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산다고 해서 꼭 경제주의적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실존적 결단에 의해 그럴 수도 있고, 인간다운 자본주의를 지향하면서 복지와 분배를 중시하려는 정책적 노력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복지를 중시하고 인간다운 시장경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에 가깝다. 경제주의적 가치관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지난 60년대 개발독재 이래 압축적이면서도 일면적인, 그리고 억압적인 자본주의 근대화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주의적 가치관의 형성

오늘날 세상을 오직 돈 벌이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제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의 물결을 타고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경제주의적 가치관은 우리 내부의 근대화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경제제일주의적 삶의 방식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라기보다 지난 근대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서구보다 훨씬 조악하고 천민적인 형태의 경제주의를 심화시켰다. 한 마디로 다른 모든 분야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경제 일변도의 성장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폭력성을 동반한 채 급속도로 진행된 근대화였다. 경제 논리가 모든 것에 앞섬으로써, 강도 높은 노동통제와 국민의 기본권 박탈을 당연시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권력은 국민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빈부격차나 인권문제 등은 경제성장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어두운 그림자일 뿐, 계속적으로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문제라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유포시켜나갔다. 학교건 직장에서건 GNP 성장률이 끝없이 되풀이되었고, 지속적인 성장은 분배와 복지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을 국가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주입시켜나갔다. 반성적 빈곤에 시달리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의식화가 일정 정도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성장주의에 기반을 둔 압축적, 폭력적 근대화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미성숙을 결과하였다. 한국인들은 경제주의라는 세속종교의 열렬한 신도가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 사회는 IMF 이후 시장과 자본의 힘이 압도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경제주의가 가진 지배력은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와 무한경쟁이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하여 이제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경제적 효율성 추구, 부자 되기, 일등 되기 등의 삶의 방식은 거의 종교적 신앙이 되었다. 60년대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경제주의가 그 절정에 도달한 셈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균열은 불가피하다. 경제주의의 신앙이 균열을 드러내는 현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는 생존의 위기에 몰리고 있으며, 가족 해체, 교육 붕괴 등 국민들의 사회적 불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출산율 저하는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징후이다. 아기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는 자신이 현재 겪는 생존의 위기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출산율 저하는 한국사회의 현재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는 경제주의적 가치관이 절정에 도달한 동시에, 그런 가치관이 균열을 드러내는 이중적 현실에 처해 있다. 경제주의는 그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는 무관하게, 이제 생존 위기의 현실로 인해 더 이상 지속불가능한 삶의 방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

경제주의적 삶의 방식이 지속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여러 현실적 징후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 동안 관성화된 나머지, 서민들의 정당한 사회경제적 권리의 요구조차 경제주의에 포섭되어 있다. 때문에 서민들의 먹고 사는 괴로움과 경제적 풍요에 대한 갈망을 경제주의적 삶의 방식으로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이런 정당한 권리 욕구가 경제주의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 문제일 뿐,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서민들의 삶을 경제주의란 이름으로 탓하는 것은 지나친 도덕주의적 비판일 것이다. 또한 서민들의 경제주의적 삶의 방식에는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각자 구명도생하려는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 사회보장이 부실한 상황에서 무한경쟁에 던져진 사람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용불안과 실업이 늘어나고, 의료나 교육 등에서 안전장치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가난하고 학력도 변변찮은 사람들이 돈 말고 의존할 수 있는 것은 달리 없지 않은가.

돈만 최고로 여기고, 경쟁력이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기적 생존전략은 그 도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도 지속불가능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 만큼 돈벌이 세상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적 목소리도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다. 경쟁구조와 시장논리에 자기의 삶을 맡겨두는 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자본과 시장의 논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간 존재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서민들의 경제주의적 삶의 방식 속에 포함된 먹고 사는 괴로움을 이해하는 데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모순구조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이성적 인식도 중요하고, 경제주의적 삶의 이기성을 질타하고 대안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도덕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서민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이성적 혹은 도덕적 진단과 처방에 앞서 서민들의 경제적 고통에 충분히 아파하는 감수성이 더욱 요구된다.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삶의 현장은 우리 사회 도처에 있으며, 그러한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아픔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는 연대야말로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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