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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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만주기행 3
이병창 2013.07.15 249
발해 안에 또 하나의 발해가 있다. 그 발해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건설한 발해농장이다. 우리는 발해농장을 찾아 떠났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라면 서울 사람보다는 부산 사람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산의 한 가운데 중앙동에 가면 그의 기념관이 있다. 나도 부산 있을 때 학생들과 더불어 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를 대표하는 활동이라면 1916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건설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일이다. 그가 1932년 경에 발해의 고토 옛 동경성 안에 건설한 것이 바로 발해농장이다.



그는 대종교도이기도 하며 대종교 총본사를 동경성에 이전하였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가 대종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임오교변이 발생했다. 임오교변의 빌미가 된 사건이 조선어학회의 회원인 이극로가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였다. 일제는 이 편지를 조선독립선언서로 조작해 이를 기초로 대종교 간부 21명을 체포 구금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어학회 탄압과 연결되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43년 8월 2일 고문 조국 광복을 보기 직전 목단강 시에서 숨졌다.



그런데 이번 기행에 참여한 역사가들이 구수회의를 여러 번 하였으나 쉽게 발해농장 터를 찾을 수 없었다. 워낙 넓었으니 한 마을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이드까지 참여해 현지인들에게 물어서 찾아가 본 곳은 분명 조선족 마을이었다. 정겨운 초가집 지붕도 있고 발해농장 시대 건설했다는 수로도 보이고, 논농사도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이 발해농장의 한 마을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여기서도 역사학자들의 강박증적인 양심이 출현했다. 이곳이 발해농장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보기에는 그 정도로 된 것이 아닐까? 동경성 안에 발해농장이 있었다 하지 않는가? 여기가 발해 동경성이니, 대체 뭐가 문제인가?



역사가들의 끈질긴 추적과 활달한 조선족 여성 가이드의 활약에 힘입어 대종교 본사의 건물이나 발해농장 관리 사무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발해진 안에 우리가 점심 먹었던 음식점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발해농장 관리 사무실을 확인한 이후 우리는 마침내 발해를 떠났다. 버스는 상당히 높은 산을 하나 넘어서 북만으로부터 동만으로 넘어 들어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길림 조선적 자치구에 속하는 현 중의 하나인 왕청현이다.



동북 기행 이튿날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논쟁에 들어갔다. 역사가가 어느 정도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가이다. 이미 E H Carr가 말했듯이 객관적 사실이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역사가들이 마음대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역사학자의 말로 이 논쟁은 마침내 대단원에 들어갔다. 역사가들은 남들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정도까지만 사실을 확인하면 된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자신의 말에 대해 알리바이만 댈 수 있다면 자유롭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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