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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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에 대하여...
둥글이 2007.04.26 2587

우리는 자신의 욕심과 좀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욕심을 있게 하는 자아를 버린다는 의미에서의 ‘비움’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비움’의 의지는 앞으로 변화될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토대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신중한 숙고가 필요하다.

스스로 \잘 비웠다\고 자부하고, 다른 이들로 부터 \잘 비워졌다\고 칭송 받는 이들의 삶이 \너\는 물론 \자연\에 대한 별다른 반향과 작용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점을 문제 삼고자 한다.
 
그것은 실지로는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서 그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찰 수 없기 때문이리라.
 
게중에 강도 넘지 않고 ‘배를 버려야 한다’면서 \뭘 일부로 비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말고 하냐\하며 반발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을 하는 대부분의 이들의 삶이 \스스로\에게는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과는 달리, \너\와 \환경\에 대한 별다른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음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야 말로 그들은 \너\(인류)와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 극히 무지하다.
그러한 \무지\를 \무위\로 포장하기 까지 하는 \넉넉함\에 사람들의 찬양이 끝없이 이어지기까지 한다.  
 
아마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애초에 \제대로 비울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조작된 욕망과 가치\ \개인주의\의 문제까지를 제대로 들여다 보려고 마음잡지 않고, 그 \(조작된 욕망과 가치/ 개인주의의)토대‘를 무너트리지 못하고 비움에 집중하려 했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순수한 영혼위에 덫 씌워진... 조작된 욕망과 가치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하고, 그 작용을 중화시킬 무엇인가를 찾지 못하고 무조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물론 개인적인 히스테리/강박증 같은 증세는 그러한 무턱댄 비움의 의지로 치유될 수는 있다.)  

이는 그러한 이들이 \나는 완전히 비웠다\고 믿고 외치고 있음에도 그 작용이 ‘너’(인류)와 자연에 미쳐지고 작용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 영혼에 덫씌워진 조작된 욕망과 가치(\자본주의적인 채움의 발상/개인주의적인 관점\)는, 아무리 그 얽어 매여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해 봤자 벗어 날 수 없다.
그러한 이해에 대한 ‘의심’조차 해보려 하지 않는 이들이 생각하는 [비움]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자본의 사고가 머리에 꽉꽉 들어찬 이들의 경우에는 \비움\의 문제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아 이거다\하는 직관을 얻었다 선 치더라도, 그것은 차원적으로 자기 수준의 발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태어나서 자라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비움\은 이미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된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이 서 있는 세계의 지반에 대한 분석과 비판과 반성...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그 머릿속에 들어찬 수 많은 왜곡되고 조작된 개념과 욕망, ‘인지구조’를 분쇄하기 위한 일상에서의 ‘처절한 투쟁’이 담보되지 않는 한, 우리는 ‘비웠다’고 떠벌릴 수는 있을 지언정 그 ‘비움’을 어렴풋이라도 인식할 수는 없다.
 
이렇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의 [채우고자 하는 가치]와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개인주의]가 충만한 세상에서 ‘비운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삶에는 그렇게 분명한 한계가 드러난다.
 
그들이 말하는 \비움\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평안\이 \너\(인류)와 \환경\에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않는 것을 도대체 저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향락을 일삼는 것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비움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삶에서 돈과 권력을 쥐고 향락에 빠져 있는 이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개인성\(이기성 까지는 아니더라도)이 발견되는 것을 보라.

이러한 비움을 추종하고 구하려고 하는 이들의 \바램\ 역시, \권력\과 \자본\의 추종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을 통해서도 그것은 반증된다.
그들은 진정 ‘비우기위해서’가 아니라 ‘비움’을 ‘갖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갈구하는 \자유\ \해탈\ \평안\은 \너\(인류)와 \환경\(자연)에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직 한산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 아래서 넉넉히 쉬고 여유를 즐기는 것에 주로 집중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택에 딸린 수영장에서 콜라를 빨면서 아가씨 엉덩이를 지켜보며 만족을 느끼는 갑부의 그것과 뭐가 다를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해서 스스로 \비우기 위해서 노력해온 이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비움은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반발하며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이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환락]과의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다. 그 \작은 차이\를 굳이 차이로 둔다면 그러한 차이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기준으로 한 ‘채움’과 ‘비움’의 의미는 너무 협소하지 않는가?  

‘비웠는지’ ‘안 비웠는지’의 진정한 차이의 ‘기준’은
\자기 자신을 벗어났는지\, \자기 자신에 갇혀있는지\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는 결국은 \개인주의\ \더 가지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일반적인 비움의 의지와 일반적인 비움의 실현은 의미가 작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자신이 살아온 가치와 문화, 인식의 틀로만 ‘비움’의 의미를 개념화 하고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는 이들은 계속 헛발질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즉, ‘나는 비우려고 노력한다’ (-결국은 비우려는 목적으로- 비우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놓는 경우도 같음), ‘나는 자아를 버린다’ (-결국은 자아를 버릴 목적으로 - 자아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같음)라는 식의 주문을 읊어대면서 비움을 실현하려는 이들은 자기가 서 있는 ‘지반의 작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터에 그렇게 스스로 ‘비운다’는 의지로 ‘모든 것을 내려 놓으려’ 행하는 것이, 결국은 생각대로 그렇게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여있는 지반위에서의 작용만 충실히 이끌 뿐이 아닌지에 대해서 숙고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총 정리를 해 보면 ‘비움’은 다음의 네 가지가 된다.

1. 자기 자신에 갇혀서 비우지 못하는 사람.
- ‘너’(인류)와 ‘자연’을 품지도 못했고, 그 삶이 항시 얽며여 있다.  
2. 자기 자신에 갇혀서 비웠다고 생각하는 사람.
- ‘너’(인류)와 ‘자연’을 품지는 못했지만, 항시 평온하고 자유롭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이들의 ‘비움’을 추종한다)
3.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도 비우지 못하는 사람.
- 개인성을 극복하고 ‘너’(인류)와 ‘자연’을 품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집중된 관심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4.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비우는 사람.
- ‘너’(인류)와 ‘자연’을 품고 이의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도 한없는 자유를 누린다.

* 계속적으로 문제삼아온 2번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부연의 필요가 있다.  
이들 자기 자신에 갇혀있는 비움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 스스로는 자유롭고 비웠다고 자부할 수 있을 줄은 몰라도 그것은 올바른 비움도 아니고, 올바른 ‘무위’의 실현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와 세상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물 흐르듯 한 자연스러운 관성으로 작용하는 것이 ’무위‘일 터인데, ‘너’(인류)가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 아랑 곳 않고, ‘자연’(환경)이 파괴되든 말든 혼자만 마음 평안하고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어떠한 실천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철저한 ‘격리’(자기 자신에 갇혀 있음)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 이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자신에 갇혔다’는 지적은 타당성을 갖는다.
 
문제는 ‘이러한 비움’(자기 자신에 갇혀 있는 비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일 수록
이러한 비움의 문제를 ‘구분’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게끔 억압하는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강을 넘지도 않고 배를 버리려는 습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기준’을 판단할 근거마저도 ‘버린’이유로 자신들이 빠진 함정을 알 수 없다. 이들의 입장이 극도의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로 일관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본 글에서
\너(인류)와 자연을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과 ’올바로 비운 사람‘을 하나로 연결했던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올바로 비울 수 있다\는 말을 강조하여 그러한 ‘비움’과 ‘실천’을 독려하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제대로 비웠으면 그런 활동이 자연스럽게 될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결과\를 통해서 제대로 비워지지 않았음이 드러냄으로 2부류의 사람(자기 자신에 갇힌 상태로 마음을 비운 사람)의 문제점을 분석하려 정리된 것이다.
우리는 너무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흔히 보다 보니 마치 그러한 부류의 비움만이 ‘정’인 것으로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비움‘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늘상 그랬던 것 처럼 ’회의주의자‘들과 ’허무주의자‘들에 의해서 상대주의적인 것으로 몰려가지 않기를...

나는 이 ‘비움’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상당수의 이들이 인간과 자연사랑에 대한 실천에 극히 무심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전혀 다른 한편으로는 망해가는 세상의 현실의 원인을 살폈다.
그러는 중에 이 두 개의 주체일 수도 있고, 객체일 수도 있는 대상이 어우러지는 것 자체가 특별한 작용의 원인이고 그 결과인 현실에 집중하면서 이 현실을 다만 기술적으로 엮어 낸 것 뿐이기에 회의주의자들과 허무주의자들의 충고는 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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