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관상학의 한계
그런데 관상학을 이처럼 기호론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관상이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이유가 금방 이해됩니다. 그것은 기호와 그 의미 사이는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관계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문화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역사적으로 가변적입니다.
서양 사람이 자주 동양인을 보고 뚱하다니, 표정이 없다니 하고 놀립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나는 서양 사람을 보면 도대체 표정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심지어 서양여자를 보아도 성적 호기심조차 생기지 않아요. 그녀들 체형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서양 사람과 동양 사람이 서로의 표정, 서로의 신체적 형태에 대해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관상학이 보편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도대체 불가능한 과제이죠. 그 때문에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꾸로 내면의 표현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표현이며 따라서 존재의 규정 속으로 전락한다. 이런 존재는 자기의식적 존재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연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표현인 동시에 다만 하나의 기호Zeichen와 같은 것이므로 표현된 내용은 표현하는 것의 상태와 전적으로 무차별하다.”(176쪽)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신체적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는 내면을 “가시화될 수 있는 비가시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방점은 ‘가시화’보다는 ‘비가시화’에 찍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자는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않으므로, 하나의 내면은 다른 신체적 관상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하나의 신체적 관상적 표현은 다른 내면을 지시할 수도 있겠죠.
이런 우연적 관계는 표정이 굳어진 형태라고 할 관상과 같이 자기의식적인 반성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이 경우 표정이 반성을 표현하는 것인지(이 경우 표정은 본래의 의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 아니면 의도의 외면적인 표현(이 경우 표현은 이미 본래의 의도로부터 멀리 벗어난다)인지 불분명하다는 거죠. 예를 들어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형태가 있다고 보죠. 그 형태는 자신의 행위의 외적인 각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 행위에 대한 자기반성의 각인이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누가 울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경우, 보통은 어깨를 들썩이는 것은 그의 감추어진 진짜 내면(사실은 슬프지 않다는 것)을 밝히는 증거가 됩니다만 동시에 슬픔을 나타내는 그저 인습적인 표현일 수도 있죠.
“개체에게 현상하는 직접적인 존재는 현실로부터 개체의 반성적 존재와 그의 내적 존재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또는 그런 반성적 존재와는 무차별한 것을 표현하는 기호 일 수도 있으니 결국 아무 것도 표현하지 못하는 기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체에게 그 기호는 그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얼굴Gesicht이면서 동시에 개체가 벗어던질 수 있는 그의 가면Mask일 수도 있다.”(176쪽)
이런 양자의 무차별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헤겔은 리히텐베르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리히텐베르그는 괴테와 동시대인인 자연과학자라 합니다. 그런데 그가 <관상학에 관해서>(1778)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에서 그는 관상학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했다고 합니다.
“관상학이 인간을 일단 이해했다고 한다면, 다시 수천 년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위대한 결단만이 문제가 된다.”(176쪽)
그는 과학자로서 관상학의 쓸모없음을 강조하는 말로 보입니다.
2)관상학의 동기
헤겔은 관상학이 출현하는 동기를 이렇게 파악합니다. 원래 행위와 의도(의도, 사념Meinung) 사이에 대립이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는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으니까요. 이런 대립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행위는 비본질적인 것이고, 의도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의도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찾게 됩니다. 그게 바로 신체나 얼굴의 형태 즉 관상이 되죠.
“이 진정한 내면은 행위에서 다소간 비본질적으로 표현되고, 진정한 표현은 개체의 형태에서 갖게 된다. 이 후자의 표현이 개체의 정신이 직접 감각적으로 현현하는 것이다.”(177쪽)
헤겔은 의도나 사념을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관상학의 동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상학에서 인물의 내면과 관상 사이에는 일종의 동어반복적인 관계가 성립할 뿐이라 합니다. 기호학적인 관계란 한 사회 또는 역사적 시대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기호학적인 관계이니까요. 이것은 정의의 문제이고 해석의 문제입니다. 이런 정의나 해석은 모두 관행에 의해 지배되고 있죠.
우선 관상학에서 <어떤 사람이 내면적으로 볼 때 어떤 인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일을 실행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도둑질을 할 사람이라 해서 그가 반드시 도둑놈이 되는 것은 아니죠. 그것은 그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종의 성향이고, 그것을 ‘행할 가능성(die Faeigkeit, es zu sein)’ 정도이죠. 이 가능성조차 아주 추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 할 사람이라 해도,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관상학은 현실적인 예측을 위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막연한 주장이 됩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여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관상학은 인물의 내면을 더욱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려 하죠. 그래서 예를 들어 단순히 “도둑놈이 될 인물이야” 이라고 말하지 않고, 더 구체적으로 그 사람은 “나라를 도둑질 할 인물”이라거나 “그저 좀 도둑이 될 인물”이라고 말하게 되죠. 이렇게 하면 좀 더 현실적으로 쓸모 있는 판단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부족하죠.
“고정된 추상적 규정은 이를 통해 개별적인 개인에 대한 구체적이며 무한하게 세분된 규정성으로 해소되고 이는 이제 그런 특성화Qualification보다 더 정교한 묘사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정교한 묘사조차도..사념된 존재 또는 개별적 개체를 언표하려는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현저하게 충분하지 못하다.”(177쪽)
이렇게 인물을 구체화하고 세분화하려면 인물 마다 관상이 대응되어야 하므로, 이에 따라서 관상에 대한 묘사도 더욱 구체화하고 세분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코가 길다”고 말하는 대신에, “코가 긴데, 끝이 구부러졌다”느니, 아니면 “코가 긴데 끝이 높이 들렸다”느니 하면서 아주 정교한 관상이 출현하게 되죠. 그래서 ‘구부러진 긴 코’를 가지면 ‘나라를 도둑질 할 사람’이며, ‘높이 들린 긴 코’를 가지면 ‘좀도둑이 될 사람’이라 규정되죠.
그러나 아무리 세분화하더라도, 추상적인 가능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실제 행동에 일치하도록 어떤 인물의 가능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규정된 인물이 실제로 그런 행동을 실행할 것인가는 의문이며, 따라서 관상학은 학문적으로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죠.
3)관상학과 머피의 법칙
더구나 어떤 인물을 표현하는 관상을 규정하려 할 때, 이 관상은 일종의 선취에 불과하죠. 왜냐하면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서 “어떤 관상을 가진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더라” 라는 식으로 규정된 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주 관상학을 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경험 또는 역사적으로 쌓여온 경험을 기초로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헤겔은 관상학에 경험적인 토대가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관상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종의 기호적인 표현이죠. 물론 그 밑에 어떤 기호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우연적인 기표-기의의 관계에 불과합니다. 자주 그런 기호학적인 근거는 지표나 도상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우의 코가 기니까, 코가 긴 사람은 여우같다고 간주되죠. 인상이 호랑이 같으면, 용기 있는 인물이 되죠. 기호학적으로는 의미가 있습니다만 실제 행동 예측에서는 전혀 무의미한 근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혹 이런 기호학적 관계에 어떤 경험적인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머피의 법칙에 불과하죠. 예를 들어 용한 점쟁이를 보죠. 그는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이 틀렸습니다. 그러나 틀린 사람은 별로 문제 삼지 않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연히 맞은 사람은 정말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점쟁이에 대해 떠들고 다니죠. 정말 용한 점쟁이라고 말이죠. 그 결과 그는 용한 점쟁이가 된 거죠. 우연이 필연이 되는 이런 구조, 그게 머피의 법칙입니다. 관상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로서 아주 인상적으로 각인 된 사람, 예를 들어 대도 조세형 같은 사람이 가진 신체적 특징(내가 보기에 턱이 빠진 상)을 통해 관상가는 누가 턱이 빠진 상이라는 특징을 가지면 도둑질 할 인물로 규정합니다. 헤겔은 이런 지식이란 마치 상인이 대목장이 서는 날에 꼭 비가 온다고 생각하든가, 아니면 주부가 빨래를 널려고 하면 꼭 비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헤겔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을 알았다면 굳이 이를 머피의 법칙이라 설명했을 겁니다.
결국 관상학은 동어반복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관상학적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학문이 발견하러 나서는 법칙은 두 사념된 측면들 사이의 관계이며, 따라서 공허한 사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념된 지식은 정신이 감각적 현존[관상]으로부터 나와서 자기 내로 반성하며, 그 특정한 현존은 그런 정신에 대해 무차별하고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므로, 그런 식으로 발견된 법칙에서 사념된 지식은 그런 법칙이 말하는 것은 없으며, 그저 순전한 잡담에 불과하거나 자기 자신이 지어낸 상념에 불과한 것을 얻을 뿐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됨에 틀림없다.”(178쪽)
4)행위와 결과주의
헤겔은 관상학을 비판하면서 리히텐슈타인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런 맥락에서 다시 리히텐슈타인을 인용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즉 누가 어떤 사람보고 그의 행위를 보니까 성실한 사람 같지만 관상을 보니 그는 무뢰한인 게 틀림없다고 하면, 그때는 따귀를 때리는 수밖에 없다고 리히텐슈타인이 말했다는 겁니다. 이런 리히텐슈타인의 말에 대해 헤겔이 덧붙인 말이 재미있는데 그 요지는 이런 말입니다. 즉 리히텐슈타인이 이런 관상가의 얼굴에 따귀를 때려야 한다는 처벌이 정말 응당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얼굴의 상을 보는 관상이 사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 얼굴에 대한 따귀를 때리는 것이니까요.
헤겔은 이까지를 통해 관상학을 비판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관상이 아니라, 행위야 말로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관상에 나타나는 내면이란 주관적인 사념, 성향에 지나지 않고 진정으로 객관적인 내면은 바로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존재는 오히려 그의 행위이다”
헤겔은 행위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사념을 지양한다고 합니다. 우선 ‘육체적으로 고정된 존재로서 사념된 것’을 지양한다고 합니다. 이 사념은 곧 그 사람의 관상을 통해 규정된 성향을 의미합니다. 행위는 관상에 보이는 성향대로 행위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이런 점에서 행위를 통해 인간은 ‘부정적인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이때 부정적 존재란 대상을 파괴하여 자기에게 동화시키는 욕망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때 부정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또 하나의 측면은 행위는 ‘사념이 지닌 언표불가능성Unsprechlichkeit der Meinun’을 제거한다는 군요. 이런 언표불가능성이란 사념 속에 존재하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죠. 하지만 행위를 하게 되면 이 가운데 특정한 것이 실현됩니다. 그는 이때 규정된 어떤 존재가 되죠. 비로소 언표가 가능하게 됩니다.
“행위는 단순하게 규정된, 일반적인 하나의 추상 속에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행위는 살인이고, 도둑질이며, 자선이고 용감한 행동 등이다.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언인지 언표가 가능하다. 행위는 이것이며, 그 존재는 기호가 아니라, 사건die Sache Selbst이다.”
의도, 성향에 대해 행위를 이렇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헤겔은 칸트의 윤리학과 대립됩니다. 칸트는 도덕에서 법칙주의를 주장했습니다. 행위는 도덕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했죠. 그런데 칸트는 이런 도덕적 행위가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내적인 경향성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행위의 결과 즉 합법성보다는 행위의 동기 즉 도덕성을 우선시했습니다. 칸트의 윤리학은 동기주의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행위가 중요하고 그것도 현재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가 실질적으로 어떤 결과를 이루는가에 따라서 행위를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의 윤리는 결과주의이죠.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 그의 산물과 그의 내면적 가능성, 능력이나 의도가 대립하면, 전자가 오직 진정한 현실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인간은 그런 산물에 관해 기만당하고, 행위로부터 내면으로 돌아오며, 이런 내면속에서 행위 속에서와는 다른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179쪽)
헤겔의 이런 구절을 보면 헤겔이 행위가 의도를 배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겔은 행위가 성과를 보존해서 현실적인 존재가 되는지, 그 성과를 상실하여, 스스로 소멸되어 버리는 것인지는 행위 자체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즉 행위가 주관적 의도를 얼마나 진실하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현실에 적합한지 아닌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헤겔은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행위의 대상성은 행위[의도속의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무엇인지[실제 사건으로서 행위]를 즉 그 행위가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를 보여줄 뿐이다.”(179쪽)
헤겔은 행위를 버리고 의도를 중요시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행위 대신 관상을 자기 의도의 진실된 존재로 간주하게 되니, 리히텐슈타인이 말하는 그런 반박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행동하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이성적 성격을 부인하니”, “그런 취급의 대상이 될 것”(179쪽)은 정해진 이치라는 것이죠.
이제 관상학에 대해 충분한 비판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헤겔은 당시 유행했던 또 하나의 학문 골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