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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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들,조선을만들다』라는책저자의퇴계관에대해
미래연 2008.06.15 2724


새로운 퇴계 이해를 돕기 위해,
기존의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비교해서 설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유명한 학자이면 더 흥미롭겠지요.
요즈음 인기 있는 저술가이자, 어느 신문에 매주 대형 역사 칼럼을 쓰시는 분의 견해와 비교해서 말씀드리지요.
그는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라는 책 속의 ‘주자대전을 섭렵한 퇴계 이황’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의 의견까지 물어가며.

“1543년 <<주자대전>>의 간행과 1561년 퇴계의 <<주자서 절요>>의 간행은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자대전>>이라는 마르지 않는 거대한 호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호수에 갇힌 그들은 다른 사유와 학문을 볼 수 없었다. 나는 1543년 <<주자대전>>의 인쇄와 퇴계의 <<주자서절요>>가 학문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재앙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99쪽)

그는 ‘주자대전’ 간행의 영향을 매우 단선적 시각에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퇴계 외에 ‘주자대전’을 섭렵한 아주 중요한 또 한 사람을 주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호남(광주)의 고봉 기대승입니다. 퇴계가 영남 땅에서 ‘주자서절요’를 간행하던 비슷한 시기에 고봉은 호남 땅에서 ‘주자문록’이라는 저술을 펴냅니다. 영호남의 ‘주자서절요’와 ‘주자문록’의 저자가 만나 연출해낸 사상사의 대향연에 대해서 그는 간과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게 뭐냐. 바로 그 유명한 ‘사단칠정론변’입니다.
그러니까 ‘주자대전’의 인쇄를, 그의 견해처럼 ‘학문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재앙’이었다고 폄하하기 전에 조선 땅에서 ‘주자대전’과 더불어 진행된 주자학의 새로운 전개에 대해 먼저 주목했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단칠정론의 의미에 대한 파악이기도 합니다.
여러 분들은 혹시 이 사단칠정론을 항간의 통설처럼 단순한 형이상학적 담론, 공리공담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론은 16세기 ‘사화(士禍)의 시대’라고 하는 질곡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즉 <<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본다>>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공리공담을 논하는 한가로운 지성의 유희로 오랜 세월 논변에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기묘사화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실 무렵에 터진 을사사화(1545)는 정치적 방식만으로는 시대의 전환을 이루기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케 한 사건이었다. 사림들은 좌절감을 딛고 절치부심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때마침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바 1543년에 인반된『주자대전』이었다. 그들은 주자대전 연구를 통해 주자학의 메시지에 크게 공감하였으며, 이를 사화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무기로 조직해 내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사단칠정논변’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사화의 시대 극복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기에 그들은 주자학을 단지 평면적으로 이해하고 소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세상사의 하고 많은 주제 중에 그들은 왜 유독 ‘사단’과 ‘칠정’이라는 인간 내면의 감정 문제를 해명하는 데 그 동안의『주자대전』연구를 통해 쌓은 내공(지식)을 총동원하여 그것도 무려 8년간이나 씨름하였을까? 그것은 사화의 시대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을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시대를 구원할 메시지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 바로 인간이 문제였다.”(240쪽)

그리고 나아가 사단칠정론변의 사상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 땅에서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전개에 견주어.

“조선의 학자들이 행위의 바탕인 ‘마음’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것은 비슷한 시기 중국 명나라에서 일어난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변화를 연상케 한다. 양명학 역시 실천철학으로서 주자학의 한계를 포착하고 인간의 ‘마음’에다 전적으로 사유를 집중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조선의 학자들은 ‘성즉리(性卽理)’라는 주자학의 기본 명제를 유지하면서 실천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면, 양명학은 아예 ‘심즉리(心卽理)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 내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성을 강조한 데 있다.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득세하면서 주자학이 생명을 잃어갈 때, 주자학은 조선으로  건너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 계기가 바로 사단칠정논변이었다. 조선 성리학은 결코 중국의 주자학을 답습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자학의 진화요 완결이며 ‘조선 성리학’  의 탄생인 것이다.“(『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본다』, 244쪽)

이처럼 퇴계는 당대의 소명에 충실했고, 사상사적으로도 주자학의 새로운 차원을 열 정도로 큰 기여를 했습니다. 물론 17세기 이후엔 \주자대전\이 권력의 텍스트가 되면서 그의 말대로 \학문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후인들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퇴계가 책임져야 한다면 퇴계로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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