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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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쓴 글 하나...
이한오 2008.06.26 2421
최근 제가 있는 교회에서 군대다녀와 복학한 뒤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다 키워 놓고 자식 잃은 슬픔에 빠진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썼던 글인데,
한철연 회원여러분에게 인사겸해서 올립니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이한오(프란시스) 신부


촛불정국의 혼란한 와중에서도 아이들이 태어나는 소식과 가슴 아픈 부음(訃音)을 듣습니다. 축하한다는 전화를 끊자마자 영안실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게 드셔서 손자 손녀 재롱도 맛보고 세상사람 누구나 다 간다는 하늘나라로 부름 받은 분들의 경우라 해도 슬픈 일인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의 별세소식은 우리로 하여금 늘 초라한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의외의 죽음, 준비하지 못한 이별, 청천벽력 같은 사고로 가족을 잃은 분들 앞에 서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성서는 헤로데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을 때,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마태 2:18)라는 말씀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입니다.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입니다. 시인 최영미는 이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라고 노래합니다. 꽃은 지고 또 피겠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가수 조용필도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그 겨울의 찻집’에서)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눈물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진 꽃을 기억하는 증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울고 있는 사람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아니, 말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울고 있을 때, 울음을 통해 먼저 간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성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어로빅 선수들의 경기모습을 본 적이 있으시지요?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반복하거나, 한쪽 다리를 들고 곧 쓰러질 듯한 어려운 동작을 하면서도 그들의 눈과 입은 미소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가까이 보면 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힘을 쓰기에 이마에서 흐르는 땀까지 감출 수 없습니다. 저는 가족을 먼저 보낸 분들이 다시 일상에 돌아 왔을 때, 누구나 다 이 에어로빅 선수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 이마에서 흐는 땀이 눈물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저의 양가 어머니들도 병환중이십니다. 자연인이자 사제인 저에게 그분들은 어머니였다가, 타인들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나와 돌아가신 어머니 둘 중에서 누가 더 가슴 아파할지도 생각해 봅니다.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이 노래는 여전히 어머니들의 노래였습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노래요, 우리를 지으신 그분의 노래였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분께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습니다. 저 역시 위로받을 일이 많은 사람이지만, 또 진정으로 위로를 드리고 싶어 예수님께서 하신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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